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107화 (107/220)

107화.

리카르디스는 머뭇거리다 한 발짝 그녀에게 더 다가갔다. 사이로 사람 하나도 못 지나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로젤린이 시선을 위로 올려 리카르디스를 쳐다봤다. 당혹스러운지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고 있었지만 결코 다른 곳을 향하지는 않았다. 속눈썹이 깜박거렸다.

어떤 경계도 의심도 없이 이 거리를 받아들이는 로젤린의 모습에 리카르디스의 가슴 안쪽이 간지러워졌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흐르는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간질, 간질. 얼굴 표면부터 느껴진 감각이 손끝까지 펴져서 로젤린은 몸을 굳혔다.

리카르디스의 큰 손이 로젤린의 귀와 턱, 목 부분을 덮었다. 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목의 살갗을 스쳤다. 닿은 부분이 예민하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얼굴이 가까워져 로젤린은 눈을 꾹 감았다. 곧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잇세리온이 뒤에서 제 눈을 가렸다.

“이것은 내 가호다.”

따뜻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말랑한 볼을 슥 쓸었다.

“그러니 반드시 승리해라.”

막 볕에 말린 이불에 폭 쌓인 기분이었다. 한참 몽롱한 꿈의 경계선에 걸쳐 있던 로젤린은, 달큼한 냄새에 눈을 번쩍 떴다.

여태껏 리카르디스의 미모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미처 다른 감각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눈을 감고 있자 마치 꿀 같은, 황홀한 디저트 같은 향기가 흘러 들어왔다. 달콤한 향수 냄새가 그의 체취와 섞여 그녀의 본능을 일깨웠다.

로젤린이 코를 킁킁 움직이며 한층 그에게 다가섰다. 목에 다가갈수록 향이 짙었다.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리카르디스가 몸을 움찔 떨었다. 로젤린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부지런하게 냄새를 맡던 그녀가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리카르디스는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개를 들던 와중, 그녀의 코가 리카르디스의 턱을 가볍게 스친 탓이었다.

“전하에게서…….”

시선이 딱 닿았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눈동자 속에서 욕망을 읽어냈다.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 분위기 지금 뭐야. 나쁘진 않은데 뭔가 좀……. 그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의미 없는 반항은 끝을 맞이했다. 등에 벽이 턱 닿았다.

“부드럽고.”

로젤린의 눈이 나른하게 가늘어졌다. 그녀가 리카르디스의 허리 옆의 벽을 제 손으로 짚었다.

“달콤한.”

리카르디스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아니 이 사람! 왜 이렇게 잘생기고 박력이…….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경? 어디 계십니까?”

바로 그때, 시합 준비를 돕는 사람이 그녀를 찾았다. 한 마리의 맹수와, 그 맹수에게 먹히고 싶어 하는 이상한 먹잇감의 기묘한 대치는 끝을 맞이했다.

로젤린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디스를 올려 보는 눈동자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기고 오겠습니다. 모든 것은 전하를 위해.”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 중이었지. 굳어있던 리카르디스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로젤린을 배웅했다. 잇세리온이 저 멀리 뒤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전하…… 가시밭길을 걸으시는……우리 가엾은…….

* * *

예선전은 이틀 전에 끝났다. 대기실에 모인 사람들은 1차적으로 걸러진 실력자들뿐이었다. 한 번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남자들의 태도는 거칠고 호기로웠다. 어깨를 툭툭 부딪치며 다닌다거나, 시선이 마주치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는 기 싸움을 했다. 여기저기에서 험악한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음에도, 로젤린은 찬찬히 제 검을 훑어볼 뿐이었다.

“2조 32강전 준비해 주십시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경.”

그녀가 일어서자 모든 사람이 쳐다보았다. 로젤린은 그들의 시선을 무심히 떨치고는 대기실을 나섰다.

남자들에게는 영웅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여자들에게는 꿈에서 그리던 멋진 기사님에게 말 한마디라도 건넬 수 있는 기회의 장, 무투 대회. 그 인기는 매년 폭발적이었으나, 올해는 암표 상인이 다섯 배로 늘어날 만큼 열기가 더욱 뜨거웠다.

붉은 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의 로젤린! 소문의 그녀! 일라베니아의 마인! 상상만 하던 그녀의 무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삼십 년, 아니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로젤린의 출전으로 무투 대회 관할 행정원들만 죽어 나갔다.

로젤린이 미리 좋은 자리를 구해 놓은 덕에 칼릭스는 느긋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마차가 무투회장 앞에 도착했다. 하인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는 어떤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은 평범한 마차 속의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검은 머리, 녹색 눈동자! 붉은수레바퀴였다.

“어어! 아, 죄송합니다. 어, 어디서 오셨습니까?”

어디서 온 줄 뻔히 알면서 귀찮게 묻기는. 하지만 그 또한 열심히 일하는 중이니 딱히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칼릭스는 표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붉은수레바퀴.”

“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다.”

들뜬 기색으로 친절을 발휘하려던 남자는 제안이 거부당하자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칼릭스는 남자의 태도가 ‘칼릭스’가 아닌, 제 누이 ‘로젤린’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이라 직감했다.

평민들이 들어가는 입구 쪽을 흘끗 바라보니, 한 중년 남자가 [내 전 재산을 부탁해 로젤린!] 이라고 적힌 반듯한 직사각형의 천 조각을 들고 있었다.

“…….”

뭐, 인기가 대단했다. 비록 삐뚤어진 일확천금의 꿈을 가진 자의 성원이라 할지라도, 평판이 나쁜 것 같진 않아 안심이었다.

‘2-7……2-…….’

계단을 오르며 표에 적힌 자리를 찾던 칼릭스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지정된 자신의 좌석 옆에 낯익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 은색 눈동자. 순한 인상의 얼굴과 작은 체구를 가진 황금정원 자작의 장녀, 클로에였다.

클로에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가 눈썹 한쪽을 슥 들어 올려 보였다. 의외라기보다는, 왜 이제 왔느냐 하는 타박성 짙은 표정이었다.

“클로에 영애.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요. 앉으시는 편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칼릭스 경. 뒤에 계신 분이 기다리시네요.”

“아, 이런.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영애.”

우물쭈물하던 여인 한 명이 칼릭스의 사과에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두 손 꼭 쥐어 용기내고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어 보려 했으나, 칼릭스는 이미 자리에 앉은 후였다. 여자가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칼릭스는 자리에 앉은 채 주위를 둘러봤다. 클로에가 있다면 레이몬드도 있을 줄 알았는데. 큰뿔산양의 기사들은 보이는 반면 그는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요즘 굉장히 바쁘답니다. 매년 어김없이 반복되는 축제라 해도 익숙해지지는 않는 모양이에요.”

“수도로 사람이 몰리는 시기이니 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슬슬 시작하려는 것인지 대회의 진행을 원활하게 도울 병사들이 나와서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축제의 분위기에 취해 시끄럽게 떠들어 대었다. 칼릭스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를 돌리며 손장난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만남이 우연이라고 말할 생각이시라면…….”

옆을 슬쩍 보니 클로에가 풋, 웃음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없네요.”

“제게 무슨 용건이십니까?”

“로젤린 경을 안다고 그 동생까지 아는 것은 아니니까요. 만나 뵙고 싶었답니다.”

유명한 용병왕과 황실 제 2기사단 ‘깊은숲’의 상급 기사가 경기장에 올라 왔다. 종이 세 번 울리며 대회가 시작되었다. 변칙적인 용병들의 검술과 정직하고 파괴력 있는 황실 정통 검술의 격돌은 지루한 대련과 달리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았다. 클로에도 추임새를 넣어 가며 관전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 남자의 결투를 바라보던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참가자들의 수준이 높다더니, 확실히 볼 만하군요.”

클로에는 한참 어린 남자의 말에 담겨있는 승부욕을 읽어 냈다. 하여간 사내들이란. 그녀는 호선을 그린 입술을 부채 아래로 감췄다.

“용병왕에 금화 한 개.”

클로에의 말에 칼릭스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깊은숲에 걸어 보죠.”

둘 다 말없이 관전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한참 밀리던 용병왕이 갑자기 기세를 바꿔서 미친 듯 무기를 휘둘렀다. 매서운 일격들이 계속 이어지며, 깊은숲의 상급 기사가 검을 놓치고 말았다. 용병왕의 승리였다. 와아아,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승리자 용병왕 페이던! 페이던!

클로에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칼릭스도 경기장을 주시한 채 주머니를 뒤져 금화 한 개를 그녀의 손바닥에 놓았다.

“누가 봐도 황실 기사의 승산이 높지 않았습니까?”

“그런가요? 참고로 저 용병왕 페이던은 상단 일로 몇 번 만나 본 적 있답니다. 초반에 고전하는 척 해 달라는 부탁을 잘 들어줬지 뭐예요?”

“…….”

“그런 눈빛으로 볼 필요는 없어요. 상대가 강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상대가 어떤 검술을 쓰는지, 장점이 무엇인지 단점이 무엇인지. 그 정도는 알 수 있으나 강함의 척도는 숫자와 글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저 역시 도박을 하는 것과 다름없답니다.”

칼릭스의 집요한 눈빛에 클로에가 부채를 펴서 제 얼굴을 슬쩍 가렸다.

“물론 저 상급 기사보다 페이던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요.”

역시 알았잖아……. 칼릭스의 부루퉁해진 표정을 보고 클로에가 눈웃음을 지었다. 뚱한 얼굴이 로젤린과 아주 판박이였다.

“다음은 강철발굽 백작가와 물보라 기사단의 대결이로군요. 물보라가 이길 거예요.”

“이쯤 되면 점쟁이가 따로 없군요.”

페이던과 패자가 경기장을 내려가고, 두 사람이 올라왔다. 사회자가 그들의 이름을 쩌렁쩌렁 외쳤다.

“강철발굽 백작가의- 충실한 기사! 윌로스 경!”

“황실 제 4기사단. 물보라의 하급 기사- 핀 경!”

결과는 그녀가 말한 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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