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로젤린이 뒤로 풀쩍 물러서며 대련의 끝을 알렸다.
“하, 하아……. 로젤린 경. 시합 전에 너무 격하게 움직이시…….”
태연한 로젤린의 얼굴을 본 레티시아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지 않았군요……. 격하게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레티시아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에버하르트가 건네주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헤사가 달려와 로젤린에게 시원한 홍차와 달콤한 쿠키를 내밀었다. 트레이 위에 티 매트까지 깔아놓은 완벽한 차림새였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기사들이 소년을 미친 사람 바라보듯 했다.
“로젤린 경! 오늘은 날이 더워 산미가 더해진 과일 차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훌륭합니다. 새콤달콤 맛있습니다.”
“예. 새콤달콤.”
헤사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로젤린을 올려보았다. 무언가를 깊게 갈망하는 눈빛이었다. 로젤린이 헤사의 머리를 슥슥 쓸자, 소년은 그제야 만족한 듯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기는 것이 기분 좋아 예상보다도 시간을 더 크게 할애했다. 헤사는 햇살 아래 조는 동물처럼 눈을 나른하게 깜박였다.
“로젤린 경. 이제 슬슬 가 보셔야 합니다.”
“이동하도록 합시다. 레티시아 경, 에버하르트 경.”
두 사람의 입이 쭉 째졌다. 누군가에게 ‘경’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살짝 마카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보다 커다란 제자들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귀여웠다. 로젤린을 필두로 두 명의 하급 기사, 한 명의 수습 기사가 뒤를 따랐다.
무투 대회에서 우승하는 자는 거액의 상금과 명예를 거머쥐었다. 다음 해의 무투 대회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대륙에서 최고로 강한 자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 다녔으니, 검 좀 다루고 싸움 좀 할 줄 아는 자들에게는 가장 의미 있는 축제라 할 수 있었다.
용병과 평민들의 참가 수가 참가 인원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기사들의 신청 또한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용기의 증명이고 자신감의 표출이며, 공적으로는 자신이 몸담은 기사단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한 하나의 선전 수단이었다.
때문에 하얀밤 기사단에서도 매년 많은 기사들이 참가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하얀밤 기사단에서 무투대회에 참가한 단 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참가하라며 몇 명에게 권해 보기도 했으나 모두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삶이 지루합니까? 굳이 왜? 무엇을 위해 나가야 합니까? 라는 식이었다. 그 어떤 다른 누구보다도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그녀의 힘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우승은 로젤린이 따 놓은 당상인데 대체 무슨 영광을 보려고 몇 천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드려 맞아야 하는지 그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 파르딕트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 죽여 버려.”라고 했다가 부단장 나단에게 몹시 혼났다. 진짜 죽이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하지만 로젤린도 이제는 그런 말은 적당히 걸러 들을 정도로는 성장했기에, 뼈 한두 개 정도면 되는 건가? 하고 받아들인 상태였다.
타 기사단의 경우, 로젤린을 아니꼽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부풀려진 자극적인 소문들 사이에서 진실을 가려내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으므로.
그나마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마인이라는 사실 하나뿐인데, 일라베니아의 기사가 고작 마인 한 명에게 겁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리하여 무투 대회는 여느 때보다 뜨거웠고, 강한 자들이 여기저기 도사렸다.
로젤린이라는 기사를 시험하고 싶은 자들이 반, 그녀의 강함은 충분히 인지했으나 호기롭게 도전하는 이들이 반. 대기실을 가득 메운 거구의 남자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어떤 긴장감도 보이지 않는 느긋한 태도가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실력에 기반한 자신감인지, 근거 없는 소문을 잡아먹은 자만감인지. 예선전은 비공개로 치러졌기에 아직까지 그녀의 실력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넓은 대기실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잇세리온이었다. 로젤린 혼자 참가자들 사이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하얀 제복도 제복이고, 몇 없는 여자 참가자 중 하나이기도 하고, 머리색도 까맣기 때문인지 유독 눈에 확 띄었다.
“로젤린 경!”
“아, 비서관님.”
설마 무투 대회에 참가한 건가? 매일 책상 앞에서 머리를 굴리는 사람답게, 잇세리온은 주위 남자들의 딱 반쪽이었다.
‘하지만 체구가 강함을 결정하는 건 아니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장함이 감돌았다.
“봐드리지는 않습니다.”
“아, 아니, 아니. 저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멀쩡히 있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요. 전하께서 경을 찾으셔서 온 겁니다!”
잇세리온은 등골이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경험을 했다. 로젤린은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라는 말을 하고 대기실을 나갔다. 잇세리온은 다행이라는 그 말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이리라 직감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하.”
계단 아래에 있는 리카르디스는 오늘따라 더욱 빛났다. 그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빛나고 있었다. 귀걸이, 목걸이, 반지,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에도 금사와 은사, 보석으로 치장되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건국일이 가까워 질 즈음이면 황족들의 씀씀이는 헤퍼지고 치장은 화려해졌다. 오랜 기간 동안 대륙을 지배해 온 패왕의 저력을 보이는 것이다. 한낱 쓸데없는 허례허식이었으나 보여 주기식이 중요할 때도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그것을 잘 알았다. 평소에는 황족 반지만 착용하고 다니며, 화려한 것이라고는 제 얼굴뿐인 그도 온갖 장신구로 꾸며야 하는 때가 왔다. 피할 수 없으니 그저 최대한 장신구의 개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할 뿐.
건국제가 있는 달이 오면 월장석 성,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서는 시녀와 그가 체스를 두는 게 어색한 풍경이 아니었다. 10개에서 시작해, 시녀가 이기면 장신구 하나 더, 리카르디스가 이기면 장신구를 하나 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치사해도, 치사해도 이 정도로 치사할 수가. 머리 좋기로 유명한 황자와 정규교육만 겨우 받은 하급 귀족 출신 시녀의 체스 게임. 이게 말이 되냔 말이다.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내기였다. 때문에 장신구의 개수는 항상 3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도 시녀들이 클로에나 잇세리온에게 도움을 요청한 결과였다.
그런데 올해는 이게 무슨 횡재인지. 리카르디스가 치사하고 구질구질하게 체스 게임 운운하지 않고, 가만히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닌가. 시녀들은 눈물을 흘리며 영혼까지 끌어 모아 그를 치장했다.
밝아지는 시녀들의 표정만큼 리카르디스의 표정은 가라앉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우시다, 누가 보석인지 모르겠다는 헛소리들을 들어서 슬슬 열 받고 있었다. 반짝반짝한 것을 좋아하던 누군가를 위한 치장이었는데, 이게 뭐하는 미친 짓인지 공허한 마음이 들쯤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영혼이라도 빼앗긴 듯한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로젤린의 표정에 리카르디스는 계속해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그녀의 살짝 열린 틈새로 느릿한 숨이 내뱉어졌다. 열에 가득 찬 눈동자였다. 리카르디스는 목을 가다듬으며 달콤한 고뇌와 함께 꿀꺽 침을 삼켰다.
“흠, 음. 로젤린 경, 몸 상태는 어떤가?”
형식적인 질문에 로젤린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구름같이 부드럽고 봄바람처럼 따뜻한 감정을 단 한 번도 담은 적 없다는 듯. 매섭고 사납게. 덕분에 리카르디스도 진정할 수 있었다.
“만전의 상태입니다.”
눈빛이 형형했다. 그 한마디로 전투 상태로 돌입한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다치지 마라. 그대는 이런 쓸데없는 행사로 다쳐도 될 사람이 아니야.”
로젤린은 크게 충격 받았다. 중요한 행사라고 들었는데? 그녀의 생각을 읽어 낸 리카르디스가 입가를 만지며 웃었다.
“그대가 이겨 봤자 좋은 거라고는 고작…… 내 기분?”
“아.”
로젤린은 제 가슴 중앙에 손을 내려놓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럼 무척 중요한 행사로군요.”
리카르디스는 잠시 누구한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곧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리카르디스가 입을 가리고 몇 초간 붉어진 얼굴을 가다듬었다. 로젤린은 그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무투 대회를 성공리에 끝내겠다는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전하.”
“그래, 로젤린 경.”
“결승전에서 이긴 다음의 절차에 대해 레이몬드에게 배웠습니다.”
무투 대회의 우승자는 황제에게 직접 검을 하사받는 영광을 얻게 된다. 그런데 아직 32강전도 치르지 않은 로젤린이 당연하다는 듯이 제 자리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자의 영예를 전하께 바치고 싶었는데, 계속 황제 폐하께 바치라고 그래서…….”
로젤린이 우물우물 뒷말을 흐렸다.
“꼭 하라고 해서 폐하에게 하기는 할 겁니다만, 정말 그래도 되는 겁니까?”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말하는 요지를 깨달았다. 그가 숨기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영예와 영광을 바친다 어쩌고 하는 의례적인 말들이 마음에 걸린다는 거다. 자신이 충성한 것은 리카르디스, 2황자이니.
“해도 된다. 그래도 그대는 나의 기사가 아닌가.”
목소리가 잔뜩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로젤린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치지만 마라.”
“다치지 않습니다.”
“빨리 돌아와라.”
“금방 끝내겠습니다.”
잇세리온이 대기실에 있을 모든 참가자들에게 애도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