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예, 바이페렘…….”
이후 딤라와 로젤린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로젤린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어찌나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지. 그리고는 월장석 성에서는 애를 굶기냐고, 애가 이렇게 살도 하나 없이 말라비틀어진 게 안보이냐고 리카르디스를 닦달해 대서 그는 좀 억울했다.
딤라는 정말 평범한 할머니처럼 로젤린을 귀여워했다. 리카르디스는 그 광경에 조금 놀라는 중이었다. 그것은 리카르디스가 딤라를 대단하고 무서운 바이페렘으로 생각해서가 아니라, 로젤린에 대한 인식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마인 파문에 휩싸여 있었다. 여러 공으로 인해서 악의가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라고슈에서는 마력과 성력이 가진 의미가 일라베니아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체감하니 느낌이 이상했다. 리카르디스의 의문을 눈치챈, 로젤린의 입에 케이크를 주입하던 딤라가 말했다.
“마력이니 성력이니 하는 것은 제국인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라고슈의 추위는 마력보다 사납고, 봄날의 햇빛은 성력보다 따듯하니, 그저 그런 것 또한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대신전에서 들으면 난리가 날 소리였다. 그 위대한 힘이 어찌 한낱 자연의 일부라고 말하느냐고. 역시 라고슈의 야만인이라며 펄펄 날 뛸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제 턱선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걸었다.
“섭정관은 신이 없다 생각하십니까?”
“있으면 대륙이 이 모양 이 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리카르디스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그것도 그렇군요. 섭정관의 말대로라면, 축복의 밤 또한 신의 힘이 아닌 자연의 힘일 텐데. 지금은 어째서 자연이 순환을 멈춘 겁니까?”
“그 말을 황자가 하니…… 조금 웃기기는 하지만.”
뼈 있는 대답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정보를 취합하여 그려낸 그림. 일라베니아 황실에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는 지금의 사태에 큰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진실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눈썹만 까닥였다.
“그건 제가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흐르던 계곡도 산사태로 인해 길이 끊기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또한 자연의 흐름입니까?”
딤라가 피식 웃었다.
“산사태가 어떻게 일어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지진 때문인지, 누군가가 산을 부숴 놓았는지.”
딤라는 로젤린과 칼릭스에게 용돈을 쥐여 준 후 월장석 성을 떠났다.
13
월장석 성, 리카르디스의 집무실.
“섭정관 딤라의 월장석 성 방문 건으로 로젤린 경에게 많은 시선이 쏠려 있습니다. 무투 대회의 출전이 지금의 상황에 도움이 될지 회의적입니다.”
“이미 로젤린 경의 이름은 알려질 대로 알려졌어요, 나단 경. 이제 와서 숨겨 보았자 더 궁금해 질 뿐이에요. 자물쇠를 달아 놓으면 열고 싶고, 숨겨 놓으면 찾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걸요.”
클로에가 쿠키를 오독오독 씹으며 말을 덧붙였다.
“황제 폐하처럼 말이에요.”
리카르디스는 피곤함이 묻어 있는 얼굴을 쓸었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딤라와 리카르디스의 만남은 큰 화제를 낳았다. 하카브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던 딤라가 일라베니아의 2 황자를 만나러 그의 성까지 친히 행차했다. 단순히 안부만 물어볼 리 없으니 대단한 건이 오갔지 않겠냐는 소문이 돌았다.
여러 나라의 고위 인사들이 모인 일라베니아 황실이 들썩였다. 심지어는 황제, 라이노까지도.
그것이 리카르디스가 피곤한 이유였다. 몇 시간을 금강석 성에 붙잡혀 있다 겨우 풀려난 참이었다.
‘정말이지, 아침부터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닌데…….’
황제는 딤라가 월장석 성을 방문한 이유가 오로지 로젤린을 보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보다 윗세대의 인물이긴 하지만, 딤라의 성정이 어떤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의 핏줄들을 아끼고, 타국을 배척하는.
더군다나 하카브의 일로 라고슈가 큰일을 겪은 시점에서 후계자가 되지도 못한 타국의 황자와 동맹?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도 사실을 기반해, 딤라가 로젤린을 만날 겸 최근 발타의 땅에서 큰일을 당할 뻔한 자신을 위로하고자 방문하셨다고 대충 둘러 말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먼 곳을 보며 그녀의 이름을 꺼냈다.
[흠… 로젤린, 로젤린 에스터라…….]
좋은 조짐은 아니었다.
리카르디스는 관자놀이를 손마디로 꾹꾹 눌렀다. 골치가 아팠다.
“로젤린 경을 숨기는 것은 임시방편도 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황제의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무언가 찔리는 게 있으니 숨기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리카르디스는 시선을 멀리 두며 중얼 거렸다. 손가락이 딱, 딱, 딱 일정한 박자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를 둘러싼 측근들이 귀를 기울였다.
“황제가 ‘축복의 밤’에 대한 정보를 알면서도 마인인 로젤린 경을 내 곁에 머물게 하는 이유는 내가 그 의식에 대해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겠지. 거기에다 그녀가 붉은수레바퀴라는 사실이 이점으로 작용한 듯해. 황제에게 붉은수레바퀴는 충실한 사냥개. 그리고 로젤린은 그 자식이니. 황제는 그녀 또한 제 손 위에 있다 생각하는 것일지도. 또한 황제의 미약한 신성력으로는 축복의 밤을 부를 만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니 그녀의 존재가 무용지물이지 않나. 그러니 그녀를 그저 검은달의 대항마로 내세우려 내 곁에 뒀던 것이다. 내가 최전선에서 싸우는 인물이니.”
클로에는 깃펜을 들었다. 종이에는 회의 내용이 아니라 꽃이나 하트모양의 낙서 따위로 도배되고 있었다. 그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는 방법이었다.
“그간 잠잠했던 이유를 따져 보자면 몇 가지를 더 말할 수 있지만…… 그 많은 이유에도 불구하고 로젤린 경의 존재가 점점 커져 가니 경계심이 드는 모양이야. 좀 달래야 할 필요성이 있겠어.”
“어휴, 미운 47살.”
클로에가 펜대를 손 위에서 휙휙 돌리며 말하자 나단이 웃음을 꾹 참았다.
“무투 대회가 코앞이로군.”
“그대로 내보내실 생각입니까?”
“폐하께서 오늘 로젤린 경이 무투 대회에 나오는지 물어보더군. 나가야겠지. 준비된 무대에서 예정대로 활약하게 둔다. 마력은 보이지 않지만 무력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부풀려진 소문이 입증되는 순간이며, 일라베니아 황실과 나란히 걸어온 붉은수레바퀴의 충실함이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 것이다.”
“우승자가 되어 수많은 자가 우러러 볼 때에, 모든 영예와 영광을 황제 폐하에게?”
“생각보다도 그런 빤히 보이는 유치한 게 먹히기도 하는 법이거든. 그리고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것에 끔뻑 죽는 인간이고.”
다들 잘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결승이 끝난 후에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로젤린 경의 교육은…….”
“레이몬드에게 맡기겠어요.”
“그러고 보니 클로에, 결혼 준비로 바쁠 텐데, 오래 잡아 둬 미안하군.”
“어머, 걱정 안하셔도 괜찮답니다. 준비는 레이몬드가 혼자서도 빈틈없이 하고 있어요. 오늘은 제 드레스를 고르러 간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그 복잡한 결혼 준비를 혼자서 하고 있다고? 심지어는 웨딩드레스도 혼자 고르러 가는 거야? 남자들이 속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두 눈을 꾹꾹 누르던 리카르디스가 중요한 게 생각났다는 듯 급하게 말을 꺼냈다.
“아, 로젤린 경에게 상대를 죽이지 말라고 얘기해 두는 편이 좋겠군.”
“적당히 하라고 말을 해 두겠습니다.”
스타스가 대답했다.
“내장이라든가, 눈알이라든가, 팔을 뽑는다든가, 머리를 이렇게 저렇게 한다든가. 아무튼 관객들이 잔인하게 느낄 법한 전투 방식은 안된다고도.”
“……적당히 하라고 말해 두겠습니다.”
* * *
장관이었다. 로젤린과 그녀의 제자들이 대련하는 때가 되면 사람들이 어김없이 우르르 몰려왔다.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며 묵직한 일격을 날리는 레티시아, 정석적인 검술이 눈에 띄게 노련해진 에버하르트. 그리고 새로운 수습 기사 헤사는 가볍지만 날카로운, 변칙적인 공격을 사용했다.
같은 인물을 스승으로 두는 제자들은 비슷해지기 마련인데, 로젤린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모두 다른 양상을 보였다. 공통적인 점을 꼽자면, 무서울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막 하급 기사가 된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오랜 기간 하급 기사였던 자들에 비하면 아직 실전이 부족했지만, 실력만큼은 훌륭했다.
레티시아의 거대한 검이 로젤린을 향해 내려앉았다. 그녀의 붉은 갈색 머리가 머리끈을 탈출해 거칠게 흩어졌다. 하급 기사들에게 암암리에 붉은 사자라 불린다고 했던가. 레티시아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챙!
무식한 힘의 대결에 검이 비명을 질렀다. 다른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과연 로젤린을 업고 팔굽혀펴기를 백 개 넘게 하는 탄력적인 근육의 소유자다웠다.
로젤린이 검을 사선으로 쳐 올려 시선을 분산시키며 발로 레티시아의 무릎 관절을 공격했다. 퍽, 공격은 유효할 만큼의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레티시아가 다리를 들어 올려 정강이의 단단한 부분으로 그녀의 매서운 발길질을 막았다.
보통의 대련이라고 하면 검투와 박투를 나누어 진행하고는 했다. 하지만 로젤린은 실제의 전투에서 검으로만, 주먹으로만 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직접 체감했다. 갖은 암기와 더러운 수를 사용하며 제자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숱하게 겪은 결과,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초기 고전하던 모습을 탈피해 이제 제법 능숙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레티시아의 움직임을 눈으로 훑던 로젤린이 빙긋 웃었다. 큰 무기를 휘두르는 것치고는 빈틈이 크지 않다. 이정도면 합격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