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갈라·제르타예의 불꽃은 바이페렘 곁이 아니더라도 타오르는 모양이지만, 귀여운 것에 한정되는 모양입니다.”
딤라가 차를 홀짝 마셨다. 아까 전 여유만만하며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사내는 어디가고, 아기 새같이 파들파들 떨고 있는 귀여운 남자만 남아 있었다. 딤라가 낮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녀는 이곳으로부터 멀고도 추운 땅에서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 2황자 리카르디스에 대한 정보를 여럿 들었다. 그러나 많은 정보와 수식어가 고스란히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 위치의 사람이라면 그럴싸한 가면 한두 개쯤은 있기 마련이고, 퍼지는 정보는 보통 그런 단편적인 모습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몇 번 만나며 그를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증손녀의 도움으로 진짜 모습이 활짝 드러난 셈이었다. 딤라는 아직까지 정신 못 차리는 리카르디스를 보며 웃었다. 적어도 여유만만 해 보이는 얼굴보다는 이쪽이 마음에 들었다.
딤라는 자신의 주름진 손을 보았다. 오래된 시야는 먼지 낀 듯 부옇고, 늙은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은 간헐적으로 떨렸다. 몸 어디 한 곳 성한데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고장 날 일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여기저기 삐걱거리다 보면 결국에는 멈추게 되리라.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과거 불 같았던 때보다 성미가 급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리카르디스 황자.”
“……말씀하시지요.”
리카르디스는 손부채질을 하며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내가 머무르던 별장은 오래 된 무덤이고,”
분주하던 리카르디스의 손이 딱 멈췄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무덤을 기어 나온 산송장입니다.”
바람에 꽃잎이 실려와 찻잔에 떨어졌다. 짙고 맑은 홍차에 파문이 잔잔하게 일어났다. 딤라는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노인의 눈빛 속,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그것은 리카르디스에게는 아주 익숙했다. 로젤린에게서 항상 볼 수 있었던 종류였기 때문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가만 딤라의 말을 곱씹다 대답했다.
“무덤에서 일어나셔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영혼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딤라는 기침인지 거친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흑단 지팡이의 조각을 손으로 더듬었다.
“나는 산송장. 바이페렘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젖먹이라 불립니다. 라고슈는 상처로 너덜거려 두 살 난 아이처럼 부는 바람에도 울고, 발타의 더러운 들개 놈들은 그 상처의 냄새를 맡고 주위를 빙빙 돌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지금, 대륙의 아버지는 보아야 할 것을 외면하는 비겁자에 불과해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리카르디스는 당황을 애써 숨겼다. 딤라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차를 마시고, 로젤린을 보고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라고슈를 어두운 길로 끌고 들어가려는 그 모든 것들을, 무덤으로 데려가는 일이 산송장의 마지막 역할이지 않겠습니까.”
딤라가 지팡이를 꽉 쥐며 저 멀리 바라보았다. 작은 걸음에 발을 맞춰 걸어가는 세 명의 혈육을 담는 눈길이 온화했다.
단순히 플로에토를 실각시키기 위해 오랜 은거 생활을 청산했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딤라의 눈은 라고슈를 벗어나 대륙에 드리워진 전쟁의 기운에 닿았다. 거대한 두 집단의 싸움이다. 그 거대한 흐름 사이에 있는 것들은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일라베니아와 발타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치며, 모두를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피와 비명이 휩싸는 거대한 흐름이기에 결코 좋은 방향이라 말 할 수 없었다.
딤라는 지금 분쟁과 전쟁의 한 가운데에 서겠노라는 의사 표명을 했다. 라고슈를 위해 싸우고, 다음 대의 라고슈를 위해 물러섰던 인물은 다시 한 번 라고슈를 위해 몸이 가리가리 찢기는 격류에 몸을 던지고자 일어섰다.
사실 라고슈로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둘이 치고받고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며 공멸하기를 바란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딤라는 잘 알고 있었다. 썩은 상처는 도려내지 않으면 새살이 나지 않는다. 눈을 감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왕국의 문을 걸어 잠그는 일은 그저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후대에 미룰 뿐인 비겁한 일이노라고. 그녀는 미래의 라고슈를 위해 힘든 싸움을 감내하겠다 말한 것이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물어도 될는지요, 섭정관. 혹…… 저에게 기대를 거시는 겁니까?”
너무 당혹스러워서 속마음이 그대로 나와 버렸다. 말하면서도 바보 같은 질문이란 건 알았으나, 이미 추한 꼴은 다 보인 후라 그런지 부끄럽지는 않았다.
“기대는 누군가에게 걸 수 있는 종류의 마음이 아닙니다, 황자. 저절로 향하는 마음을 어찌 걸었네, 마네 하겠습니까. 그저 그 본인이 기대를 이끄는 힘이 있어야 하는지라,”
딤라가 검지와 엄지를 아주 조금 띄워 얼굴 앞에 들어 보였다. 짓궂은 표정이었다.
“이만큼 이끌렸다는 얘기입니다. 그 아기 새 같은 귀여움 때문에 말입니다.”
리카르디스는 크윽 신음을 삼켰다. 딤라가 웃었다. 놀리는 맛이 있는 귀여운 황자였다.
아이들이 있는 쪽을 다시 쳐다보니, 관디테의 무릎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뒹굴 거리고 있었다. 관디테는 너무 좋아서 기절하기 직전 상태처럼 보였다. 칼릭스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가증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미미!”
관디테의 무릎 위에서 고양이가 배를 보이며 뒹굴 거렸다. 소녀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제 감정을 자제하려 노력하며 부드럽게 짐승을 쓰다듬었다. 털 한 가닥 상할까 염려하는 조심스러운 손짓에 고양이 미미가 가르릉 거리며 기분 좋은 듯 울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하던 중, 분수의 가장자리를 도도하게 걸어가던 미미를 만나고부터 관디테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로젤린이 “미미.” 하고 불렀으나, 미미는 그녀의 말을 싹 무시하고 고양이 세수만 했다. 관디테가 애절하게 고양이를 쳐다보는 모습에 칼릭스는 결국 힘겹게 걸음을 옮겨 미미에게 다가가야만 했다.
억지로 데려오려는 것인가? 작은 짐승이라고 해도, 발버둥 치면 어린 바이페렘에게는 위험할 텐데. 관디테의 시종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칼릭스는 고양이의 뒷덜미를 덥석 잡거나 배 아래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는 등의 행동을 일체 하지도,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자리에 쪼그려 앉아 짐승과 눈높이를 맞추는 그의 모습을 본 시종들의 표정이 점점 묘하게 바뀌었다.
칼릭스가 쪼그려 앉은 채, 고양이 미미의 귀에다 뭐라 속닥대었다. 미미는 한번 하악질을 하고 두 번 고개를 젓다가, 마지막에는 ‘흠…….’ 하며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총총총 도도한 걸음으로 걸어와 관디테의 다리에 제 부드러운 몸을 잔뜩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관디테의 무표정은 산산조각 났다. 소녀의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다.
“…….”
소녀를 따르던 시종들만 이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 지금 칼릭스 경과 고양이 미미 간에 무슨…… 모종의 거래가 오간 거 같은데 아니야? 하는 의문이 잔뜩 담겨 있으나 칼릭스는 그들의 시선을 회피함으로써 그들의 의문도 회피했다.
그러고는 제 누이한테 다가가서 저번에 간 그 음식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 같은데요. 거기에 더해서 일일 노예권이요. 아 진짜……. 하면서 소곤거리는데, 시종들은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관디테는 분수에 앉아 고양이를 본격적으로 쓰다듬었다. 미미는 귀찮을 법도 한데 거래의 내용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걸 다 감당해 내었다.
한참 놀다 돌아가니 리카르디스와 딤라가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칼릭스는 재빨리 그들의 분위기를 읽었다. 음, 뭔가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딤라도 다른 귀족들을 압박할 때와는 다르게 편안히 있는 듯하고.
리카르디스가 웃으며 관디테를 맞이했다.
“구경은 잘 하셨습니까, 바이페렘.”
“음,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주 마음에 든다.”
“영광입니다.”
“아기 새와 고양이를 보기도 하고, 나무에 달린 열매도 먹었다. 아주 맛이 좋았다.”
잇세리온이 입을 턱 가렸다. 정원 여기저기에 널린 나무의 열매를 드셨다고요 바이페렘? 제대로 씻지도 않고, 깎지도 않고, 접시 위에 예쁘게 장식해서 진상한 걸 드신 게 아니고요?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일국의 왕이 그럴 리 없었다. 로젤린의 소행이 분명했다.
“로젤린 경이 목마를 태워 줘서 내 손으로 직접 큰 열매를 딸 수 있었다.”
부단장 나단이 살짝 뒷목을 잡았다. 하얀밤 기사단원들과 잇세리온이 로젤린을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야!
모두의 시선이 로젤린에게 모이자, 관디테가 입을 가리며 푸훗 웃었다.
“너무들 그러지 마라. 이런 것 또한 어릴 때가 아니면 하지 못하는 일 아니겠느냐. 로젤린 경은 나에게 앞으로 오지 못할 어린 시절을 선물해 주었으니, 그 또한 나에게 큰 기쁨이다.”
잇세리온은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관디테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의 얼굴도 한결 편해졌다. 로젤린은 소녀의 뒤에서 제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그래도, 로젤린 경은 예법을 더 익히는 편이 좋겠다. 남을 존중하고 내가 존중받기 위해 사람들끼리 정해 놓은 규칙이니, 고리타분하다 생각하지 말고 부단히 익히도록 하라. 미숙한 내 눈에도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인다. 제국인이 제르타예를 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기길 바라지 않으므로 노력하라.”
아, 역시. 그렇긴 하지요. 잇세리온은 풀이 죽었다. 로젤린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녀에게 혼나며 의기소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