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그것은 딤라를 띄워 주기 위한 것도 있었으나, 그들 자신 또한 그 대단한 딤라를 만났다는 사실에 크게 흥분해 저지른 실수였다.
[위대한 바이페렘으로 이름을 새긴…….]
으로 시작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딤라는 멍청한 놈들의 머리를 지팡이로 후려치는 대신 인자하게도 말로 설명해 줬다.
[케케묵은 과거일 뿐이니, 지금은 그저 바이페렘을 지키는 도페·제르타예 딤라. 그리 여겨 주시기를.]
그렇게까지 말해도 멍청한 놈들은 아이고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서 다시 금칠하기 바쁘더라. 그것을 단순한 겸양의 한 종류로 보았던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황제, 라이노 기란테스 일라베니아까지도. 딤라는 황제라는 놈이 달고 있는 것이 머리인지 장식물인지, 눈인지 옹이 구멍인지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 그런지 첫째 아들 엘피디오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였고.
그래서 딤라는 리카르디스에게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고 온 상태였다. 낯은 반반하니, 그나마 장식물로서의 가치는 있겠다 생각했는데, 이것 보아라.
깊은 호수 같은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이는 윤슬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나마 제정신 박힌 놈을 하나 만난 것이다. 딤라는 조금 흥미가 동했다. 갈라·제르타예의 두 아이들이 따르는 인물이라는 사실 또한 그에 한 몫을 더했다.
딤라는 미소를 거두었다. 그녀의 강퍅해 보이는 인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리카르디스 황자.”
“예, 섭정관,”
“이 늙은 몸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길게 둘러 가는 법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라고슈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이때에 제국의 어떠한 일에 관여할 생각이 없다. 이렇게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굉장히 단도직입적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생긋 웃었다.
“하나 말씀드리자면, 칼릭스 경을 회유해 섭정관을 모신 오늘의 일 뒤에 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모르는 일이시라?”
리카르디스가 더없이 근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명령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기껍지 않을 리 없으니. 모르는 일로 하기에는 너무 아깝군요. 차 한잔 하시며 편히 계시다 가시지요. 더 이상 섭정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리카르디스는 딤라의 잔을 직접 채웠다. 그녀는 차를 따르는 모습이 그렇게까지 우아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두고도 기죽지 않는 이는 몇 되지 않는데, 그런 척 위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 대등한 위치에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걸 배포가 크다 해야 하는지, 아니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라 봐야 하는지.
딤라는 나뭇잎 그림자 사이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에 그림같이 반짝이는 남자를 바라보다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일라베니아에 머무는 지금까지 사람을 끝없이 마주해 피로하였습니다. 권하신 시간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딤라는 쉬겠다는 말을 한 이후로는 정말 대륙의 유일한 제국, 그 유력한 후계자 중 한 명을 앞에 둔 것 같은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같이 앉아 있으나 대화를 나누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애초 딤라가 눈을 감고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리카르디스도 그녀에게 시선을 떼고는 불어오는 바람결을 제 눈으로 그렸다. 화창하게 좋은 날. 구름이 예쁘게 하늘에 수놓아져 있는 날이었다.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편안히 앉아 있던 딤라가 어느새 주위를 구경하고 있었다. 푸른 정원, 색색의 꽃이 만발해 있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공간. 그 끝에 바이페렘 관디테와 칼릭스. 그리고 로젤린이 보였다.
리카르디스를 향할 때 매섭게 불타오르던 딤라의 눈동자는 한 겨울의 난롯불처럼 따스한 온도로 그들을 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따라 시선을 고정했다.
관디테가 무어라 말하자 로젤린이 살짝 웃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리카르디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평소 웃는 모습을 많이 보지 못했던 탓일까. 햇살을 받으며,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웃는 로젤린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주 웃으면 좋을 텐데. 저리 웃으니 얼마나 예뻐.
“리카르디스 황자.”
덜컥, 로젤린의 곁에 있던 정신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큰 나무 그늘 아래 북쪽을 다스리는 라고슈의 섭정관과 앉아 있던 그 테이블로.
“예, 섭정관.”
리카르디스는 동요했던 마음을 숨기고 침착하게 대답하려 했으나 결국 깜짝 놀라고 말았다. 딤라의 표정이 한껏 구겨져 있었다. 너, 이 자식…… 하고 욕이라도 할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심기가 불편해진 이유가 뭔지 몰라 리카르디스는 당황스러웠다.
딤라는 고개를 휙 돌려 세 증손주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리카르디스를 향했다. 곧 그녀의 얼굴 위에 떠오른 감정은 경악이었다.
“……섭정관? 무슨 문제라도…….”
“사벡의 큰 아이에게 일이 생겨 먼 추운 땅에서 무척이나 마음고생을 하였습니다. 그 마음고생을 끝나게 해 준 황자에게 감사인사도 드릴 겸 온 것이었으나…….”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과 슬쩍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가 월장석 성까지 무거운 발걸음을 한 것에 그런 이유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딤라는 여전히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제 보니…… 그럴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르겠군요. 본인을 위한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딤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눈치챘다. 로젤린을 너무 빤히 바라보았던 게 문제였을까. 발뺌이라도 하려 입을 열었으나, 딤라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 보였다.
“……드러났습니까.”
“드러나다뿐이었을까요. 차라리 얼굴에 써 놓고 다니는 쪽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나마 전하의 미모 덕에 시선이 분산될 테니.”
리카르디스는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껄끄러운 상황을 외면하고자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었는데, 시야에 로젤린이 들어와 더 당혹스러웠다. 하필 고개를 돌려도…….
쪼그려 앉아 관디테와 얘기하던 그녀의 옆모습이 햇빛에 은은하게 빛났다. 눈을 깜박, 깜박하던 그녀가 서서히 얼굴을 돌렸다.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리카르디스의 숨이 멎었다. 로젤린이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덜컹, 심장도 멎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물을 뜨는 것처럼 두 손을 모은 채 쪼르륵 달려왔다. 아니야, 로젤린! 지금은 안 돼! 리카르디스는 등골을 따라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딤라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어찌하나 한번 보자는 모양새라 리카르디스는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전하, 섭정관.”
“음, 로젤린 경. 무슨 일로?”
“이걸 보십시오.”
테이블에 다가온 그녀가 모은 두 손을 불쑥 들이밀었다. 리카르디스와 딤라의 시선이 그녀의 손 안쪽을 향했다. 삐약 뺙. 꺅. 작은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하얗고 자그만 새가 나뭇잎을 겹겹이 쌓은 더미 위에 올라와 있었다.
딤라가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라고슈에서는 볼 수 없는 짐승이구나.”
“둥지에서 떨어진 모양입니다. 사람의 냄새가 나면 어미가 버린다고 해서, 나뭇잎으로 일단 감쌌습니다. 둥지로 올려놓기 전에 보여 드리고 싶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로젤린이 뿌듯하다는 듯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는 옆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딤라의 시선도 까맣게 잊은 채 미소 지었다. 예쁘고 귀여운 것을 보여 주고 싶어 소중하게 두 손 안에 가지고 왔다니. 이 얼마나 귀여운……. 가슴이 울렁거렸다.
“전하를 똑 닮았습니다.”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좋았을 것이다. 리카르디스의 미소가 쩍 굳었다.
“하얗고 부드럽고.”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건장한 남자를 아기 새에 비유하는 그녀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어졌다.
“귀여워서 지켜 주고 싶지 않습니까?”
리카르디스의 마음은 그 짧은 시간 안에 너덜너덜해졌다. 내가 하얗고 부드럽고 귀여웠군……. 그래서 지켜 주고 싶었나… 그래…….
“그래…… 아주…… 귀엽다……. 로젤린 경, 덕분에 진귀한…….”
크윽…. 리카르디스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꾹 쥐었다.
“……경험을 했어. 어린 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다. 고… 맙다. 로젤린 경. 어, 어미가 찾을지도 모르니 슬슬 돌려 놓는 쪽이 좋겠다. 나무……… 나무 위로 올라갈 때 조심하고.”
“예.”
로젤린이 방긋 웃고는 다시 관디테와 칼릭스에게 달려갔다. 딤라는 안쓰러움과 짜증을 반반 고루 섞은 시선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담은 여자에게서 하얗고 부드럽고 귀엽다는 말을 들은 남자의 심정이 어떤 꼴일지 대충 짐작이 간다는 표정이었다.
“……아무 말도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섭정관.”
“딱히 별말 할 생각은 없었지만, 황자가 은연중에 기대하는 게 있는 모양이라 한마디를 얹자면.”
리카르디스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증손녀와 증조할머니가 돌아가면서 공격하니 정신이 혼미했다.
“결혼 전 사벡에게 물어본 적 있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무어가 그리 마음에 들었느냐 하니.”
그는 칼릭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미리 들어 놓아 사벡이 붉은수레바퀴 백작 부인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가만히 고개 숙이고 딤라의 말을 경청했다.
“귀엽다 하더군요.”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손에 묻은 그 상태로 굳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얘기였다. 그 험상궂은 아저씨를 보고 귀엽다는 말이 나오다니 붉은수레바퀴 백작부인도 정말 보통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