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월장석 성 안에서 무슨 얘기가 오고 가는지 알 수 없으니, 다들 상상력을 발휘하며 소문을 크게 부풀릴 것이다. 딤라가 월장석 성을 방문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리카르디스 2황자와 라고슈가 동맹을 맺었다는 허황된 얘기들이 나돌아 다니리라.
힘은 힘이 모이는 곳에 모이기 마련이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화려한 보석함에 불과하나 다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한다. 엘피디오에게 붙어 있는 기회주의자들이 흔들릴 것이다.
딤라의 방문이 반가운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딤라의 혈육임이 밝혀진 지금, 로젤린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그녀를 탐내는 자들이 더욱 군침을 흘리는 문제가 발생했지만 반대로 더더욱 손을 대기는 힘들어졌다. 욕심을 잘못 부렸다간 그 딤라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비단 일라베니아의 귀족과 타국의 왕족뿐 아니라, 일라베니아 황실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특히나 발타의 기류가 심상치 않은 지금에는 더더욱.
라고슈의 힘이 어디에 실리느냐에 따라 판도가 뒤집힐 가능성도 있었다. 딤라가 제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그게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도 좋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딤라의 눈치를 봐서라도 황제나 엘피디오마저도 로젤린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지 못할 것이다.
적절한 때의, 아주 적절한 도움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씩 웃었다.
언제나 빛나던 월장석 성은 한층 더 빛나기 위해 꽃단장에 들어갔다. 로젤린도 몇 가지 교육을 받았다. 라고슈의 왕실 계보라던가 역사 따위의 거창한 것을 제외하고서, 딤라가 과거 라고슈의 위대한 바이페렘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에델바이스의 할머니가 된다는 것. 딱 그 정도의 표면적인 정보만 일러 주었다.
딤라가 거대한 힘을 쥐고 있는 권력자이고, 도움을 받으면 좋다는 식의 언급은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로젤린을 회유하여 딤라를 포섭하는 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리카르디스가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보다 의욕이 넘친 로젤린이 판을 아주 엎어 버리는 불상사가 굉장히 높은 확률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유가 더 크긴 했다.
애초에 딤라가 월장석 성에 방문하는 목적도 알지 못하는데, 뭘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준비도 없이 전장에 뛰어드는 일은 용기가 아니라 객기였다. 더군다나 상대는 백전노장. 어설픈 수작질은 금방 꿰뚫어 볼 게 뻔했다. 차라리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딤라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편이 중간은 가는 방법이었다.
약속의 때가 다가왔다. 찬란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리카르디스의 장신구가 번쩍 번쩍 빛났다. 로젤린은 시야를 가득 채우는 빛 무리에 계속 눈을 끔벅거려야만 했다. 리카르디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슬쩍 웃고 있을 때 마차가 도착했다. 칼릭스가 맨 처음에 내려, 딤라와 관디테를 에스코트했다.
“먼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이페렘 관디테. 일라베니아의 2황자 리카르디스입니다.”
리카르디스가 살짝 묵례하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짙은 밤색 고수머리의 어린 바이페렘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반겨 주어 고맙다, 2황자 리카르디스. 북풍의 냉기는 일라베니아에 미처 닿지 못하니, 닿는 걸음마다 피어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어 아주 기뻤다.”
“바이페렘의 기쁨을 위해 지고하신 분이 안배하셨나 봅니다.”
리카르디스는 관디테에서 딤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오는 길은 어떠셨습니까, 섭정관.”
리카르디스의 질문을 들으며 딤라는 그의 뒤에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번쩍이는 보석 빛에 정신 못 차리고 눈을 끔벅거리는 중이었다. 딤라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돌려 칼릭스와 시선을 맞췄다. 저게 내 증손녀가 맞느냐 묻는 눈빛에 칼릭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표정을 구긴 채,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면서 눈을 깜박이는 누이의 모습이 약간은… 좀…… 많이…… 영특해 보이지는 않았다. 일라베니아와 라고슈의 고위 인사들이 만나는 자리라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해 칼릭스의 마음은 답답해져 갔다. 아니, 평소에는 저렇게까지는 아니고요, 저것보다는 좀 낫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상은 그 말 또한 안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자리를 옮기자고 리카르디스가 말하려던 차, 눈을 감고 있던 로젤린이 불쑥 움직였다. 그녀는 리카르디스를 지나쳐 딤라를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관디테와 딤라의 호위 기사들이 깜짝 놀라며 칼을 반쯤 빼어 들었다.
캉!
반쯤 날을 보였던 검이 다시 검집에 처박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울렸다. 로젤린이 손잡이의 끝을 콱 짓눌러 밟아 검을 뽑으려던 호위의 행동을 저지시킨 것이다.
호위가 당황스러워 하는 사이 로젤린이 딤라를 향해 휙 주먹을 뻗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딤라를 주시한 채, 흉흉한 기세로.
“로젤린!”
“누님!”
악, 꺅 비명 소리가 퍼졌다. 로젤린이 딤라를 공격할 이유는 없었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거기까지 추론할 여유가 없었다.
몇 초가 지나도 늙은 섭정관의 비명 소리라던가, 병장기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그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잇세리온이 한쪽 눈을 살짝 떴다. 로젤린의 주먹이 향한 곳은 딤라의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얼굴 바로 옆이었다.
모두 숨소리도 못 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로젤린이 주먹을 제 앞으로 가지고 와서 쫙 폈다. 손바닥 안에 거대한 벌이 한 마리 죽어 있었다.
“벌입니다.”
눈이 있으면 그 정도는 보인다.
“등검은말벌. 도감에서 봤습니다.”
그건 몰랐다. 이름이 유명해 들어 본 적은 있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도 독이 강하기로 유명한 종이었다. 관디테처럼 어리거나 딤라같이 노쇠한 사람들이 쏘일 경우에는 위험성이 더더욱 높아졌다. 미연에 사건을 방지한 것은 장하지만…….
로젤린은 자신이 밟은 검의 주인에게 사과하고 손잡이를 닦아 주었다. 남자의 표정이 몹시 이상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구석구석까지 세심하게 마무리했다. 뒤에서 관디테가 까치발을 하고 기웃거렸다. 무얼 원하는지 눈치챈 로젤린이 등검은말벌을 소녀에게 보여 주었다. 관디테가 오, 하며 눈을 반짝였다.
“가지시겠습니까?”
어린 바이페렘이 수줍은 듯 대답하지 않고 주머니만 슥 내밀었다. 로젤린이 그 속에 벌레 사체를 곱게 잘 넣어 주자, 시녀들이 뒤에서 기겁했다.
리카르디스에게 다시 돌아오며 손을 탁탁 터는 로젤린은 정말로,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
다들 이 상황을 어떻게 흘려보내야 할지 몰라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탁탁.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눈 하나 꿈쩍 않던 딤라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주의를 환기했다.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까 리카르디스가 물었던 ‘오는 길은 어떠셨습니까?’ 의 대답인 듯했다. 리카르디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확실히,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와 바이페렘 관디테, 섭정관 딤라와 로젤린, 칼릭스. 그리고 호위들까지 줄줄이 이동했다. 날이 좋아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복도를 걷던 중, 관디테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으나 로젤린이 잽싸게 옷깃을 잡아채서 똑바로 세웠다. 대롱대롱 매달려 목이 졸린 소녀가 기침을 했다.
로젤린이 쩔쩔매며 관디테의 상태를 확인했다. 칼릭스도 당황해서 제 누이와 같이 자세를 낮추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관디테는 이 상황이 웃긴지 줄곧 고수하던 무표정을 지우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관디테의 의견이 어찌되었건, 연이어 발생한 사고에 로젤린은 스타스에게 기둥 뒤로 불려 가 잠시간 혼났다. 먼저 보고하고 움직여라, 왕족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왕족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둘 다 좋은 뜻에서 했는데 혼만 나서 그녀는 심통이 났다.
월장석 성의 녹음이 푸르게 드리운 중앙 정원. 큰 나무 아래 그늘이 진 곳에 자리 잡은 테이블을 끼고 딤라와 관디테, 리카르디스가 착석했다. 칼릭스는 빙그레 웃으며 관디테에게 말을 꺼냈다.
“바이페렘. 이맘때 쯤 꽃이 만개하는 월장석 성의 정원은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라고슈의 수도 모리엔은 바다 근처에 위치해 라고슈의 다른 지역보다는 기온이 높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꽃을 흔하게 볼 수는 없었다.
관디테가 눈알 굴리며 딤라의 눈치를 봤다. 딤라는 혼자서 아주 다 해 먹지 그러냐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칼릭스를 흘겨보았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눈웃음을 쳤다. 잇세리온이 칼릭스를 보고 입을 가렸다. 저것이 소문의 그 귀염둥이 칼…….
관디테는 로젤린과 칼릭스를 대동하고 정원을 구경하러 떠났다. 두 명의 성인이 어린아이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는 뒷모습을 딤라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달그락. 리카르디스가 내려놓은 잔이 접시에 부딪치며 맑은 소리가 울렸다. 딤라는 그제야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갈라·제르타예의 아이들이 따르는 분을 만나 뵙길 긴긴 시간 고대하였습니다.”
네가 내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리카르디스라는 작자냐. 와 같은 비꼼으로 들은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딱딱하고 사나운 미소였다.
“바이페렘을 비추는 도페·제르타예를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섭정관 딤라. 다시 한 번, 바이페렘 관디테 전하와 함께 먼 걸음을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딤라의 주름진 이마가 꿈틀거렸다. 잠시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는 시선이 리카르디스를 가늠하고 있었다.
옛 사람들이란 제 찬란했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일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탓이었을까.
딤라는 일라베니아에 도착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공통된 기류를 읽었다. 그녀를 섭정관이 아닌 과거의 위대한 바이페렘으로 보았다. 현재의 작고 어린 바이페렘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