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딤라는 칼릭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삼십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회장에 머물렀지만, 모두 딤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라고슈의 내전은 종식되었고, 어린 왕의 뒤에는 내가 있다’는 것.
라고슈 사절단과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가 빠져나간 연회는 한층 더 왁자지껄해졌다.
마차를 타고 가는 길. 바이페렘 관디테가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조금 당황했노라.”
“처음으로 일라베니아의 연회에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각국의 주요 인사가 모이는 자리라 중압감이 크셨을 텐데, 아주 의연하셨습니다.”
“음. 낚시대에 달린 미끼의 기분을 알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뜯어 먹히는 줄 알았다.”
관디테가 웃다가 칼릭스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래도 제르타예의 후손을 만나 마음 놓을 수 있었다.”
“분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딤라는 두 증손주의 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칼릭스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쓸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네 얼굴에서 사벡이 보이는구나, 칼.”
사벡은 붉은수레바퀴 백작부인, 에델바이스의 본명이었다. 높은 곳에 피는 에델바이스를 뜻하는 라고슈의 명칭, 사벡. 그녀가 일라베니아로 시집올 때에 사벡이 지닌 뜻을 일라베니아에 익숙한 형태로 바꾸었다. 이따금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에델바이스 더러 “사벡, 당신.” 하고 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불렀기에 칼릭스도 잘 알고 있었다.
“……네!”
칼릭스가 붉은수레바퀴 백작을 쏙 빼닮았다는 사실은 제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다. 대체 어머니의 흔적을 어디서 찾은 것인지는 몰라도 증조모가 닮았다는데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여기가.”
딤라가 가리키는 곳은 눈이었다.
‘음…….’
칼릭스는 속으로 신음했다. 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 중 특히나 닮은 곳이 눈이었다. 딤라의 시력이 많이 나쁜 듯했다. 눈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중, 딤라가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거짓말 못하는 성미는 붉은수레바퀴를 닮았느냐. 외관이야 붉은수레바퀴를 찍어 낸 듯하다만, 눈빛이 사벡을 닮았다. 제 가진 만큼의 다정함을 담아 낸 시선이야. 인간을 이루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을 물려주어 다행이구나.”
칼릭스는 어렸을 적부터 에델바이스에게 딤라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어려워하거나 무서워했지만, 자신은 어릴 때부터 하나도 안 무서웠다고.
아름답고 멋진 왕실보다 조금은 예스럽지만 고즈넉한 딤라의 별장을 가는 게 훨씬 좋아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들렀다고 했다. 딤라는 어린 손녀가 맹랑하게 제 발치에서 뒹굴 거리며 노는 모습에 호탕하게 웃었단다.
요즘도 에델바이스는 주기적으로 딤라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게 딤라가 말하는 다정함일까. 그렇다면 제 누이가 훨씬 닮은 것이리라. 그녀 또한 기사단 일로 바빠도 꼭 편지를 보내 주지 않던가. 먼 사람과 안부를 주고받는 일상적인 행위도 오랜 기간 쌓이고 쌓이면 다정함이 되곤 하니까.
솔직히 자신은 증조모 앞이라 갖은 귀여운 체 하고 있지, 평소의 모습을 보면 그녀도 다정하다는 말은 꺼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더러 냉혈한이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이니, 제 아버지랑 겉과 속이 똑 닮았느니 말하는 사람들이 딤라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할지 조금 궁금했다.
“한데, 붉은수레바퀴는 어디 갔을까…… 연회장 안에서는 보지 못하였는데.”
딤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굳이 따지자면 칼릭스도 붉은수레바퀴였지만, 지금 그녀가 찾는 붉은수레바퀴란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을 말하는 것이었다. 칼릭스는 창밖의 먼 풍경을 보며 말을 흘렸다.
“그…… 일로 무척이나 바쁘셔서…… 변경의 수비를…….”
“안타깝게 되었구나.”
딤라가 혀를 찼다. 칼릭스는 ‘죽이지 못해서’라는 뒷말을 읽어 내었다.
라고슈는 발타와는 다르지만, 발타만큼이나 폐쇄적인 기질이 있다. 외부 사람을 극도로 경계하고, 저들끼리 꽁꽁 뭉친다. 그래서 여타 다른 나라처럼 일라베니아 제국 사람과 혼인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딤라가 곱게 키운 에델바이스가 라고슈에 잠시 들린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반했다. 칼릭스는 제 어머니가 대체 아버지의 어디에 반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둘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딤라는 혈압이 올라 몇 번 쓰러질 뻔했다고 한다.
얼굴은 딱딱하게 사납고, 성격도 무뚝뚝하다. 저런 놈은 여자 팔자를 망칠 놈이라 말을 해도 에델바이스는 사랑의 열병을 너무도 혹독하게 앓았다. 고집이라면 어디 가서 지지 않는 딤라가 한풀 꺾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두 사람은 혼인하게 되었고, 딤라는 페르탄에게 덕담을 가장한 경고와 협박을 했다.
경고와 협박이 먹힌 것인지 원래 그럴 운명이었는지, 에델바이스는 나름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보냈다.
딤라가 받는 편지에도 번번이 행복하다는 내용만 적혀 있었으나, 일 년에 절반 이상을 다른 지역에 체류하는 남편을 둔 그녀가 외롭지 않을 리 없었다. 딤라는 가슴이 찢어졌다.
페르탄을 죽일 날만 받아 놓고 있던 그녀에게 일라베니아로 넘어온 이번은 좋은 기회였을 텐데, 그는 마침 며칠 전 국경을 지키러 떠난 상태였다.
칼릭스는 저번에 페르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감이 좋지 않다.]
발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그랬던 게 아니었어?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내려간 거야? 심지어 라고슈 사절단에 대한 정보는 황실에서조차 몰랐는데, 단순히 감 하나로 회피했단 말인가? 정말 기가 막혔다.
딤라가 이렇게 성을 내는데도 관디테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분명히 라고슈에서도 욕을 많이 했겠지 싶었다. 칼릭스는 딤라가 제 아버지 욕을 하는 것에 열심히 맞장구 쳤다. 맞습니다. 아버지가 좀…… 그러시는 경향이 있죠.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너무 진심이라서 술술 말이 흘러나왔다. 딤라는 칼릭스의 호응에 마음이 풀렸는지 성난 기색을 누그러트렸다.
“칼.”
“네, 증조할머님.”
“로젤린은 언제쯤 만나 볼 수 있겠니. 일라베니아에서 너희들을 보는 것만이 오로지 내 기쁨인데.”
로젤린을 불러 오겠다 말하려던 칼릭스는 입을 다물었다. 연회장에서 만난 이후 줄곧 딤라를 집안의 어른처럼 대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단순한 누군가의 증조할머니가 아니었다. 넓은 혹한의 땅의 충성을 받는 위대한 바이페렘. 제르타예의 불꽃을 되살린 자. 그리고 발타와의 동맹을 끊어 낸 자.
바라건 바라지 않건, 모두들 그녀를 그렇게 볼 것이다. 힘을 쥐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딤라를 향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누군가는 염치도 없다 할 것이다. 평생 만나지도 않던 혈육을 보자마자 그걸 이용할 생각부터 해? 솔직히 그런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본인의 미래고 안위고 다 버리고 뛰어든 판에 그 감정을 하나하나 음미할 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러니, 염치 불고하고.’
칼릭스는 눈을 접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누님은 리카르디스 전하의 호위라 함부로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증조할머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월장석 성으로 모셔도 될는지요. 누이도 증조할머님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딤라가 리카르디스에게, 로젤린에게 힘을 실어 주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월장석 성에 들어갔다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건, 어떤 거래가 오고가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모두들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것이다.
딤라의 낯빛이 바뀌었다. 귀여운 손주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과거 라고슈를 호령했던 바이페렘의 위엄이 언뜻 비쳤다.
“붉은수레바퀴도 확실히 보이긴 한다만…….”
딤라가 칼릭스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역시 사벡을 더 닮았구나. 내가 제 뜻대로 움직이리라는 건방진 생각을 품은 것을 보자니.”
칼릭스는 겸연쩍은 듯 씩 웃고는 나름의 애교를 더했다.
“저는 증조할머니에게 생일 선물을 받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태어난 날이…….”
“한참 남았습니다.”
딤라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웃기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한참 어이없어 한 이후에 칼릭스의 볼을 토닥이며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빤히 보이는 수작으로도 언제나 나를 움직였다는 것이, 사벡의 대단한 점이란다.”
“제가 어머니를 좀 많이 닮았습니다.”
칼릭스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했다.
* * *
월장석 성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칼릭스가 보내 온 서신에 바이페렘 관디테와 섭정관 딤라를 모시고 월장석 성에 방문해도 되겠냐는 내용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칼릭스의 서신을 다시 읽었다.
“누가 남매 아니라고 할까 봐. 칼릭스 경은 정말 로젤린 경을 쏙 빼닮았군.”
“사건 사고가 따른다는 점 말입니까?”
“시야 밖에서는 그 특징이 가속화 된다는 점까지 더해서.”
분명 좋은 기회이긴 했으나, 당황스러운 게 우선이었다. 딤라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난 칼릭스. 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딤라가 무거운 몸을 일으킨 것일까. 딤라는 자신이 움직였을 때의 풍파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월장석 성에 온다는 얘기는…….
“대체 뭘 한 걸까요. 칼릭스 경은.”
“비스타에서 위명이 자자한 귀염둥이 칼의 진면목이 드러났겠지. 그 남자는 저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강아지인 체 하는 게 특기인 것 같던데.”
“설마 섭정관께서 그걸로 마음을 움직이셨을까요.”
“어떤 거래가 오갔다고 하는 쪽이 더 마음이 섬뜩하지 않겠나? 대체 그녀가 뭘 요구했을 줄 알고?”
“아니요 전하. 저는 칼릭스 경의 애교 쪽이 좀 더 섬뜩합니다.”
“…마음만의 문제라면 충분히 이해는 간다만. 어쨌거나 흠…… 바빠지겠군.”
붉은수레바퀴 후계자의 이름을 달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 보겠다더니, 생각보다도 도움이 빠르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