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여태껏 하카브가 딤라의 존재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녀가 은퇴한 지 수십 년은 지났거니와, 그 이후로는 일절 왕국의 일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설적인 바이페렘. 하지만 지난 시대의 인물이며, 옛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 옛날의 설화가 갑자기 튀어나와 살아 있는 인물이 된 지금의 상황이 당혹스러운 건 하카브 뿐만이 아니었다.
플로에토는 유폐되고, 라고슈는 새로운 바이페렘을 맞이했다. 어린 왕, 관디테는 실각된 플로에토의 조카로 딤라에게는 증손녀가 되는 셈이었다. 딤라는 아직 어린 바이페렘을 보호하기 위해 은거를 마치고 섭정으로서 나섰다. 몇 대 전에 물러간 노쇠한 여왕이었으나, 아직 그녀의 힘은 라고슈 전역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었다.
바이페렘, 아니 이제 섭정이 된 딤라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린 바이페렘이 총총 걸음으로 그녀를 따랐다. 하카브가 있는 방향이었다.
그녀의 핏줄을 이런저런 수작질로 꼬여 내어 라고슈에 혼란을 야기한 자, 하카브. 그에 대한 딤라의 감정이 어떨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암만 거친 라고슈 사람이라 하더라도 지팡이로 냅다 머리를 내려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온건히 인사만 오가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라고슈의 사절단을 주시했다. 딤라가 하카브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하카브와 발타의 귀족들. 그리고 딤라와 소녀의 뒤를 따르는 라고슈 사절단. 두 무리가 대치했다. 연회장에 라고슈의 싸늘한 북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하카브가 웃는 얼굴로 먼저 정적을 깨트렸다.
“이 즐거운 자리에서 라고슈의 새로운 바이페렘을 뵈어 영광입니다. 하카브 위, 리비타. 발타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바이페렘 관디테는 하카브의 반 쯤 되는 키에도 불구하고 그를 내려다보는 듯, 도도하게 턱을 들고 인사를 받았다.
“힉살라의 첫 번째 아들. 얘기는 익히 들었노라. 축복이 가득한 날에 만나 나 또한 기쁘다.”
익히 들었다는 얘기는 결코 좋은 게 아닐 것 같았다. 하카브가 웃으며 딤라에게로 눈을 돌렸다.
“제가 무어라 칭하면 실례가 되지 않을는지요.”
“과거의 이름은 빛 바랐으니, 지금은 섭정관에 족합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섭정관 딤라.”
그녀가 주름이 푹 들어갈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나 또한 왕자와의 만남을 무척이나 고대하였습니다. 기쁨이 아닐 수 없군요.”
리카르디스는 한기가 들어 제 팔을 쓸었다. 그의 옆에서 르원이 제 가슴을 툭툭 치고 있었다. 먹은 것이 체하는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저라면, 저 자리에서 울 겁니다.”
잇세리온이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럴싸한 미소를 띠고 있는 하카브도 잇세리온과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한없이 기뻐졌다. 리카르디스는 꽁꽁 얼어 있는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주 꿀맛이었다.
“이런, 하카브 왕자. 표정이 좋지 않은데, 혹 따로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었는지요.”
리카르디스도 샴페인을 뿜을 뻔했다.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하카브는 2초간의 공백 후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그 2초간 무슨 생각을 했을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있겠…….”
“언젠가 한번 라고슈의 왕성에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왕자.”
딤라가 그의 말을 싹둑 끊었다. 하카브가 하하 웃음을 흘렸다.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섭정관.”
“플로에토도 왕자를 보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홀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로부터 벗어나 발치와 잔의 끄트머리, 샹들리에 주위를 배회했다. 너무나도 거북했다. 역시나 라고슈. 직진밖에 모르는 야생마 같은 나라였다.
달그락. 딤라의 지팡이가 바닥을 뒹굴었다. 일부러 떨어트린 것인지,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실수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카브가 굳은 낯으로 그녀의 지팡이를 주워 주었다. 딤라는 하카브의 손길이 닿은 부분을 손수건으로 슥슥 닦으며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이런, 직접 주워주시다니. 감사합니다, 하카브 위 리비타.”
“……별 말씀을.”
“이만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 보아야겠습니다. 다음에 만나 또 즐거운 대화를 나누길 바랍니다.”
즐거운 대화… 아……. 누군가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돌아서서 걷다 하카브를 돌아보았다.
“라고슈는 은혜와 원한을 잊지 않습니다. 이 빚은 다음에 갚도록 하지요.”
지금 지팡이를 주워 준 일을 말하는 것인지, 플로에토의 일을 말하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르원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잇세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 손 좀 주물러 줘. 체한 거 같아.”
잇세리온이 제 동생의 손을 조물거리는 그때까지도 하카브는 가만히 딤라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가볍게 숨을 내뱉은 그가 경직된 미소를 그대로 걸친 채 연회장을 떠났다. 하카브 주위에 있던 발타의 귀족들도 우르르 빠져나갔다.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하지 못할, 회의가 간절해 보였다.
크게 팽창해 터질 것 같던 분위기는 그 분위기를 받치고 있던 한 축이 빠져나감으로써 완화되었다.
딤라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고, 어린 바이페렘을 끌고 다니며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녔다. 한 나라의 왕과 섭정이라기보다는 증손녀와 증조모처럼 보일 뿐이었다.
누구 하나 그들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조용히 눈치만 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리카르디스는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테라스에 나가 있다가 막 연회장에 발을 들인 남자였다. 그는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보지 못했으나, 직감적으로 무언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숨죽인 공간의 기류와 사람들의 시선이 흐르는 중심을 금세 파악하고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릭스의 눈동자가 딤라와 어린 바이페렘에게 닿았다.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군지 알아본 것 같긴 한데 크게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곧장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라고슈의 사절단이 있는 쪽으로.
당황한 리카르디스는 스쳐지나가는 칼릭스의 손목을 탁 틀어쥐었다. 의문스럽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그의 누이와 똑 닮아 있었다. 사고치고는 쳤는지도 모르는 그 표정.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속삭였다. 입술 하나 움직이지 않는 훌륭한 복화술이었다.
“칼릭스 경. 나는 경의 누이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갑작스러운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지금 그대의 행선지에 대해 내가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괜한 걱정이 맞나?”
칼릭스가 본인의 행선지, 딤라를 보고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걱정 마시죠.”
당당해도, 당당해도, 당당을 해도! 이렇게나 당당할 수가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망설이다가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칼릭스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딤라를 향하고 있었다.
‘대체 뭘 걱정하지 말라는…….’
모두 발이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 이 정적인 공간 속에서 한 사람만이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칼릭스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곧 그가 딤라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몇 대를 대물림 해 오는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성정은 유명했다. 휘어질 바에야 부서지는, 제 이득을 위해 달콤한 말 하나 할 줄 모르는, 융통성이라고는 없고 고집스럽고 깐깐한.
그런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후계자가 타국의 유명하고 힘 있는 왕족에게 접근할만한 이유? 감히 추론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칼릭스는 라고슈의 사절단 앞에 당도했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사고를 친다고 자신이 수습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로젤린에게 학습된 탓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칼릭스는 먼저 바이페렘 관디테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어린 바이페렘은 칼릭스와 몇 마디 나누더니 그 나이 대의 아이처럼 방긋 웃었다. 아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 다들 궁금해 슬금슬금 그들을 향해 몇 발짝씩 다가갔다.
칼릭스는 곧 무릎을 꿇고 딤라의 손등에 제 이마를 가볍게 대었다. 라고슈의 아이들이 어른에게 보이는 예의였다.
“갈라·제르타예. 사벡의 큰아들 칼릭스입니다.”
챙그랑.
누군가가 떨어트린 포크가 대리석에 부딪치며 청명한 소리를 울렸다. 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경악했다.
또 다른 증손주가 나타났다! 심지어는 그게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라니!
그, 그러고 보면 붉은수레바퀴 백작부인이 라고슈 출신이었죠? 왕족 방계 가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딤라가 오죽 윗세대 사람입니까. 라고슈에 잡히는 왕족 적당히 붙잡고 물어보면 전부 딤라의 손녀 손자, 아니면 증손녀 증손자라고요. 시끌벅적, 자기들끼리 묻고 답하고 정신이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미간을 좁힌 채 머리를 굴렸다. 잇세리온과 르원도 사태를 깨닫고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당장 섭정관 딤라가 칼릭스의 증조모라는 사실도 기겁하며 놀랄 일이었으나, 그보다 이 성안에 있을 또 다른 증손주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로젤린. 그녀 또한 붉은수레바퀴의 자식이 아니던가. 딤라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로젤린을 둘러싼 정세가 어떠한 방향으로 흐를지, 휩쓸리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 둬야 했다.
잇세리온은 두통이 이는 듯 머리를 꾹꾹 누르며 얘기했다.
“타국에 있는 혈육을 반기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 그렇게 된다면 딤라 섭정관과 로젤린 경. 두 사람의 관계는 실상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라고슈 왕족들은 대대로 일라베니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쪽의 피가 섞인 증손주를…….”
라고 잇세리온이 말하는 순간 딤라가 무릎을 꿇은 칼릭스의 볼에 진하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는 주름진 손으로 칼릭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쓰다듬다가 꼬집기도 하고, 다시 반대쪽 볼에 입을 맞추고 활짝 웃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핏줄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살가웠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칼릭스는 무척이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딱딱한 얼굴을 부드럽게 녹이며 애정을 온전히 받아 내었다.
“매우 좋아하시네요. 일라베니아의 피가 좀 섞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나 봅니다. 큰 인물답게 큰마음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르원은 여전히 체기가 가시지 않는지 제 명치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