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99화 (99/220)

99화.

하카브의 자만이 아니었다. 바이페렘 플로에토의 세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라고슈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많은 왕족과 귀족을 규합시켜 그녀를 끌어내리기에는 한참 부족할 것이다. 이번 대의 라고슈 왕족은 불의의 사고로 많이 죽어 나가, 그녀 외의 걸출한 인물은 찾기 힘들었다. 어리거나 어리석은 자들뿐이니, 내전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바이페렘, 플로에토가 실각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굳은 얼굴로 목각 인형처럼 르원을 슥 돌아보았다.

“플로에토가 실각했다고?”

그녀를 끌어낼 만한 인물이 라고슈에 남아 있었던가?

연회장이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다. 커다란 아치 모양의 입구로 라고슈의 새로운 바이페렘이 걸어 들어왔다. 리카르디스는 그 인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여덟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귀족들이 나라를 쥐고 흔들려는 건가. 라고슈도 끝났군.”

저 어린아이가 귀족과 왕족의 각성을 촉구하며 플로에토를 끌어내자 했겠는가. 다 꼭두각시놀음이다.

하카브를 쳐다보니,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제 볼을 느릿하게 쓸고 있었다.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뭐 썩 나쁘지는 않다. 그런 뜻인 듯했다. 내전으로 결속력이 약해진 왕국을 다스리는 꼭두각시 왕 하나 구워 먹지 못하겠느냐 하는 자신감이 보였다.

발타가 나서기 전에 일라베니아가 손을 써야 했다. 북쪽의 거대한 땅덩어리를 지배하는 라고슈. 그들은 앞으로 급격히 변화할 대륙의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들 라고슈의 어린 왕에게 우르르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인파에 바이페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낯선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자 바이페렘은 눈에 띄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카브는 어린 바이페렘이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면서 즐거워했다. 그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다가,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하카브의 시선이 소녀에게서 벗어났다. 그 순간 연회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이목도 입구로 모여들었다.

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흑색의 지팡이가 홀의 바닥을 울렸다. 혼란과 소란을 잠재우는 묵직한 소리였다. 빛이 쏟아지는 입구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고집스러운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는 라고슈 왕족만이 사용할 수 있는 꽃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어린 바이페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총총 걸어갔다.

리카르디스가 르원을 돌아보았다. 누구냐고 묻는 눈빛에 르원은 어깨만 으쓱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굴렸다. 탁한 보라빛 눈동자, 작은 체구임에도 감히 내려다볼 수 없는 기세. 70대 중후반의 왕족?

리카르디스는 머릿속으로 라고슈의 왕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한 지점에 멈춰 섰다.

‘설마……?’

리카르디스가 당혹스러운 낯빛을 숨기기 위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는 곧 시선을 돌려 하카브를 찾았다. 아까 전 느긋하게 발걸음을 움직이던 남자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 있었다. 언제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듯 여유로웠던 남자의 표정이 조금 비틀려 있었다.

그의 주위로 발타의 사절단이 급하게 모여들었다. 정보를 물어 온 자들이 하카브의 귓가에 다급히 속삭이고 있었다. 하카브는 굳은 미소가 걸린 입술을 슥 쓸며 나이 든 여인만 주시했다.

‘곤란한데.’

리카르디스는 멀리서 그의 입 모양을 읽었다. 리카르디스는 하카브의 반응으로 노파의 정체를 확신했다. 연회장이 술렁였다. 나이 든 귀족 몇몇이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바이페렘, 딤라…….”

그녀는 작고 큰 부족으로 이루어진 약소국 라고슈를 규합하여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 올린 장본인이었다.

플로에토 3대 전의 바이페렘. 딤라의 등장이었다.

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부족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아주 오래 거슬러가야 했다. 때는, 지도에 라고슈라는 이름이 없던 시절.

대륙 위에 자리 잡은 나라들이 서로 몸집을 불리고, 작은 부족들을 섬멸해 땅을 차지하고자 벌이는 정복 전쟁은 그 당시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러한 흐름에 따라 약한 자들끼리 뭉쳐 새로운 나라를 탄생시키는 일 또한 아주 흔했다.

라고슈도 그렇게 건국된 나라였다. 그 전까지 서로 검을 겨누던 열세 개 부족은 외부의 적으로 인해 빠르게 결속했다.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고자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그들의 맹세는 검고 단단한 라고슈의 돌에 조각되어 왕성의 최 하단부로 옮겨졌다. 라고슈의 땅을 밟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서약 위에 살아가고 있음을 명심하길 바라며.

초대 왕을 선출하는 과정은 열세 개 부족의 다수결로 이루어졌다. 결과는 만장일치로, 팔 한쪽이 없는 여자가 왕관을 쓰게 되었다. 라고슈의 건국을 위해 수년 동안 쉴 틈 없이 추운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부족들을 설득하고 협박했던 공로는 시간이 지난다고 빛 바랄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서약이나 다름없었다. 라고슈 왕의 호칭이 ‘영원한 서약’을 뜻하는 ‘바이페렘’으로 불리게 된 이유였다.

라고슈를 지키기로 맹세한 나머지 열두 명의 부족장은 ‘제르타예’라 불리게 되었다. 지하 깊은 곳 영원한 서약의 주위를 밝히는 ‘꺼지지 않는 불꽃’을 의미했다.

그들은 힘을 모아 다른 나라의 침략을 막아 내고, 서로가 서로를 지켰다. 영원한 서약의 내용 그대로. 그러나 한차례 대륙을 휘감아 몰아쳤던 전운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흩어지게 되었다. 피 냄새 나는 대지 위로 평화가 서서히 깃들기 시작했다.

쟁취한 승리와 평화는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가는 달콤함에 불과했다. 많은 것이 변했으나, 그들이 디디고 있는 땅이 춥고 척박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았다. 싸움은 예견된 것이었다.

분쟁을 외부로 돌리지 못했던 이유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휴전협정을 맺은 그때에 다시 침략전쟁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칫 했다가는 다른 나라들의 동맹군에 라고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라고슈 내부. 그들끼리의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승패가 갈림에 따라 하나가 되었던 사람들 또한 갈라졌다. 비록 ‘라고슈’ 라는 이름에 묶여 있었다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균열은 점차 선명해졌다.

그러한 분위기는 아주 오래 지속되어 지금으로부터 몇 세대 전까지 이어졌다. 덕분에 약소국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뭉치지 못하니 약하며, 약하니 성장하지 못한다. 악순환의 굴레였다.

그런 때에 딤라가 즉위했다. 그녀는 바이페렘의 칭호를 달자마자 왕실이 몇 대를 걸쳐 쌓아온 부를 조각내어 라고슈의 곳곳에 퍼트렸다. 작은 나라를 건국할 수 있을 정도의 방대한 금액이었다.

모두들 바보 같은 짓이라 했다. 돈을 쥐고 있기에 그 엉망진창인 나라를 통치할 수 있던 것인데, 딤라는 제 힘을 전부 나눠줘 버린 셈이었다.

왕은 백성을 보살피고, 백성은 왕을 존경하며 서로 간의 유대로 나라를 형성한다? 그저 이상뿐인, 헛된 바람들이라며 욕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딤라는 언제나 어떤 이상도 꿈도 가지지 않은 자는 위에 설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순응이라는 말로 눈을 감아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싸움을 피하는 비겁자들이여. 왕은 비겁해서는 안 되고, 결코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녀가 가고자 하는 방향은 막 즉위한 철부지 여왕의 이상론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었다.

권력자들이 딤라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왕의 말로가 어떻겠느냐. 그것은 비단 라고슈 왕국 내부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인접한 다른 나라들이 라고슈를 넘보기 시작했다.

겔리츠 왕국이 라고슈 왕국의 국경을 무단으로 넘어서 하나의 마을을 섬멸했다. 본격적인 침략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겔리츠 왕국은 이후,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지도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지게 되었다.

서로 물고 뜯기만 하던 부족들이 딤라 아래 빠르게 뭉쳐 일어선 것이다. 언제나 싸움을 달고 사는 전투 민족. 눈 폭풍에서도 살아남은 강한 전사들. 저들끼리 치고받아서 몰랐다 뿐이지, 그 칼날이 제대로 벼려져 외부로 향한 순간 모두가 그들의 위험함을 알게 되었다.

[추운 나라에서는 혼자 살아갈 수 없다, 형제들이여. 서로가 서로의 등을 지키겠다는 맹세는 천년의 돌에 새겨져 열 두 개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영원히 비추리라.]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망각했던 서약을 딤라가 일깨웠다. 희미하게 꺼져 가던 제르타예의 불꽃들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물론 오랜 균열을 한 번에 이어 붙일 수는 없었다. 왕실을 경시하거나 더 나아가 반反 라고슈를 지향하는 무리도 더러 생겨나, 겨우 나아가고자 하는 라고슈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은 온건하게 베풀기만 하는 젊은 바이페렘에게 이 세대를 이끌어갈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겔리츠 왕국과의 전쟁으로 방비가 허술해진 타 부족을 약탈하는 행위가 라고슈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딤라는 땅 위에 흐르는 형제들의 피에 분노했다. 경고는 없었다. 자애로운 군주, 그 모습 뒤에 가려져 있던 흉포한 전사는 형제를 해치는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날뛰던 자들은 그녀의 검 아래 무릎 꿇었다.

이후로도 딤라는 때로는 당근, 때로는 채찍으로 라고슈를 움직이고, 묻혀 있는 자원을 발굴해 타국과 무역교류를 성사시키는 등의 한 사람의 일대기라고 도무지 볼 수 없는 갖은 업적들을 이뤄 냈다.

딤라의 치세 이후 라고슈에 대한 인식은 급격하게 변했다.

‘저들끼리 잡아먹는 무식한 야만인의 나라’에서, ‘자칫하면 잡아먹힐지도 모르니 건드리면 안 되는 야만인의 나라’로. 그 얘기를 들은 딤라는 왕좌 위에서 굴러 떨어져 깔깔깔 웃었다고 한다.

그렇게 일생을 바쳐 나라를 우뚝 세우고 물러났더니…….

손녀, 플로에토가 라고슈에 다른 나라의 세력을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 국가의 자원을 야금야금 빼돌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만약 딤라가 무덤 안에 있었다고 해도 관 짝을 발로 차고 나올 만한 사태였으니, 지금의 상황에 그녀의 등장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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