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98화 (98/220)

98화.

발타 식 인사야, 아까 레이몬드와 하카브. 파르딕트와 하카브. 리카르디스와 하카브도 다 했던 것인데. 갑작스레 이상한 감정이 덮쳐 왔다. 먹던 디저트를 뺏긴 것같이 심통이 나기도, 서럽기도 했다. 가슴을 헛헛하게 떠도는 감정에 로젤린은 입 안쪽의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발로 카펫을 밟고 있다가 딴짓 한다고 파르딕트에게 혼나기도 했다.

리카르디스와 간제는 테이블을 끼고 마주 앉았다. 양 쪽 다 호위 인력이 많다 보니 전투 직전의 대치 상태처럼 보였다.

간제는 쯧, 혀를 차고는 고개를 까딱했다. 모르는 이가 보기에도 작작하고 좀 나가 있으라는 얘기처럼 들렸으나, 호위하는 자들은 꿈쩍 할 줄을 몰랐다.

리카르디스가 괜찮다고 만류하려던 차,

“못 볼꼴을 보여 드렸군요, 전하. 오라비의 사람들인지라 제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마인 부대니 뭐니 하며 목을 꼿꼿이 세우고 다니던 놈들인데, 일라베니아에 와서까지도 저러고 있군요. 대신 사과드리지요.”

간제의 발언 때문에 다들 잠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왕녀의 호위인 만큼이나 단순한 전사들이 아닐 거란 생각은 했으나, 하카브가 직접 붙인 사람들인 데다가, 마인 부대?

로젤린이 감지해 내지 못했으니, ‘파편’으로 만들어진 인조적인 마인 부대는 아니었다. 순수한 마인의 경우, 마력을 운용하지 않으면 로젤린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카브가 믿는 구석이 이것이었나 보다. 순수한 마인으로 이루어진 전사들.

그리고 그 전사들은 간제의 발언에 눈썹을 높게 올리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물론 찰나에 불과했고, 곧 얼굴 표정을 수습했지만 그를 눈치채지 못한 기사단원은 없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그들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리카르디스는 가면같이 웃는 얼굴로 간제를 바라보았다. 이 왕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혀 발타 쪽에 득이 될 발언은 아니었다. 무얼 바라는 걸까. 간제는 주위의 얼어붙은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르르 녹을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걱정 마시지요. 누구를 해하라는 말은 없더이다. 그저 광견병 걸린 미친개처럼 날뛰는 제 입단속을 하라 붙여 놓은 자들입니다. 이놈들 기세등등한 게 꼴 보기 싫었는데, 마침 잘 와 주셨습니다. 전하께서 계시면 쪽도 못 쓸 인간들이니 말입니다. 뭐라 욕 좀 해 주시지요. 들어도 찍소리도 못할 겁니다.”

호위대의 대장처럼 보이는 자가 제 두 눈을 지그시 눌렀다.

리카르디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당황한 기색을 숨겼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정치판에서 그가 제 진심을 내보이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나, 지금은…….

‘미쳤나?’

그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곱게 자란 왕녀인줄 알았는데, 곱게 자란 미친 왕녀였다.

“……이토록 방문을 환대해 주시니, 기쁘군요. 음……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간제 왕녀. 여정은 어떠셨는지.”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말에 에둘러 답하며 급히 화제를 옮겼다. 간제는 욕해 달라는 말이 진심이었던지 아쉽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곧 차를 홀짝이며 흑갈색의 눈동자를 굴렸다. 곰곰이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곧 이마에 주름을 잡고 답했다.

“발타나 일라베니아나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비슷하더군요. 시체가 오죽 들끓는 게 아니라, 답답한 마차 생활만 했지 뭡니까.”

들어 본 적도 없는 참신한 대답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입을 가리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들어도 무례한 말이었다. 하지만 간제의 말에 악의가 없음은 진즉에 파악했다. 정말 순수한 감탄과 감상뿐이라 그게 도리어 웃겼다. 잇세리온이 멍한 눈으로 간제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호위단의 단장도 잇세리온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미쳤나? 봄날의 망아지 같은 왕녀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재앙 같은 입이 일라베니아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 활개 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간제는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 서린 경악을 읽었는지 어설프게 웃으며 변명했다. 자신이 말한 것이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친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당신들의 나라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다는 듯.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비위가 좀 약해서.”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하도 참아 배가 당겨 오기 시작했다. 그녀 뒤에 시시각각 얼굴색을 바꾸는 호위 단장과 간제 왕녀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자아내는 이 기묘한 분위기가 어찌나 웃긴지.

호위대의 대장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생각해, 하카브 왕자가 불렀다며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간제가 짜증냈다.

“소식을 알리는 사람도 들어오지도 않았고, 네가 나가지도 않았는데 오라버니가 불렀는지 안 불렀는지 어찌 알고그래? 오라버니와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사이더냐? 한 몸이기라도 해? 불쾌하니 썩 떨어져라.”

그녀는 씩씩 성을 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으로는 잔뜩 불만스러워 해도 순순히 따르는 걸 보면, 그녀를 호위하는 남자에게 제법 많은 권한이 있는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멈추고 간제를 염려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카브가 그녀를…….’

해친다든가? 여러 정보를 일라베니아 측에 넘긴 상황이니 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았다. 하카브에게 혈육의 정 같은 게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다른 형제들의 목은 물론이고, 동복형제 두 명도 망설임 없이 살해한 인물이 아니던가. 그나마 장소가 장소다 보니, 당장에 그녀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테지만…….

리카르디스의 복잡한 속내를 눈치챈 것인지 일어서 있던 간제가 후후 웃었다.

“걱정 마시지요.”

“…….”

“오라버니는…… 하카브는.”

호위 단장이 또 쩍 입을 벌렸다. 왕자 전하의 이름을 감히! 이 왕녀를 진짜!

“나를 절대 죽이지 않을 테니.”

계속 웃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 싸늘한 무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잠깐이었고, 간제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달라붙었던 무언가를 털어 버렸다. 다시 웃은 그녀는 볼에 손을 가져다 대며 가련한 표정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이번 만남도 짧았군요. 올해에 가장 아쉬운 순간이지 뭡니까.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이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그는 간제의 말을 가로채는 것으로 배웅을 대신했다.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기를.”

간제가 아하하 웃었다. 간제는 시녀와 호위단에게 쌓여서 곧 밖으로 나서야 했다. 그녀는 제 팔을 붙잡은 호위 단장의 손을 장신구의 뾰족한 부분으로 푹 찔렀다. 호위 단장이 앓는 소리를 냈다.

* * *

연회는 연일 계속 이어졌다. 참석이 의무는 아니지만, 여러 정보와 교류가 오고 가는 장소였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붙어 있는 쪽이 이득이었다. 리카르디스 또한 그런 이유로 매일 연회장에 얼굴을 보여야 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쌓여감에 따라 그는 점점 지쳐 갔다.

“망해 버려…… 일라베니아…… 흔적도 없이…….”

제국의 황자가 매일 밤 자신의 나라더러 망하라는 말을 내뱉고 풀썩 쓰러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로젤린은 일부러 데리고 가지 않았다. 그녀만큼 믿음직한 호위도 없지만, 그녀만큼 불안한 사람도 없었다.

더군다나 로젤린이 벌일 수많은 예상 범위 내의 사건을 제외하고도 불안 요소는 많았다. 로젤린의 이름이 유명한 만큼이나, 그녀를 탐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다. 축복의 밤에 대한 비밀을 모르더라도, 강한 무기라고 하니 탐나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앞에 로젤린을 미끼로 내놓고 살살 꾀는 방법도 있으나, 미끼가 너무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그 의견은 기각되었다. 파티에서 가끔 만나는 하카브는 리카르디스의 뒤에 있어야 할, 누군가의 부재에 그저 가만히 웃기만 했다.

리카르디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참석했다. 돌아다니다 보니 저 멀리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칼릭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칼릭스는 스물일곱 번째 여인과 춤을 추는 리카르디스를 보며 짠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리카르디스가 울컥해할 찰나, 칼릭스의 눈빛이 한층 더 슬퍼졌다. 비 오는 날 강아지를 보는 얼굴이었다. 알고 보니 스물여덟 번째의 여인이 리카르디스에게 다가가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뒤에 선 잇세리온이 속삭였다.

“힐리사고의 왕녀, 지옐입니다.”

리카르디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속삭였다.

“이래 보여도 아직 머리는 돌아가고 있다, 잇세리온. 어제 그녀가 나에게 다섯 번 찾아와 여섯 번 춤을 신청하고 내 발을 일곱 번 밟았는데 잊을 수 있을 리가.”

내 상태가 그렇게 심각해 보이나? 리카르디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힐리사고의 왕녀를 맞이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발길이 절로 흐르는 듯합니다. 리카르디스 전하께서는 그렇지 않으신지요?”

힐리사고의 왕녀가 빙빙 돌려 말하며 빨리 춤을 신청하라 재촉했다. 리카르디스가 떨리는 입가를 애써 억누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려 할 때였다.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몇 명의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제 주인들을 찾아갔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을 찾는 상급 기사 르원을 발견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

리카르디스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옮기자 힐리사고의 왕녀가 작게 혀를 쯧 찼다. 돌아보니 사냥감을 놓친 맹수의 눈빛을 하고 있어 리카르디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르원이 다가와 리카르디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고슈의 사절단이 막 도착했습니다.”

그 말이 이르는 사실은 명백했다. 라고슈의 내전이, 끝났다.

“생각보다 빨리 정리됐군.”

리카르디스의 시선이 연회장 내부를 훑었다. 그는 저 멀리에 벽에 기대어 느긋하게 사태를 관전하는 하카브를 발견했다.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입에서 입으로 “라고슈…….”나 “플로에토…….” 같은 단어를 서로 나르고 있으니 그 또한 라고슈의 사절단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안색 하나, 행동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깊은 관계에 있는 바이페렘 플로에토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듯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