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하카브의 뜨거운 눈빛을 눈치챈 하얀밤의 기사단원들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하카브가 두 팔 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로젤린 대신, 앞에 불쑥 나타난 레이몬드를 안게 되었다. 사내들의 단단한 가슴근육이 서로 맞닿았다. 하카브도 레이몬드도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만입니다. 왕자 전하! 이렇게 반겨 주시니 기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레이몬드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하카브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레이몬드를 토닥이며 볼에 키스했다. 레이몬드도 하카브의 볼에 쭈와압 키스했다. 그쯤 되면 흡입이라는 표현이 더욱 가까웠다.
하카브가 로젤린에게 가려고 할쯤이면 상급 기사 동료들이 앞으로 나와 그녀 대신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섯 번째, 수염이 까슬한 파르딕트에게 거칠고 긴 입맞춤을 받은 하카브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무기 없는 전투가 소강이 된 후, 남자들이 불쾌해 보이는 얼굴로 제 입과 볼을 슥슥 닦아 댔다. 리카르디스는 그 더러운 공방을 입을 가린 채 관전했다. 꼴 보기 싫었다. 안 좋은 쪽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하카브에게 잠시나마 미간을 찌푸리게 할 정도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좋았는데, 보는 사람마저도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카브는 로젤린을 여러 번 돌아보며 계속해 아쉽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기사만 열 명이라 포기해야 했다.
시녀가 응접실에 손님을 대접할 준비가 끝났노라 알렸다.
응접실에 들어선 로젤린은 잽싸게 주위를 훑었다. 미리 들어와 있던 호위들, 하카브와 같이 방문한 귀족들, 발타에서 같이 온 하인들과 숨 쉬지 않는 사물, 공간을 이루는 벽과 천장, 바닥까지.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주변을 살피는 로젤린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거나 한마디라도 하면 곧바로 튀어나갈 태세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로젤린은 판단을 마쳤다. 로젤린이 등 뒤로 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이상 무.]
기사단원들이 시선을 서로 교환했다. 비치는 눈동자들에 의문이 담겨 있었다.
로젤린의 [이상 무] 신호는 다른 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폭 넓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표면적인 위협 뿐 아니라, 더 깊고 치명적인 ‘파편’과 인조적으로 만들어진 마인 부대의 기운 또한 감지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들도 데리고 오지 않았어? 하카브는 대체 무슨 배짱이지?
리카르디스가 자리에 앉자, 하카브가 따라서 맞은편에 앉았다.
“여정은 어떠셨는지.”
“녹음이 푸르고, 하늘은 쾌청하며, 과실이 영그는 아름다운 대지를 보니.”
하카브는 빙그레 웃었다.
황폐한 대륙 위에 자라나는 것은 썩어 가는 시체 냄새뿐이더라. 부모가 아이를 빵 두 덩이에 팔아넘기고, 죽은 마을에는 짐승조차 살지 못하는 지경이던데, 신의 영광을 그러쥐고 있다는, 일라베니아라는 나라가 죽을 날 받아 놓고 골골거리는 반송장이나 다름없으니.
“아, 내가 일라베니아에 왔구나 싶더군요.”
“좋게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내리깔며 찻잔을 들었다. 그는 발타 사절단이 여행길에 보아 온 광경이 어떨지 예상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대지는 무슨. 바싹 말라비틀어지고 썩어서 굴러다니는 광경을 보고 나올 만한 감상은 아니었다.
그저 인사를 하고자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카브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니 리카르디스는 이상하게 배알이 틀렸다. 눈이 어떻게 됐느냐며 시비 걸고 싶었지만 그런 유치한 짓은 10살 전에도 해 본 적 없으므로. 그저 생각만으로 그쳐야 했다.
리카르디스는 익숙한 홍차의 향기를 맡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리엔타의 알리가르테. 그가 피식 웃었다. 우연도 이 정도면 신의 장난이 아닐까.
로젤린이 잠잠한 것으로 보아 지금의 홍차에는 ‘파편’은 없을 것이지만 기분이 묘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카브가 의아하다는 듯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아, 손님을 앞에 두고 제가 실례했군요. 잠시 옛 생각에 빠졌던 터라.”
“무엇이 황자를 웃게 했는지 궁금하군요. 그 미소의 이유가 제가 아니라니 섭섭할 뿐입니다.”
아…… 짜증나, 이 남자. 리카르디스가 속마음을 숨기고 빙그레 웃었다.
“검은달의 ‘파편’을 마실 뻔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게 이 홍차와 똑같은 종류라.”
“이런, 그다지 재미있는 추억은 아니었군요.”
“그렇습니까?”
리카르디스도 하하 웃으며 잠시 날이 섰던 분위기를 전환했다.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몸을 더욱 곧게 폈다. 지루한 대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온갖 위험에서 살아남은 단원들이, 지금의 대화에서 날카롭고 사나운 기류를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사절단이 돌아가는 길에 습격당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
하카브가 제 가슴을 쓸었다. 남자의 손에서 여러 개의 반지가 반짝반짝 정신 사납게 빛났다.
“제 심장이 멈춘 듯했습니다.”
정말 그대로 멈춰 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리카르디스는 얼음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사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황자.”
“걱정해 주신 덕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게 어디 제 덕입니까. 들어 보니…….”
하카브의 눈이 리카르디스의 뒤편을 향했다. 리카르디스는 돌아보지 않았으나, 그 시선이 닿는 곳에 로젤린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카브가 로젤린과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대단한 활약이 있었다고. 실례가 안 된다면 듣고 싶습니다. 그녀에게 직접.”
리카르디스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그녀는 지금 제 호위중이라.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면 안 됩니다.”
“아니 잠시 이 앞으로 올 뿐인데…….”
“앞으로 그 훌륭한 얘기를 나누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헛소리 하지 말라며 싹둑 잘라 내는 태도에 하카브는 흠, 하며 턱을 쓸었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그렇다면 다음 기회에.”
대답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시선은 끈질기고, 욕망은 무거웠다.
리카르디스는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이유 모를 한기에 둘러싸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하카브가 일라베니아에 발은 들인 이유가 로젤린의 존재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델라브힘의 나라, 일라베니아.
크레안 티다니온의 나라, 발타.
당연한 것이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마인을 병적일 정도로 긁어모으는 그들에게, 로젤린이란? 억지로 정제하여 만든 마력의 결정으로 인위적인 마인을 만드는 발타라는 나라에게, 로젤린이란? 그 인간 병기들을 손 한 번에 부숴 버리는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하카브에게 로젤린이란……
만약 하카브의 목적이 온전히 로젤린에만 국한된다면? 곤란했다. 차라리 황제를 암살하러 왔다고 말을 듣는 쪽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이 갖은 위험 도사리는 곳에, 일국의 후계자가 로젤린만을 위해 발을 들였다? 제 안위의 안녕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정도라는 것이다.
생각이 겹쳐질수록 하카브의 욕망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하카브와 헤어진 후, 리카르디스는 곧바로 발타의 3왕녀 간제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하카브가 머무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별관에 머물러 있었다. 구릿빛 피부의 전사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다니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수가 어찌나 많은지 하카브보다 안전할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의 일행이 도착하는 것을 본 시녀가 방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문이 열렸다.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스치듯 짧은 만남 뒤에 나누었던 인사말이 떠올랐다. 또한 그녀의 마지막 말까지도.
‘그때까지 몸조심하시기를, 황자 전하.’
상투적인 인사말이었지만, 발타의 고위 인사에게 들은 말이라 그런지 의미심장했었다. ‘내 오라비 하카브가 네가 집에 가는 길에 공격할 건데 몸조심해야 될 거다’ 쯤으로 들렸다. 그러나 앞서 한 ‘곧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인해, ‘잘 살아남아서 다시 만나자’로 해석되기도 했다.
한 사람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또한 3왕녀 간제에 대한 정보가 굉장히 한정적이고 적은 편이라, 그녀의 생각을 유추해 내는 일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3왕녀 간제, 스물한 살. 연회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 궁전에서 주로 생활함. 끝. 끝이었다.
발타는 이미 입지를 공고히 다진 후계자가 있었다. 하카브 위 리비타. 그 어떤 세대보다 강하고, 냉혹한 후계자의 아래, 힉살라 아돈의 모든 자식들은 숨죽인 채 지내 왔다. 그것이 간제와 또 다른 자식들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였다. 알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하카브의 눈에 띄는 형제는 어김없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는 했다. 많은 왕자와 왕녀가 있었으나, 성년이 되기 전까지의 생존율이 극악한 관계로 몇 남지 않았다. 그 몇 안 되는 왕족 중 한 명이 3왕녀 간제였다. 수많은 하카브의 형제자매들과 다른 점을 꼽자면, 그녀가 하카브와 동복남매라는 것이었다.
문이 열렸다. 리카르디스는 시녀의 안내를 따라 방안에 발을 들였다.
“간제 왕녀.”
“어머, 리카르디스 전하. 오셨군요.”
간제는 그가 이 성에 당도했다는 얘기를 미리 전해 들었던 듯했다. 테이블 위에 이미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그녀가 일어서 리카르디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방 안의 향기와 그녀의 눈매가 간제를 한층 더 나른하게 보이게 했다.
쪽. 간제가 리카르디스의 볼에 입 맞추고서는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어떤 달빛이 이보다 더 빛날 수 있을는지.”
분명 아까 비슷한 말 들었던 것 같은데…… 리카르디스는 깊은 회의감에 휩싸였다. 별로 닮지 않은 남매라 생각했는데, 입을 여니 똑 닮았다. 리카르디스는 왕녀의 볼에 인사를 돌려줬다.
가벼운 입맞춤을 나누는 광경에 로젤린이 잠시 몸을 굳힌 채 입을 꾹 물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