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96화 (96/220)

96화.

“로젤린 에스터.”

“네.”

그는 로젤린에게 성큼 다가가 그녀의 목걸이를 풀었다. 목걸이 줄에 걸려 있던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반지가 페르탄의 손으로 굴러 들어갔다. 칼릭스가 벌떡 일어섰다. 가문에서 아주 연을 끊겠다는 것인가 싶어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 것이었으나, 페르탄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반지를 주머니에 넣거나 어디에 버리지 않았다.

로젤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붉은수레바퀴는…….”

“네.”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네.”

“나는 나의 일라베니아를 지킬 테니.”

페르탄이 그녀의 손을 잡고는 중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칼릭스는 제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어두운 밤의 고요가 깨질 때였다. 로젤린이 하얀밤 기사단에 무단으로 입단 신청을 하면서부터 붉은수레바퀴 성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로젤린과 페르탄은 며칠, 몇 주, 몇 달을 다퉜다.

제 아버지는 담담하다. 제 누이는 온화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견 차이가 만들어 내는 다툼은 결코 담담하지도, 온화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렸던 칼릭스는 어두운 밤을 소란하게 만드는 그들의 싸움을 두려워했다.

그때에 로젤린이 했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일라베니아를 지키세요!]

페르탄은 언제나 가르쳤다. 붉은수레바퀴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어렸던 칼릭스는 일라베니아를 지킨다는 말을 단어 그대로 해석했다. 그러니까 일라베니아 제국, 자신이 속한 나라를 지킨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 아버지와 로젤린의 입에서 나오는 ‘일라베니아’라는 단어는 항상 다양하게 변화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처럼. 그 단어가 가진 단순한 뜻을 넘어서 더욱 거대해졌다.

[저는 저의 일라베니아를 지키겠습니다.]

그때의 제 누이에게 묻지 못해, 지금은 모른다. 그녀의 일라베니아는 단순히 리카르디스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어슴푸레하게 띤 형상만을 더듬을 수 있을 뿐이었다. 대단한 것, 위대한 것, 가장 소중한 것.

“너는 너의 일라베니아를 지켜라.”

칼릭스는 어쩐지 제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것 같다 생각했다. 과거 로젤린이 관계를 끊어 내기 위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지금은 결코 이어질 수 없는 관계의 두 사람을 연결해 주는 것 같았다.

“네.”

로젤린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페르탄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그리고는 로젤린의 어깨를 툭툭 도닥이고 나서 곧바로 손을 들어 올리더니 푸딩을 주문했다. 칼릭스는 눈, 코, 입을 제각기 구겨서 제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표현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지한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하여간 분위기 못 맞추는 건 제국 제일이었다.

페르탄은 곧 예쁜 박스에 포장되어 나온 푸딩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로젤린에게도 한 박스 선물한 후였다.

로젤린은 그가 밖에 나설 때까지도 손에 끼워진 반지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투박하고, 예쁘지도 않은 그 반지를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한 손에는 푸딩 박스를 꼭 껴안은 채였다. 칼릭스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참 잘 어울리는 부녀지간이었다.

12

축제 ‘그림자 없는 밤’부터 시작된 줄지은 연례행사에 바쁜 것은 일라베니아뿐 아니었다. 대륙에 위치한 크고 작은 나라의 고위 인사들은 대륙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거대한 제국의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선물을 들고 문을 두드렸다.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하나둘 연회장에 모여들 쯤에는, 아름다운 음악과 눈으로도 즐길 수 있는 음식이 손님들을 반겼다.

매년 보는 고만고만한 얼굴들이라 특별하게 대화를 나눌 것이 없었던 터라,

“잘 지내셨습니까?”

“아, 저는 잘 지냈는데 경은 어떻게 지내셨는지.”

와 같은 지루한 안부 인사를 나누기 일쑤였는데…….

올해의 파티 분위기는 최근 몇 년간의 반복된 지루함이 무색하게 잔뜩 들떠 있는 모양새였다.

그것은 이번 건국제에 이례적인 일이 세 가지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마인 ‘로젤린’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에 관한 얘기는 일라베니아를 벗어나 대륙 구석구석, 커다란 왕국부터 작은 부족 단위의 무리에까지 전해졌다. 사람들이 혹시나 하는 설렘을 지니고 홀 입구 쪽을 계속 흘끗거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또 다른 하나는 발타와 비등할 정도로 강한 군사를 보유한 라고슈 왕국에서 아직 사절단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라고슈에서 내전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으나, 그 이후의 일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현재의 통치자, 바이페렘 플로에토가 이겼니 졌니, 죽었니 살았니. 정확한 정보가 없어 소문만 무성히 퍼져 나갔다. 일라베니아 측 사람들은 타국의 인사들이 라고슈의 내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면밀히 살폈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 사람들이 주목하는 또 다른 일은, 발타와 관련되어 있었다.

매년 많은 왕족과 귀족이 무거운 몸을 끌고 왔으나, 발타만은 항상 예외였다. 힉살라 아돈이 아파서. 날씨가 좋지 못해서. 발타에 큰 우환이 있어서. 온갖 변명을 대고 발을 들일 줄을 몰랐건만 이번에는 정말로 일라베니아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황성의 수많은 귀족들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온다는 얘기야 들었지만, 또 이런 저런 변명을 하면서 안 올 줄 알았지. 설마 왕위 계승자인 하카브가 직접 행차할 줄이야! 또한 3왕녀, 간제까지 국경을 건넜다는 소식에 연회장은 한층 더 들썩였다.

아무리 사절단으로 친교를 맺은 직후라고는 하나, 오랜 적대 관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사절단 일로 2황자 리카르디스가 큰일을 겪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이때. 발타는 언제나 하는 변명 ‘검은달과 발타 왕실은 어떠한 연관도 없다’라는 입장을 내세웠으나 그것이 그저 입 발린 소리임을 모르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카브는 스스로 위험한 길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전의 리카르디스야 누군가가 등 떠밀어 어쩔 수 없이 발타의 사절단으로 가야 했다지만, 하카브는 경우가 달랐다.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지위를 거머쥔 왕자에게 누가 위험을 강요할 수 있을까.

발타의 현 왕인 힉살라 아돈마저도 하카브에게 명령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자의로 일라베니아에 발을 들였다는 것인데, 그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다. 배포가 큰 건가? 그냥 미친 건가?

일라베니아 내에서도 급진적으로 전쟁을 주장하는 귀족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먹잇감이 제 발로 들어온 지금의 상황을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클로에에게 귀족들의 동향을 잘 주시해라 전달했다.

발타의 사절단이 도착한 이튿날, 리카르디스는 하카브가 머물고 있는 성을 방문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무슨 꿍꿍이속인 걸까…….’

그 어떤 누구도 하카브가 순수하게 일라베니아의 건국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전쟁의 준비, 실패했던 리카르디스 납치 계획, 갑자기 나타난 강한 마인의 존재…….

그가 어떤 목적으로 발을 들였는지 모르니, 무얼 방어하고 무얼 공격해야 할지 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전쟁에 유리한 포석을 깔고 가려함인 걸까? 그렇다면 황제의 암살?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긴 했다. 육체가 강화된 발타의 인간 병기들이라면 충분할 테니. 하지만 하카브도 바보가 아닌 이상, 발타의 사절단이 일라베니아에 온 그 순간부터 그 누구보다 경계 받는다는 사실을 알 텐데. 무슨 수로?

일라베니아가 그를 포위한 것이 아닌, 그가 적의 중심부에 들어와 심장을 노리는 형국처럼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몸을 곧게 피고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시야가 좁아진다. 직접 눈으로 보고, 읽어야 한다. 리카르디스는 열린 마차 창을 통해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하카브와 만나는 자리에 그녀를 대동하고 싶지 않았으나,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오직 그녀뿐이었기에.

아. 한숨만 나왔다. 리카르디스를 실은 마차가 부지런히 달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리카르디스 황자.”

발타 왕성 내에서 봤던 것보다 화려했다. 금을 사용한 섬세한 장신구가 구릿빛 피부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남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를 보이며 사람 좋게 웃었다.

하카브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리카르디스에게 걸어왔다. 리카르디스가 뒷걸음치는 것보다 하카브가 그에게 다가오는 게 빨랐다. 와락. 껴안기고 말았다.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하카브 왕자. 그간 평안하셨는지.”

“걱정해 주신 덕에, 그렇습니다. 황자는 여전히 아름다우시군요. 화려한 보석마저도 황자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리는 듯합니다.”

귓가에서 속삭이던 남자가 리카르디스의 볼에 입술을 꾹 찍었다. 리카르디스는 상한 음식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하카브 왕자도 정말…… 여전……하군요.”

리카르디스가 그의 가슴을 밀어내어 하카브의 품에서 벗어났다. 순순히 풀어 주기에 무슨 꿍꿍이인가 했더니, 하카브의 눈은 자신의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누군가를 찾았다.

하얀 옷을 입은 사내들 사이에서 검은색 머리카락은 유독 눈에 띄었다. 하카브의 검은 눈동자가 로젤린을 보고 멈췄다.

“로젤린 경.”

봄볕의 따사로운 내음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한쪽 치켜 올라갔다. 이 달달한 목소리는 대체?

“발타의 첫 번째 아들을 뵙습니다.”

로젤린은 그에게 묵례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하카브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나의 검은 달! 나의 크레안 티다니온! 외치지 못한 말들이 욕망이 되어 속에서 드글드글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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