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95화 (95/220)

95화.

고급스러운 식당은 유명세를 자랑이라도 하듯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내부는 음식점이라면 응당 들려야 할, 사람들의 담소 소리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 바쁜 웨이터의 발걸음 소리. 그 어떤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전의 기도 시간이 이 정도로 고요할까.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석상처럼 굳어 꿈쩍도 하지 않고 눈만 분주히 움직였다. 식당 안의 모든 시선이 방금 전 입구를 통과한 세 사람에게 모였다.

검은 머리, 녹색 눈. 거구에 흉흉한 인상! 누군지 모를 수 없었다. 황실의 충실한 번견,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인물들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붉은수레바퀴의, 그 로젤린까지!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라베니아에서 보기 힘든 품종의 고양이가 그들을 뒤따라 총총총 들어왔다. 말할 것도 없이 음식점은 동물 출입 금지였으나, 종업원은 미처 만류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모두들 그러고 있듯이.

보통 권세가 대단한 귀족이라면 식사를 조용히 즐기고 싶다거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한 층을 통째로 예약할 테지만,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그런 섬세함 따위는 없는 남자였다. 밥은 먹는 것. 식당은 밥을 먹는 장소. 그러니 식당에서 밥만 먹으면 되었지 뭐가 달리 필요하겠느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자세히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아니, 왜 다른 층으로 안 가는 거지? 구석 진 곳은 돈도 없고 예법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앉는 자리인데, 왜 저들이 저기에 있지? 혹시 경고인가? 우리가 지금부터 여기서 밥 먹을 거니까 다 꺼지라는 얘기인가? 그런데 식당은 동물 출입 금지 아니야?

사람들의 시선에서 의문을 읽어 낸 칼릭스만 괴로워했다. 그냥…… 보이는 남은 자리가 여기라 앉은 겁니다…… 고양이는…… 미안합니다…… 제 말을 듣는 분이 아니셔서…….

칼릭스는 앞에 펼쳐진 광경을 천천히 훑었다. 앞에는 페르탄, 오른쪽에는 로젤린이, 길쭉한 테이블 위에는 고양이 미미가.

‘이델라브힘이시여…….’

칼릭스에게만 가혹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배경은, 이 시간으로부터 이틀 전. 로젤린이 아버지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 거라며 칼릭스에게 자랑한 일로부터 시작됐다.

함께 식사?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 약속 뒤에 모종의 음모 따위가 도사리겠거니 생각해, 칼릭스는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음모나 비열함 같은 단어와 거리가 한없이 멀다는 것쯤은 자식으로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예상 외의 인물 ‘로젤린’이 있으며, ‘죽은 딸의 모습을 한 존재와 식사를 나누는 그 딸의 아버지’라는 예상 밖의 상황으로부터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질질 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외의 문제가 또 있었을 줄이야.

아버지의 행동이 누이에게 미칠 여파를 생각한 건 좋았으나, 두 사람이 외부로 끼칠 영향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칼릭스는 자리로 이동하던 중,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흠칫 놀라며 나이프를 떨어트렸다.

“…….”

아버지와 누이만 문제라고 생각했지. 설마 자신의 존재까지 더해져 위압감을 배가시킬 줄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식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내부의 공기가 훅 바뀌었다. 악단이 연주를 멈추고, 음식을 먹던 입이 멈추고, 하다못해 공기도 멈춘 것 같았다. 앞에 둔 음식이 차게 식어 가도 칼질 한번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것은 오직 칼릭스뿐이었다.

페르탄은 로젤린이 메뉴를 열심히 고민하는 십 분 가량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로젤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탄이 그제야 첫마디를 꺼냈다.

“결정 했느냐.”

“네.”

“결정 했느냐, 칼릭스.”

“……네.”

칼릭스는 지금의 상황에서 뭘 먹든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조건 체할 거라고.

저번에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비스타로 내려간 일은 차치하고, 그저 이 상황 자체가 너무 거북했다. 아버지와 누님의 조합? 거기에 더해 마카롱님까지? 칼릭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환장할 것 같았다.

페르탄이 손을 들자 종업원이 바닥에 구를 듯 다급하게 다가왔다. 나이와 복식을 보건대 평범한 종업원은 아니었다. 이 식당의 주인이거나 총 지배인이지 않을까.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있는 모습이 애잔했다.

로젤린이 메뉴판을 펼치고 가장 상단의 메뉴를 가리켰다.

“양 갈비 스테이크와 단호박 수프 세트를 하시겠습니까?”

“여기부터.”

첫 마디가 심상치 않았다. 나이 든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여, 여기부터?

로젤린이 가장 하단의 메뉴를 손으로 짚었다.

“여기까지 전부.”

종업원이 딸꾹질을 했다. 로젤린은 만족한 듯 눈을 깜빡이며 씩 웃었다.

로젤린이 메뉴판을 덮으려 하자 마카롱이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그녀의 손등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양 갈비 스테이크를 툭툭 가리켰다.

“아, 양 갈비 스테이크 하나 더.”

주문을 받는 남자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칼릭스가 급하게 마카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최대한 무해해 보이게.

“우리 미미가…… 굉장히…… 똑똑해서….”

굉장히 똑똑한 미미가 칼릭스의 손을 할퀴었다. 상처가 쓰라렸다.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한 말인 줄 아나…….

곧 음식이 나왔다. 로젤린의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의 주문 덕분에 테이블 두 개를 붙여야 했는데, 놀랍게도 그 두 개의 테이블이 빈틈없이 접시로 가득 채워졌다. 다른 사람들의 음식은 다 식어 먹음직한 빛을 다 잃어버린 반면, 두 개의 테이블 위를 채운 음식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입맛이 없는 칼릭스 마저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페르탄이 먼저 스푼을 들었다.

“들자.”

“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칼릭스가 마른세수를 했다. 숨 막혀 뛰쳐나가고 싶었다. 세 사람은 어떤 대화도 없이 음식에만 집중했다. 조용하던 음식점에 이따금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 울렸다.

칼릭스가 음식을 깨작이자 로젤린이 스테이크를 주사위 모양으로 잘라 칼릭스의 입에 들이밀었다.

“왜 안 먹어. 아- 해.”

“……누님, 그러니까 저는…….”

“아.”

칼릭스가 무기력하게 아- 하고 입을 벌리자, 로젤린이 그의 입에 큰 스테이크 조각을 집어넣었다.

“이거도!”

그러고는 구운 아스파라거스도 칼릭스의 입에 잽싸게 넣었다. 그는 입을 우물거리며 그녀를 흘겨보았다. 로젤린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동생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나 채소 먹기 싫어서 고기랑 같이 넣어 준 거로군…….’

갈수록 똑똑해진다고 해야 할지, 영악해진다고 해야 할지.

사람들은 로젤린이 움직일 때마다 조용히 술렁였다. 로젤린 경이…… 음식을 많이 시켰어! 로젤린 경이…… 스테이크를 동생한테 먹였어! 로젤린의 행동 하나하나에 크게 반응을 하는데, 조만간 그녀가 숨을 쉬는 것도 신기해할 듯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것보다는 스테이크를 소스에 찍어 먹는 고양이가 더 신기하지 않나 싶었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페르탄이 불쑥 말을 꺼내 왔다. 칼릭스는 고기 조각을 미처 다 씹지 못한 채 삼켰다. 내 딸도 아닌 무언가와 너는 사이가 퍽 좋아 보이는구나 하는 왠지 모를 질책처럼 느껴졌으나, 로젤린은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네.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당당한 그녀의 대답에 페르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로젤린과 마카롱, 페르탄은 대식가답게 모든 음식을 해치웠다. 칼릭스도 꾸역꾸역 한 접시는 비웠다. 로젤린이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먹으며 살살 녹아 가고 있을 때, 페르탄이 다시 말을 꺼냈다.

“잘 먹었느냐.”

“네. 맛있었습니다.”

“그러면 됐다.”

뭐가 됐는데요! 칼릭스는 미처 묻지 못했다. 칼릭스는 제 아버지가 어떤 목적 아래 그녀를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을 묻거나,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거나, 앞으로 어떻게 하라는 둥의 훈계라던가. 혹은 그녀를 제거하려 하던가.

그런데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결정 했느냐’라든지 ‘들자.’,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 잘 먹었으면 됐다.’와 같은 말만 하고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지 않은가. 마치 이게 목적이었다는 듯.

“나는 내일 부로 다시 변경에 내려간다.”

“건국제가 곧 다가오는데, 지나고 가지 않으십니까?”

“느낌이 좋지 않다.”

발타가 한창 공작중이니, 요즘의 국경은 지난 수년간 보다 훨씬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제 아버지가 남들보다 감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불안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황제가 건국제까지 만이라도 황성에 남아 있으라 분명 얘기 했을 텐데, 아주 거침이 없었다. 누가 붉은수레바퀴 아니랄까 봐.

“……몸조심하세요.”

칼릭스는 입술을 긁적이며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로젤린도 칼릭스를 따라 “몸조심하세요.” 하고 얘기했다. 페르탄은 제 아들과 로젤린을 한 번씩 눈에 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릭스.”

“예.”

“네 어머니에게는 내가 말해 두었다.”

“……네.”

로젤린의 일을 말했다는 얘기이리라. 대륙 전역에 제 딸이 마인이라는 얘기가 퍼졌는데 에델바이스가 모를 리 없었다. 로젤린이 죽었고 제 딸의 탈을 쓴 무언가가 제 딸인 양 활동하고 있다는 상세한 얘기를 과연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칼릭스는 제 어머니가 혼절하거나 기절한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이 몰려왔다.

“갈라·제르타예의 후예다. 네 어머니는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강한 사람이니, 쓸데없는 고민 하지 말고 안부 편지나 보내 거라.”

“……아버지도 어머니 얼굴이나 보고 내려가시죠. 얼굴은 안 까먹으셨습니까?”

칼릭스가 울컥해서 반격했음에도 페르탄은 전혀 타격받지 않은 듯했다. 코웃음을 치기까지 했다. 그는 겉옷을 걸치고는 마지막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로젤린과 페르탄은 서로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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