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94화 (94/220)

94화.

누군가에게는 로젤린이 태어날 때부터 마인이라 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당연히 로젤린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며 준수한 실력을 가진 평범한 기사였을 뿐이었다. 검술 명문가인 바다협곡의 자식을 이길 만한 실력도 없었을뿐더러, 2황자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들을 족족 잡아낼 만큼 뛰어나지도 못했다. 그 아이는 검은달의 병기들을 상대로 살아 돌아올 만큼, 그들을 모두 가리가리 찢어 버릴 만큼 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페르탄은 제 딸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그것’을 먼저 보기 전에, 그녀가 싸웠던 전투 현장을 먼저 접했다. 조각나 흩어진 살점이 눅눅한 습기 아래 썩어 가는 처참한 모습에, 페르탄은 비로소 그녀가 로젤린이 아님을 완벽하게 자각했다.

죽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페르탄의 생각보다도 오래 살아남았다. 준수한 실력이라고는 해도,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2황자 리카르디스의 곁에선 준수한 실력 정도로는 부족했다. 로젤린의 죽음은 예견된 일이었다. 언제고 찾아올 수 있는 운명이었기에 전혀 놀랍지 않았다.

“어째서 제가 원래의 로젤린이 아니라는 사실을 숨겨 주시는 겁니까?”

페르탄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이렇게 훤히 뚫려 있는 공간에서 “제가 로젤린이 아니라는 사실을…….” 같은 말을 대놓고 하면 어쩌자는 건가.

“너를 위한 게 아니다. 자칫 했다가는 붉은수레바퀴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었기에 묻기로 결정한 것이다.”

“슬프지 않으십니까?”

페르탄이 걸음을 멈췄다. 로젤린도 그를 따라서 멈췄다.

“로젤린의 선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뻔했다. 붉은수레바퀴 성의 사람들. 영지민들. 제 의무조차 저버리고 저 멀리 밤하늘에 떠 있는 달빛을 지키겠다며 떠난 아이다.”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덩치가 커 위협적인 반면, 말투는 잔잔했다.

“그때부터 내 안에서 로젤린은 이미 죽은 자식이었으니.”

페르탄은 이 말을 하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다. 죽은 로젤린에게 이런 모진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온하게, 정말 남의 일이라는 듯이. 그제야 페르탄은 그녀를 좀 더 편안하게 바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

이야기의 맥락을 전혀 읽지 못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확하게 폐부를 찔러 왔다. 페르탄은 거친 수염을 몇 번 쓸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끊어내 놓고 슬퍼하기에는 좀…….”

염치가 없지 않겠나. 로젤린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단순히 고민을 하는 표정이라는 사실을 페르탄은 알 수 있었다. 과거 로젤린도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 지금의 그녀와 똑같았다.

한참 눈동자를 또르륵또르륵 굴려 가던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슬프지 않다는 말씀이신 거죠. 정확하게?”

“…….”

전혀 이해를 못했군. 페르탄은 얼굴만 제 딸과 같은 이 미지의 생물이 조금……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단순하게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명료하게, 정확한 자신의 감정을.

페르탄이 이를 한번 악문 후에 말했다.

“슬프다는 얘기다.”

입 밖으로 꺼내니 더욱 현실감 있게 들리는 말이었다.

슬펐다. 고통이 뼛속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비록 자신이 로젤린의 손을 놓은 결과라 하더라도, 로젤린이 자신의 손을 놓은 결과라 하더라도.

그의 얼굴에 회한이 담기건 말건, 로젤린은 “아, 역시 그렇습니까?” 같은 말을 하면서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의 속을 후벼 파 놓고는 저렇게 후련해하다니. 기가 찼다.

페르탄은 그녀를 한참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떠냐.”

“아프지 않습니다.”

“리카르디스 전하 곁에서는 더욱 다칠 일이 많겠지.”

“괜찮습니다.”

“네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너 또한 죽을 것이다.”

죽은 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생명체를 보는 것치고는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로젤린은 그의 무뚝뚝한 목소리 속에 담긴 염려를 읽었다.

“죽지 않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한 상냥한 말이 아니었다. 표정과 말투에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아집과 오기로 똘똘 뭉쳐 있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과거와는 다르되, 과거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그녀를 본 순간 페르탄은 홀린 듯 물었다.

“무엇 때문에 리카르디스 전하를 지키고자 하는 거냐.”

페르탄은 생각을 더듬어 머릿속에 그려 내었다. 단발머리의 어렸던 리카르디스부터, 더 과거의 꾀죄죄했던 몰골의 거지 소년의 모습까지.

대체 로젤린과 그 모습을 한 무언가는 리카르디스에게서 뭘 보았기에 지키고자 하는 것일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행동으로 일어날 결과만이 근심이었다. 그래서 하지 말라 했다. 그 길을 걷지 말라, 해서는 안 된다 질책했다.

황실을 위한 희생양, 그리고 그 희생양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딸. 그것만 생각하면 내리는 비를 피하지 않고 수백 시간 맞은 듯 손끝이 서늘해졌다. 원망은 갈 곳 없이 떠돌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온몸이 난도질 되고 나서야 궁금해지게 된 것이다.

제 딸은, 로젤린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에 와서는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일지언정.

페르탄은 손등 위로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은 팔짱을 끼고 제 발치를 응시하며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음, 음…… 흠. 끙……. 새끼 강아지가 간식 보채는 듯 이상한 소리까지 내 가며. 아주 열성적이기 그지없었다.

‘로젤린이…….’

로젤린은 입을 벙긋 열었다 다시 다물었다. 그녀는 ‘로젤린이 부탁했습니다’라고 말하려 했지만 결국 내뱉지 못했다. 관성적으로 새겨 두었을 뿐, 그것이 정답이 아니게 된 지는 오래 되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은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 왔다. 깊은 숲속.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숨을 죽이고, 때로는 안개 속을 부유하는 듯한 감각에 잠겨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가끔 깨어나 죽은 무언가로부터 마력을 섭취하며 존재해 왔다. 하지만 말 그대로 존재했을 뿐, ‘그것’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육체적인 죽음은 닿지 못하는 영역이었기에.

그런 때에 ‘그것’은 ‘로젤린’과 만났다. 그리고 로젤린이 되었다.

스치는 바람 하나, 내려 쬐는 햇살 한 점에도 로젤린은 전과 다른 감정을 느꼈다. 처음으로 만나는 세계의 모습은 놀랍고, 아름다웠다. 가슴 안쪽 차곡차곡 쌓아 온 기억들은 갈수록 찬란하게 빛났다. 생생한 감정들에 심장이 박동했다. 로젤린은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인간들 속에서 지내 온 짧은 시간은 ‘그것’의 모든 시간의 합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부디 지켜 주세요.

내가 지키겠다.

과거 ‘로젤린’과의 약속이 ‘제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라는 자신의 맹세로 변한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그게 언제부터, 또 왜 그렇게 변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냥 제 마음이 그를 지키고 싶은 것인데, 왜 지키고 싶으냐고 물어보니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페르탄에게 대뜸 물었다.

“그럼 아버지는 왜 붉은수레바퀴의 영지와 일라베니아를 지키려고 하십니까?”

페르탄은 허를 찔린 듯 잠시 수염을 씰룩였다. 남자의 인상이 배는 사나워졌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가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민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페르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이라 그렇다.”

“그렇군요.”

로젤린은 빙그레 웃었다.

“저에게도 전하가 소중하기 때문에, 지키겠습니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확신에 차 있었다. 페르탄은 그녀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힘을 느꼈다. 굳건한 의지와 신념. 가슴 안쪽에서 타오르며 사람을 나아가게 만드는 그 힘.

고작 인간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한 존재라면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체 이 존재는 무엇인가?

바닥을 휘감던 바람이 넓게 천장으로 퍼져 울렸다. 로젤린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바람의 결을 그리듯 흔들렸다.

“너는 대체 무엇인가?”

페르탄의 질문에 이리저리 이동하던 로젤린의 시선이 그의 흉갑에서 멈췄다. 로젤린은 은색 갑주에 비치는 자신을 들여다 보았다.

[너는 대체! 대체, 누구야!]

문득, 달빛이 내리는 창가에서 칼릭스의 칼날 위로 비춰 보았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림자.]

햇살을 받는 여자의 생명력이 약동했다.

[로젤린의 그림자다.]

“로젤린입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 * *

[조만간…… 식사나 한번 같이 하자.]

페르탄이 헤어지며 했던 말은 낯설지 않았다. 황성에 들어온 이후 로젤린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어 온 인사말이었다. 헤어질 때마다 뭘 그렇게 식사를 하자고 하는지. 로젤린은 신나서 “예!” 하고 힘차게 대답을 했더랬다.

그러나 ‘조만간 식사…….’로 시작하는 상투적인 문구가 ‘오늘 만나서 반가웠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쯤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로젤린은, 그 말을 꺼낸 사람을 일일이 찾아가 언제 식사를 할 거냐며 닦달을 해 댔다.

먹을 것에 대한 그녀의 집념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크나큰 실수였다. 결국 그들은 의례적인 인사말 한번 잘못했다가 불편한 인물과 불편한 식사를 해야만 하는 불편한 상황을 맞이해야 했다.

이후 모든 일을 알게 된 레이몬드가 로젤린에게 그런 인사는 그냥 하는 말이라 가르쳤고, 로젤린은 왜 사람들은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그냥 하냐며 씩씩 성을 냈었다. 어쨌거나 로젤린도 ‘조만간 밥…….’ 운운은 인사나 다름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는데…….

[붉은수레바퀴라는 이름의 꽃이 있다면 꽃말은 ‘쇠고집’,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일 것이다.]

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을 오르고 내리는 가문답게, 페르탄은 그 말이 진심인 모양이었다. 약속이 이뤄진 것은 바로 삼일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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