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갑자기 많은 정보가 쏟아져 머리가 아파 왔다. 리카르디스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인상을 썼다. 몇 세대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강한 마인의 출현. 이걸 단순하게 ‘와, 대단하다.’ 라던가 ‘와, 멋있다.’와 같은 감상으로 끝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별관을 나왔더니 저 멀리 슈텐이 홀로 서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에게 다가가 로젤린의 행방을 물었다.
“디에즈 전하와 잠시 신전 내에 있는 정원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대답에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상태 안 좋은 동료를 왜 애먼 사람에게 맡기냐며 슈텐은 몹시 혼났다. 리카르디스는 씩씩 성내다가, 앞장서 안내하는 슈텐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였다.
정돈 되지 않은 허름한 정원 속. 큰 나무 그늘 아래 두 남녀가 사이좋게 앉아 있었다. 바닥에 펼친 손수건 위에는 붉고 노란 열매가 올라가 있어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좀, 가깝지 않아?’
많이 가까운 거 같은데? 거의 딱 붙어 있지 않은가. 어깨도 닿은 것 같은데?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멈춰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무어라 말하자 디에즈가 열매 하나를 집어 로젤린의 입에 쏙 넣어 줬다. 그녀의 볼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리카르디스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겼다.
“디에즈 레예 일라베니아…… 저 천사 같은 얼굴로 이 무슨 음탕한……!”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르원이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전하. 전혀 음탕하지…… 않았습니다만…….”
“저 손길에 음심이 가득한 것이 보이지 않나 르원.”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남자의 질투. 흉했다.
“르원.”
“예, 전하.”
“저 자리를 어떻게 하면 가장 엉망으로 파할 수 있을 것 같나? 가슴에 생긴 상처 때문에 열매는 물론이고, 동그란 것까지 두 번 다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저는 전하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나는 나 혼자 컸으니까.”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실 수 있느냐. 제가 전하의 기저귀까지 갈아 드린 게 기억나지 않으시냐. 일곱 살 때 처음 만났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냐. 하면서 두 사람이 아옹다옹 하는 사이에 그늘 아래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리카르디스의 바람대로 깨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열매를 황홀하게 바라보던 로젤린이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낮춘 자세, 까딱이며 풀고 있는 손가락, 크게 뜬 채 한 번 깜박이지도 않는 눈. 누구 하나 잡을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였다.
로젤린은 척척 걸어오다가 도자기를 들고 있는 여인의 석상을 부쉈다.
쾅!
흙먼지가 우수수 일어났다. 르원이 짤막하게 감상을 말했다.
“우리 편이라 정말 다행입니다.”
로젤린은 조각상 여인에게서 도자기를 강탈하고는 더욱 흉흉한 기세로 다가왔다.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와 하얀밤 기사단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하기 전에 멈춰 섰다. 그녀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며 도자기를 날릴 준비를 했다. 하얀밤 기사단이 양 옆으로 쫙 갈라졌다.
로젤린이 채찍으로 후려치듯 도자기를 날렸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선명했다. 도자기의 종착지는, 지나가던 어떤 신관의 머리였다.
퍽, 파삭.
정확하게 머리를 강타한 도자기는 산산조각 났고, 신관은 스르륵 쓰러졌다. 성난 호랑이 같던 로젤린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여러 시선에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암살자입니다.”
“……그러길 바랐다.”
지나가던 선량한 신관의 머리를 깨 버리길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리카르디스는 자리를 수습하라 기사단원들에게 명령했다. 곧 그는 디에즈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돌아보았다. 손수건 위의 열매가 잔뜩 으깨져 있었다. 로젤린이 앞만 보고 오느라 밟아 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저렇게까지 처참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남자의 순정을 짓밟다 못해 으깨다니!
‘로젤린, 정말…… 너무…….’
마음에 든다.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디에즈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눈동자가 반짝거리기까지 했다. 성정이 순하고 유약한 아이라, 이런 폭력적인 장면을 즐길 리 없을 텐데?
디에즈의 황금색 눈동자가 로젤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 * *
똑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오게.”
로젤린은 헤사의 도움을 받아 몇 장의 보고서를 작성한 후, 기사단장실에 들렀다. 검은달과의 전투 보고서였다. 전투 내용이야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지만 형식상으로 필요한 절차였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어서 오게, 로젤린 경.”
방 안에 발을 들인 로젤린의 시선이 스타스를 벗어나, 그의 앞에 있는 탁자 쪽을 향했다. 정확히는 탁자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에게로. 연한 갈색에 노란빛이 섞인 털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발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품종이었다. 고양이는 골골 소리를 내며 기사단장의 부드러운 손길을 만끽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로젤린을 쳐다보더니 노란 눈을 초록색으로 바꾸는 묘기를 선보였다. 마력의 기운이 순식간에 짐승에게 감돌았다.
‘……마카롱이잖아.’
로젤린은 오늘 내내 마카롱을 보지 못해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기사단장의 집무실에 있을 줄이야.
로젤린의 눈길이 탁자 위의 고양이에게 닿는 걸 보고 스타스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사절단 이후로 종종 보이더군. 마차의 짐 사이에 숨어 온 게 아닐까 싶은데…… 먹이를 한번 줬더니 가끔 찾아오지 뭔가. 참 똑똑한 고양이야.”
스타스는 그 이후로도 “우리 미미가 다른 사람들이 주는 건 안 먹는데…….”부터 시작해서 “파르딕트 경과 슈텐 경은 만지려다가 물렸는데…….”까지 미미가 자신을 진짜 너무 좋아한다는 얘기를 은근슬쩍 자랑했다.
미미는 배부른 고양이가 햇살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는 것 같은, 만족감 넘치는 표정으로 스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가 인간을 귀여워하는 이상한 광경이었으나, 둘 다 즐거워 보이니 뭐 잘된 것 같았다.
로젤린은 보고서를 포함해 각종 대회에 출전하는 서류도 함께 제출했다. 스타스는 로젤린이 한몫의 상급 기사 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고 감명 깊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러 번 보고서를 훑었다.
“대회 출전은 기사들은 힘들지만 주군에게는 힘이 되는 일이지. 각 세력의 크기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 말이네. 수고해 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이니 최선은 다하지 말게.”
로젤린은 미미와 스타스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이번 달부터 다음 달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라며 칼릭스가 일러 줬다. 로젤린이 최초로 겪은 축제, ‘그림자 없는 밤’을 시작으로 다음 달까지 사냥 대회, 무투 대회, 건국일, 무도회 등등. 온갖 행사가 잔뜩 포진해 있었다. 심지어는 그 사이에 지인의 경사도 끼어 있었으니, 다름이 아닌 레이몬드의 결혼식이었다.
많은 일라베니아 제국민들은 이 시기에 결혼을 하려 했다. 건국의 달에 맺어진 부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와 그의 약혼녀인 황금정원의 클로에도 이때를 맞춰 결혼하기로 했다.
리카르디스의 안위가 워낙 아슬아슬하다 보니, 부하인 레이몬드도 몇 번씩이나 결혼을 미뤄야 했다. 레이몬드는 발타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되면 결혼하자는 청혼 비슷한 유언을 남기고 갔었고, 다행히 살아 돌아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레이몬드는 손수 쓴 청첩장을 로젤린에게 건넸다. 신랑 측 들러리로 서게 된 로젤린은 축사를 맡을 뻔했지만, 하얀밤 기사단 모두의 만류로 불발되었다.
로젤린은 머릿속으로 오늘의 할 일 목록을 하나하나 그었다. 보고서 작성했고, 서류 단장님한테 드렸고…….
저벅저벅.
복도를 걷는 일정한 소리에 하나가 더 덧대어졌다. 또 다른 발걸음 소리는 로젤린을 끈질기게 따라왔다. 느긋하고 차분한 걸음걸이였다. 우연하게 길이 겹친 듯했기에 로젤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서 걷는 사람의 보폭이 커, 두 사람의 간격이 점차 좁혀졌다. 몇 걸음도 지나지 않아 로젤린은 그 사람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로젤린에게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파르딕트나 슈텐과 비견될 만한 거구의 남자였다. 그녀가 흘끗 위를 올려다보자 역광에 침식되어 더욱 어두워진 검은 머리가 보였다.
검은 머리, 왼쪽 눈의 흉터, 거구. 날카로운 인상.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 에스터. 로젤린의 아버지였다.
“아버지.”
페르탄은 그녀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화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태도였으나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명백히 로젤린에게 맞추고 있었기에, 그녀도 페르탄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낯선 이에게 듣는 소리치고는 퍽 친근한 호칭이로군. 나를 어떻게 알아 봤는가?”
“칼릭스와 레이몬드가.”
“그렇군.”
“아버지는 살벌한 인상이라고 말해 준 적 있습니다.”
“……그렇군.”
로젤린은 살벌한 인상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페르탄을 본 순간 바로 깨우칠 수 있었다. 페르탄도 딱히 그 말에 반박하지 않는 걸 보면 제 인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한 번 로젤린을 흘끗 내려다봤다. 구불거리는 결 좋은 검은 머리, 푸르른 녹음이 드리운 눈동자, 건강하게 혈색이 도는 하얀 피부.
페르탄은 분명 알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히 제 딸과 다른 점이 하나라도 있을 거라고. 하지만 눈앞의 무언가는 ‘로젤린’ 그 자체였다. 심지어는 눈빛, 말투, 표정까지 똑 닮아 있었으며, 그것이 흉내를 낸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표출된다는 점에서, 페르탄은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혼동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