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92화 (92/220)

92화.

사건 당시 리카르디스도 대신전의 신관들이 라헤안시를 추궁하는 것을 모두 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신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라헤안시는 눈물 콧물 흘리며 바닥을 뒹굴고 어린애처럼 서럽게 울고 있었다.

[아, 모른다니까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모른다니까아! 일라베니아를 음해하는 미친 여자에게서 뭘 배웠으려고! 엉엉 목 놓아 울어 당연히 윈디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스승이 알려 주고 간 것이 있다고?

“너, 윈디트의 가르침은 받지 못했다고 했잖아.”

“내가 스승님 밑에 몇 년을 있었는데 설마. 그 말을 믿었다니 형도 생각보다 순진한걸…….”

이 자식이? 리카르디스는 그를 흘겨보았다. 라헤안시는 의자에서 뒹굴 거리면서 낄낄댔다.

“형, 윈디트는 딱히 종교를 창설하고 교리를 설파하고 다닌 적은 없어. 사이비 교주라니 말도 안 돼.”

“사형당해서 억울했겠군.”

“그저 일라베니아와 황제 폐하 욕을 심하게 하고 다녔을 뿐이야.”

“……사형당해도 억울하지는 않았겠는데?”

라헤안시는 “확실히…… 내가 들어도 그 말은 좀 심하긴 하더라…….” 하면서 과거를 반추하는 눈을 했다. 대체 무슨 욕을 하고 다닌 건가, 전 대신관 윈디트…….

“다른 곳도 아닌 발타에서 ‘축복의 밤’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면, 단순히 성력만으로 하얀 밤과 검은 달을 불러 낼 수 있는 게 아니란 건…….”

“알고 있다. 필요한 것은 두 개의 힘. 두 사람. 성력과 마력을 지닌 자. 그리고 문헌에 적힌 걸로 보아, 일시도 중요한 것 같더군. 굳이 따지자면…… 보름달이 뜰 때?”

라헤안시가 무성의하게 박수를 짝짝짝 쳤다. 대충 맞다는 얘기이리라. 발타의 신전에서 눈치챘던 것이지만, 황제 다음으로 ‘축복의 밤’에 가까운 대신관이 확인해 주니 마음이 놓였다.

“그럼에도 형. 현재의 일라베니아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일라베니아가 의도적으로 마인과 마력의 필요성을 지워 버린 거야. 윈디트는 그걸 알고 몰래 퍼트리고 다니다가 딱 걸렸어.”

리카르디스는 신전이라면 질색인 터라, 대신관들과 친분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 윈디트도 그저 오며 가며 스치듯 봤을 뿐이었다. 그렇게 배짱 좋은 사람이었을 줄은 또 몰랐다.

“확실히 황제 입장에서는 곤란할 만했겠어.”

“뭐,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그렇다면 왜 일라베니아에 하얀 밤이 찾아오지 않느냐…… 하면.”

“현 황제의 역량 부족과, 숨어 버린 마인들?”

“그것도 있지만, 형. 일정 수준의 성력을 가진 사람이 ‘축복의 밤’의 조건이라면, 마력도 마찬가지로 일정 수준이 필요하잖아?”

라헤안시는 새삼스러운 말을 되짚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럼에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설원의 월계수의 핏줄들은 대대로 성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 역할에 부합했던 거지. 그래서 대대로 하얀 밤을 불러 왔고.”

“그렇겠지.”

“그러면 형. 마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핏줄은? 지금 어디 있을까?”

리카르디스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띵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맞는 말이었다. 설원의 월계수. 그 이름을 달고 있는 자들은 성력의 양과 상관없이 대다수의 인원이 성력을 타고 났다. 그것이 하얀 밤을, 축복의 밤을 불러오는 자격을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라 하여 모든 정당성과 권리를 손안에 쥐고 있었다.

그렇다면 라헤안시의 말대로, 마력을 타고나는 핏줄이 있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어떤 기록에서도, 어떤 역사책에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인의 존재와 마력의 역할을 필사적으로 지우는 일라베니아 황실의 특성상 그 또한 가려진 부분일지는 몰랐으나,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없었을 수도?”

그래서 이런 얼간이 같은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라헤안시는 반쯤 감긴 눈을 더욱 느슨하게 했다. 이제는 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는 시선을 어디에도 맞추지 않고 멀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눈이었다.

“있었어.”

존재를 확정하는 그의 짧은 말은, 현재가 아닌 과거를 가리키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라헤안시가 그저 제 감만으로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윈디트에게서든, 대신관만 열람할 수 있는 서고를 통해서든…… 이것은 진실일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들은 분명 존재했다. 강한 마력을 타고나는 혈통.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 어디에? 일라베니아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것인가? 숨어 버린 것인가? 하지만 몇백 년이 지나는 세월 동안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고 숨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설원의 월계수의 혈통이 아니더라도 성력을 가진 자는 대륙 여기저기에서 태어났다. 때로는 황족을 넘볼 정도의 성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보통의 경우에는 신전에서 그들을 데리고 와 신관으로 길렀다. 강압적인 절차를 밟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으나, 큰 보상이 따랐기에 부모들은 순순히 아이를 넘기곤 했다.

이와 같이 몇백 년 동안 성력이 강한 자들이 대륙 곳곳에서 태어났다면 마찬가지로 상당수준의 마력을 가진 자도 태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혈통이 아니더라도 마인은 있다. 그럼에도 일라베니아 황실이 몇백 년 동안 하얀 밤을 띄우지 못했다는 얘기는…… 그 조건에 부합하는 마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 혈통이 세상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강한 마인이 씨가 마른 것이다. 헤아릴 수도 없는 먼 과거에, 무슨 일이 분명 일어났다. 그 모종의 일로 인해 대륙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그 시발점에는 아마 일라베니아 황실이 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실소했다. 이거야 원. 멍청한 것도 정도껏 해야지. 독식하려다가 상을 뒤엎은 꼴이었다. 설원의 월계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게 창피해질 지경이었다. 피가 이어져 있지 않은게 다행이라 여기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는데…….”

라헤안시가 말을 이었다. 의자에서 뒹굴거리던 것은 언제 멈췄는지 똑바로 앉아서 과자 기름이 묻은 성전을 뒤적이고 있었다.

“지금 대륙에 명성이 자자한 강한 마인이 한 명 있다지.”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날카로운 눈빛을 걸었다.

“비밀에 접근한 사람일수록 로젤린 경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할 거야.”

산뜻한 봄바람이건만 서늘하게 피부를 훑는 듯했다. 닭살이 돋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앞날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한마디였다. 리카르디스도 체감했으나, 이복동생이라 해도 대신관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을 줬다. 옛날 명망 높은 대신관 몇은 예언 따위도 종종 하지 않았다던가.

첨탑에서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리카르디스의 시선은 문밖을 향했다. 멀리에 있을 로젤린을 그려 보았다. 많이 불안해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리카르디스는 다음을 기약하며 일어섰다.

라헤안시도 하늘하늘한 잠옷을 훌러덩 벗고 바닥에서 뒹구는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생각보다 성실하게 하는구나.”

“이래 봬도 대신관이라우…… 다음에 또 봐.”

“라헤.”

라헤안시는 하얀 대신관용 모자를 쓰면서 씨익 웃었다.

“정겹게 왜 그래 형. 형은 나한테 묻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거 있음 꼭 그렇게 부르더라.”

“항상 대답을 피하기만 하더니. 오늘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냐.”

리카르디스는 여전히 분주한 라헤안시를 바라보았다. 라헤안시. 라헤. 세티스티아가 그를 부를 때 사용하던 애칭이었다.

라헤안시는 형제들 중 유독 리카르디스와 친근하게 지내는 듯했으나, 리카르디스의 손을 들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축복의 밤. 하얀 밤. 뭐 그런 것들. 리카르디스가 전장에서 구르면서, 암살자의 칼날을 피하면서 알기 바라 왔던 어떠한 단서, 정보, 진실들. 라헤안시는 그 일부를 알면서도 결코 리카르디스에게 가르쳐 준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리카르디스가 품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라헤안시는 목걸이를 침대 아래에서 낑낑거리며 꺼내면서 말했다.

“솔직히 형은 빨리 죽을 거라 생각했어. 내 예상대로라면 한 육 년 전쯤에 죽었어야 했는데. 정말 대단해 형.”

“칭찬 참 고맙구나, 동생아.”

리카르디스는 심드렁하게 턱을 괴었다. 라헤안시는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슥슥 정리하는 중이었지만, 전혀 정리되고 있지 않아 결국 리카르디스가 도와줘야만 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지. 아무에게나 기밀을 누설하고 다닐 수는 없잖아? 이쪽도 나름 목숨이 걸린 일인 걸.”

“한데?”

리카르디스가 그의 머리를 손으로 빗어 하나로 묶었다. 머리카락 하나가 당긴 것인지 아프다고 난리를 쳐서 느슨하게 다시 묶어 줘야 했다. 지저분한 머리를 묶고 나니 훨씬 인물이 살았다. 라헤안시는 거울속의 자신에게 윙크와 사랑을 화살을 한번 날린 다음에야 대답했다.

“이제야 목숨을 걸어 봄 직하다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거울에 비친 라헤안시의 얼굴을 보았다. 여느 때처럼 히죽히죽 웃지도, 나른하게 늘어져 있지도 않았다. 어느 한 곳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먼 곳을 그리고 있었다. 라헤안시는 곧 뒤돌아서 씩 웃었다. 언제나 보아 왔던 미소였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아까 리카르디스를 안내했던 신관이 초조한 얼굴로 라헤안시를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는 이래 봬도 대신관이라 하더니, 역시 빼먹은 전적이 몇 번 있는 게 아닐까.

라헤안시는 이크이크, 지각이다 지각. 하면서 입만 바쁜 시늉을 했다.

“담에 또 봐, 형.”

“얼른 가기나 해라.”

“이델라브힘의 축복이…….”

“가라고.”

라헤안시는 치근덕대면서 끝까지 뭉그적거리더니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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