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91화 (91/220)

91화.

디에즈는 로젤린의 기분을 환기시켜 주려 애쓰면서도, 그녀의 기분이 저조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가끔 시선이 마주치면 웃고, 바람에 나무 그림자가 움직이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음. 뭐가 고마울까요?”

“신전 안에서 꺼내 주신 거요. 감사합니다.”

굳이 따지면 이 정원 또한 신전에 속해 있었으나, 그건 로젤린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하나가 정돈되어 있고, 하얗게 빛나는 곳. 사람들이 불온한 시선을 보내는 공간과 이곳은 같은 신전이라 하더라도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제 멋대로 자라 있는 수풀. 부서져서 담쟁이덩굴에 감싸인 분수. 여기저기 매달린 과실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디에즈는 어떻게 이런 곳을 알고 있을까. 그에게도 이곳이 필요한 때가 있었을까?

디에즈는 감사하다는 로젤린의 말에 숨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제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슬쩍 돌렸다.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앞머리가 그의 눈을 가렸다. 오뚝한 콧날과 입술만 보이는 옆모습임에도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것쯤은 보였다. 기쁘다는 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딘가 침울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축제에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요즘의 디에즈는 좀 이상했다.

디에즈는 한참 뒤에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쓸더니 웃었다.

“정말 로젤린은…… 에파 같아요.”

“에파……는 뭡니까?”

디에즈가 머뭇거렸다.

“이건,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절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에파는…… 제가 어릴 적 기르던 개…….”

말하던 디에즈가 황급하게 단어를 바꿨다. 특정 동물이 욕같이 들린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했다.

“……강아지입니다.”

“아, 제가 개 같다고요.”

“강아지. 입니다.”

디에즈가 정색했다. 좀 더 귀엽고 온건한 단어를 추구하려는 듯했다. 강아지라고요. 한번 더 강조해서 로젤린은 고개를 재빠르게 끄덕이며 네, 강아지. 하고 대답했다.

“제가 며칠 걸려 숙제를 해 놓으면 찢어 놓고, 겨울날 쌓인 눈으로 열심히 얼음집을 만들면 달려와서 부수고는 했었죠.”

이거, 욕이구나! 로젤린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강아지’가 아닌 ‘며칠 걸린 숙제와 얼음집을 파괴하는 강아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그렇게 크게 욕먹을 만한 짓을 했나…… 사사건건 그의 일을 훼방 놓은 애완동물과 비슷하다는 욕을 들을 만한…… 로젤린은 충격 받았다.

“특히 얼음집은 동상까지 걸려 가면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만든 거였는데요.”

나쁜 에파…… 로젤린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그날 밤에 에파가 감기에 걸렸는지 콧물 흘리면서 헥헥 거리기만 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얼음집을 부술 때만 해도 저런 개, 아니 강아지 당장 갖다 버리라고 했었는데,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얼음집이고 뭐고, 그저 아프지만 않게 해 달라며 이델라브힘께 기도했었죠.”

그러니까 결국 좋아하기는 했다는 건가? 혼란스러워 하는 로젤린의 표정을 보고 디에즈가 웃음을 터트렸다. 곧 그가 로젤린에게 두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었다. 디에즈가 이런 장난을 할 줄은 몰랐던 터라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에즈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얄미워.”

디에즈가 꼬집던 것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감싸듯 그녀의 볼을 덮었다. 꾹 눌러서 로젤린의 입이 새의 부리처럼 튀어 나왔다. 디에즈가 즐겁다는 듯 눈을 휘며 웃었다. 로젤린은 난데없이 놀림당하는 느낌이라 어쩐지 심통이 났다.

* * *

“앉아, 형.”

“어디에?”

“거기 있잖아. 곰 인형 들춰 보면 의자 나올……걸? 미안해, 좀 지저분하지?”

“지저분한 걸 아는 머리였다는 게 더 놀라울 뿐이다.”

잇세리온은 재빠르게 라헤안시가 지목한 곳을 들춰서 의자를 발굴했다. 손수건을 꺼내서 삭삭 닦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기사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라헤안시는 성전 중간중간에 끼어 있는 과자 부스러기를 탈탈 털었다. 침대 위에서. 리카르디스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축복의 밤에 설교하는 거 잘 봤다. 곧잘 하더구나.”

라헤안시가 느슨한 눈을 휘면서 활짝 웃었다.

“어어? 봤어? 아, 정말 왔으면 왔다고 하지. 부끄럽게…….”

그가 으헤헥 바보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비비 꼬았다.

“진짜 회심의 설교라고 생각했거든. 크, 폐하께서 보셨으면 아주 그냥…….”

혼났겠지. 리카르디스는 뒷말을 삼켰다. 기분 좋아하는 어린애의 심기를 거스르는 악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근데 말투는 왜…… 그랬던 거냐?”

“이번에 했던 설교가 내 첫 데뷔였거든. 좀 위엄 있어 보이게 하려고 살짝 바꿔 봤는데, 웬걸. 끝내주지 뭐야.”

정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대신관 경력을.

“할배들이 나 어리다고 시비 걸어서 바꾼 말투가 설교에도 이렇게나 유용할 줄이야.”

“살아 봤자 얼마나 더 산다고. 어린 네가 이해해라.”

다소 수위 높은 농담에 라헤안시가 좋아서 넘어갔다. “어, 얼마 못 산대…… 이히힉끽……!” 하면서 좋아하는데 농담한 리카르디스가 민망해질 정도였다.

리카르디스는 바라지 않은 이복형제자매들이 많은 편이었다. 황자만 여섯, 황녀는 일곱. 도합 열세 명. 그러나 리카르디스와 교류하는 형제는 손에 꼽았다. 다른 형제들은 몰라도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배가 다를 뿐 아니라, 씨도 다른 자식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데다가, 다른 여러 가지 문제와 더불어 본인의 성정까지 교류를 끊는 것에 한몫 더했다.

그 중, 유일하게 라헤안시와는 이따금 만나서 차를 마신다든가 안부 인사를 나누는 둥의 소소하지만 질긴 교류가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황자 리카르디스와 라헤안시의 우애가 깊다는 얘기가 돌지 않은 것은, 라헤안시가 더 이상 설원의 월계수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델라브힘의 아래 종의 역할을 맡은 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름만을 지녔다. 어떤 가문의 라헤안시, 위대한 누구의 아들 라헤안시가 아닌 그저 한낱 미천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권력 싸움에서도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이 리카르디스가 라헤안시를 좀 더 편하게 여길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라헤안시는 손수 차를 끓여 와 테이블처럼 보이는 잡동사니 위에 다과를 차렸다. 그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손대지 않았지만, 라헤안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배들이 한번만 만나 달라고 노래를 부를 때는 무시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온 거야?”

“오늘 마침, 대신관들 일곱 중에 넷이 자리를 비우는 날이더군. 그나마 덜 마주칠 수 있으니 오늘이 적기였지.”

“신전에 사람 심어 놨다는 말을 대신관 앞에서 그렇게 태평하게 해도 되는 거야?”

리카르디스는 다리를 꼬면서 웃음을 흘렸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라헤안시를 응시했다.

“그 노친네들이 퍽이나 모르겠다.”

“하기야. 그래서 뭐. 형이 가지고 온 결정에 대한 연구 결과? 그건 아직 멀었는데?”

“그건 알아서 하고. 오늘은 그 건이 아니라 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라헤안시는 자신이 차려 놓은 다과를 즐기며 제 이복형제를 주시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리카르디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 빛났다. 아, 거참 잘생겼다.

“라헤. 마력은…… 대체 뭐지?”

라헤안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린아이 때부터 배우는 개념을 지금 다시금 알려 달라는 건 아닐 테고? 마력, 마력. 크레안 티다니온. 검은 달로부터 오는 불길한 힘. 성력과 정 반대의, 상극의, 섞이지 못하는…….

“우리 똑똑한 형…….”

라헤안시가 제 머리를 매만지면서 웃었다. 곱상한 얼굴인데도 히죽 웃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발타에 가서 축복의 밤에 대한 단서라도 얻었어?”

“……역시 넌 알고 있었군.”

“명색이 대신관인데.”

라헤안시는 긴 의자에 늘어져 반쯤 눕는 듯, 반쯤 앉은 듯한 묘한 자세를 유지했다.

“사실 나는 신참 대신관이라 다 알려 주지는 않지. 내가 따로 공부하고 알아낸 것도 있고. 우리 스승님이 알려 준 것도 있고.”

리카르디스는 라헤안시 입에서 나온 스승님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라헤안시가 스승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그가 아직 설원의 월계수 라헤안시라 불릴 때, 그에게 신학을 가르친 대신관 윈디트일 것이다. 신전에서는 스승이란 호칭은 사용하지 않았으나, 어릴 적 입에 익은 탓인지 라헤안시는 신전에 들어가고서도 그녀를 종종 스승님이라 부르곤 했다.

리카르디스는 슬그머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하얀밤의 기사단원들과 잇세리온뿐이었다. 그가 어울리지도 않는 눈치를 본 이유는, 몇 년 전 처형당한 대신관 윈디트에게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걸 내어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며 만민을 두루 살핀다는 선량한 성직자의 얼굴 뒤에는 다른 모습이 있었으니, 다름이 아닌 사이비 교주였다. 대신전과의 가르침과 반하는 교리를 설파하며, 백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죄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일라베니아는 충격에 빠졌고 대신관 윈디트는 사형당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라헤안시가 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라헤안시가 대신관이 되는 것을 꺼려하는 자들이 많았다. 대신관 윈디트는 상급 신관 라헤안시를 곁에 두고 교리와 법률, 다양한 학문을 가르쳤다. 접촉이 많았던 만큼 라헤안시도 당연히 물들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는 당연했다.

하지만 라헤안시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제 결백을 증명했고, 그가 윈디트에게 이상한 교리를 사사 받았다는 증거 또한 한 장도 찾을 수 없었기에, 그저 의심에만 그치고 넘어갔다. 물론 그 뒷배경에는 라헤안시의 혈통이 톡톡히 작용했다. 아무리 성을 버렸다고는 하나, 황제는 제 핏줄이 그런 오명을 쓰는 것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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