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89화 (89/220)

89화.

뎅-

멀리서 하늘을 울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뱃속에 구렁이 수십 마리씩 품고 있는 자들이 기거하는 곳의 상징치고는 꽤나 아름다웠다. 신전이 코앞이었다.

그 순간, 로젤린이 불에 꼬리 데인 고양이처럼 펄쩍 뛰는 듯 일어섰다.

쿵!

로젤린의 머리와 충돌한 마차가 굉음을 냈다. 거대한 마차가 순간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거렸다.

“로젤린!”

로젤린이 머리를 감싸고 낑낑거렸다. 리카르디스가 급하게 그녀의 정수리 부근을 문질렀다.

밖에서 스타스가 마차 창문을 두드리며 무슨 일 있느냐 물어 왔다. 리카르디스는 대충 얼버무렸다. 마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는, 좀 바보 같은 일이 있어났노라 하면 그녀의 체면이나 위신이 상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정작 그 당사자는 제 체면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로젤린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리카르디스의 허벅지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서 한참 끙끙거렸다.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머리를 문지르기도 하고, 그녀의 얼굴을 잡아 올려 눈물을 닦아 주기도 했다. 따뜻한 손의 온도에 로젤린은 고통이 좀 덜어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왜 갑자기 일어나고그래.”

왜 그랬더라. 로젤린은 그의 질문을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냥 종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도망가고 싶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아까 전 마차가 흔들거렸듯이, 마음이 계속 요동쳤다. 로젤린은 다시 리카르디스의 허벅지에 머리가 닿게 푹 고개를 숙였다. 그의 다리를 꽉 안고 있는 채였다.

리카르디스는 난데없는 로젤린의 애교…… 비슷한 것에 당황하다가 다시 그녀의 정수리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로젤린은 머리로부터 밀려드는 따뜻한 기운에 눈을 감았다.

“많이 아프나?”

다정한 목소리가 마음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음의 파동이 흔들고 간 마음이 다시금 잔잔히 가라앉고 있었다.

* * *

대신전에 도착했다. 금강석 성만큼이나 화려한 건물이었다. 오라고, 오라고, 제발 한번만 방문해 주시라 아무리 빌어도 오지 않던 2황자의 방문에, 신관이며 성 기사들이며 할 것 없이 신나서 달려 나왔다.

“하얀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뵙습니다.”

“축복을 그대들에게. 대신관 라헤안시를 만나러 왔을 뿐이니, 신경 쓸 것 없다.”

“귀한 분이 오셨으니, 안내를…….”

“필요 없으니 물러가라. 어릴 적부터 다닌 곳이니 눈감고도 갈 수 있다.”

노쇠한 신관이 눈물을 보였다. 2황자 전하께서는 몸은 멀리하시지마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대신전과 함께였다는 사실을 자신은 믿고 있었노라며 감격해했다. 아니 뭘 어떻게 하면 그 말이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치를 떨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것같이 애타게 매달리건 말건 리카르디스는 제 갈 길을 갔다. 한마디라도 붙이고 싶어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는 자들도 있었으나, 거구의 하얀밤 기사단원들의 호위 망에 전부 걸러졌다.

로젤린은 집단의 후미에서 리카르디스를 따르다가, 뒤돌아보았다.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 와서 박혔던 탓이었다. 눈이 마주친 어린 신관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더러운 거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하얀색 일색인 인파를 죽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로젤린을 보며 전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얼굴을 일그러트린 가면들을 수백 개 걸어 놓은 공간 속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두피부터 시작해 뒷목 아래까지 거미가 천천히 기어가는 듯한. 그런 기분.

오랜만에 느끼는 적의는 낯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리카르디스는 저 앞에 있었다. 레이몬드가 의문이 섞인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로젤린이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아치 모양의 문을 지날 때였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리카르디스는 소리를 따라 뒤를 돌았다. 입구를 지키는 두 명의 성 기사들이 창을 교차하며 로젤린의 앞을 정확하게 막아 서고 있었다. 로젤린은 멈춰 서서 눈만 깜박깜박 감았다 뜨는 중이었다.

로젤린은 음, 하고 입술을 물며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가, 교차된 창 밑으로 들어가기 위해 슬그머니 자세를 낮췄다.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그녀를 내려다보던 성 기사들이 당황해서 창의 위치를 조정했다.

“……지금 뭘 하는 짓이지?”

성 기사들은 서릿발이 내리는 차가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2황자 리카르디스는 무뚝뚝하지만 쉽게 화를 내는 성품이 아니라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눈 하나 깜박이지 않는 시선, 딱딱하게 굳은 와중에도 이따금 꿈틀거리는 턱 근육까지. 누가 보아도 분노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로젤린은 다시 한 번 자세를 낮췄다. 성 기사들이 얼어 있는 틈을 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화들짝 놀라며 창을 움직여 가로막자, 로젤린이 아쉬움에 작게 혀를 찼다.

입구에서 출입을 허가 하지 않으면, 열에 아홉은 말없이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물러나고, 나머지 하나는 무슨 일인지 묻는 것이 보통의 경우였다.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을 벗어난 로젤린의 이상한 행동에 성 기사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니, 자존심도 없어? 왜 기어서 들어오려는 거야?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물었을 텐데.”

성 기사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신전 법률에 따르면 마인은 이 축복의 문을 통과할 수 없음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리카르디스가 잠시 이마를 짚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미간에는 잔뜩 주름이 잡힌 채였다.

그의 입이 달싹거리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이런…… @#$^&%##……….”

욕이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는 자들이나 사용할 법한 걸걸한 욕이 기어코 그의 이성을 뚫고 나오고야 말았다. 성 기사들은 2황자의 입에서 욕이 나오는 진귀한 광경에 몸을 굳혔다.

로젤린은 바닥에 배를 붙인 채 턱을 괴고 사태를 관전했다.

“너의 위대하신 이델라브힘께서 그리하라 하더냐?”

“이, 이것은 몇백 년 전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나의 자비로우신 이델라브힘께서 그리하라 하더냐!”

리카르디스는 앞에서 바짝 굳어 있는 성 기사들을 보며 한 자 한 자를 씹어 말했다.

“세상에 빛이 되어 축복을 내리시고, 이 땅 위에 열매 맺게 하여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시는 이델라브힘께서. 마인이 불길하니, 내 신전에, 발걸음 하게 하지 말라, 네게 직접 말하셨느냐 물었다.”

“그, 그것이…….”

“신전의 법률이라 말했나? 일라베니아의 탄생과 시작된 신전의 법. 높으신 이델라브힘의 뜻이기에 영광스럽고 숭고하다. 하나, 시대마다 위대하신 선황들마다 조금씩의 차이를 보인다. 이 말뜻이 무엇이느냐면.”

리카르디스는 저벅저벅 성 기사를 향해 걸어갔다.

“만물을 비추시는 분, 이델라브힘. 그분의 뜻은 미천한 우리들로는 백날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는 거다. 이 미천한 머리로는.”

리카르디스가 성 기사의 머리를 퍽 쳤다. 아프지는 않지만 딱 기분 나쁠 정도로.

“영원한 뜻은 있으나 영원한 법은 없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우선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가운데 이델라브힘의 뜻을 가장 잘 헤아리시는 황제 폐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 황제 폐하께서 로젤린 경을 마인이 아닌 내 호위 기사로 인정하여 머물게 하셨으니…… 그대들은 지금 황제 폐하의 인정을 받은 나의 호위 기사에게 시비를 건 셈이지.”

성 기사들이 바짝 얼어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고귀한 황자에게서 나올 법한 압력이 아니라, 무슨 맹수를 눈앞에 둔 것 같았다. 하얀 피부가 얼어붙은 듯 서늘하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시릴 정도로 날카로웠다. 리카르디스가 이를 갈며 두 개의 창 중 하나를 콱 틀어쥐었다.

“내 사람에게 겨눠진 날카로움은 나를 향하는 것과 마찬가지.”

그들은 급하게 창을 거두었다. 리카르디스에게 창을 잡힌 성 기사도 창을 제 품으로 가져오려 했으나, 리카르디스의 손에 잡힌 상태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맨 처음에는 그가 잡고 있는 것도 까먹고 휙 당겨 보았지만 꿈쩍도 안했다.

성 기사의 얼굴이 발개졌다. 교리를 공부하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제외하고서는 단련만 해 왔던 자신이, 곱게 자란 2황자에게 힘으로 밀리다니.

리카르디스는 창을 잡은 채로 가만히 그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창을 그의 가슴에 퍽 소리나게 밀어 붙였다. 거칠게 무기를 건네받은 성 기사가 고개를 푹 숙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로젤린은 눈만 굴리고 있다가 가로막고 있던 이들을 잽싸게 지나쳐 리카르디스의 뒤에 섰다. 무섭게 일그러진 표정들은 이제 그의 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로젤린이 작게 숨을 쉬자 리카르디스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가 손수 더러워진 로젤린의 제복을 툭툭 털어 주었다.

“경, 괜찮나?”

리카르디스가 자세를 낮춰 그녀를 걱정 어린 다정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로젤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리카르디스가 굳은 표정을 애써 누그러트리며 웃었다.

“진짜 괜찮은 거지?”

“네.”

리카르디스의 손길과 다정한 시선에 속 안에 꾹꾹 뭉쳐 들어찬 것들이 풀려 나갔다. 역시 황자 전하가 최고였다. 로젤린은 아직까지 어쩔 줄 모르는 성 기사들을 보며 악당같이 씨익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기분을 조금 풀 수 있었다.

긴 복도를 걷는 동안 로젤린은 스타스와 레이몬드, 슈텐과 바스티안, 잇세리온에게 번갈아가면서 위로받았다. 다들 한마디씩 건네며 그녀의 입에 작은 과자를 하나씩 넣었다. 로젤린은 시무룩해하면서도 분주히 입을 움직였다.

대신관들은 신전 내에 각각의 별관을 가지고 따로 생활했다. 라헤안시가 머무는 별관은 다른 대신관들의 건물에 비하면 작은 축에 속했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로젤린은 입을 떡 벌리고 구경했다. 리카르디스가 혀를 쯧 찼다.

“명색이 신관이라는 놈들이…….”

라헤안시를 돕는 신관이 이미 나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로젤린도 그들의 얼굴을 알아봤다. 축제 ‘그림자 없는 밤’에서 라헤안시 뒤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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