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88화 (88/220)

88화.

“어쩔 수 없긴 뭐가 어쩔 수 없습니까!”

“오, 이게 누구야. 레이몬드 부관.”

레이몬드는 헤사가 로젤린 휘하에 들어갔음을 등록하는 서류를 대신 작성하고 접수한 후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듣는데 아주 가관이었다. 귀여워서 뽑았다고 하질 않나, 그럼 됐다고 하질 않나.

“로젤린 이 녀석! 사람을 얼굴만 보고 판단하는 건 누구한테 배웠어!”

“마른가시나무 백작님한테.”

남자는 얼굴이 전부란다. 마른가시나무 성 내부의 연무장을 같이 구경하던 중 세실이 한 말이었다. 로젤린이 보기에도 반쯤 헐벗은 남자들은 턱 선이 각지고 콧날이 우뚝하여 아주 잘생긴 편이었다. 로젤린은 세실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보기에 좋았다.

“얼굴만 보고 뽑은 애들도 있대.”

“백작님…….”

레이몬드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과연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라면 그런 말을 하고도 남겠지.

세 사람이 복도에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에 지나가던 상급 기사들이 하나둘 멈춰 섰다. 로젤린에게 새 수습생이 생겼다는 시답잖은 건을 주고받다, 주제는 흐르고 흘러 ‘제일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누구인가?’로 바뀌었다.

“역시…….”

“한 분밖에 없지.”

“디에즈 전하도?”

“엘피디오 전하도 얼굴은 괜찮지.”

“그래도 역시…….”

이견 없이 만장일치였다. 월장석 성의 주인, 리카르디스가 1위에 올랐다.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가장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도 전하 같은 미모를 가진 사람은 보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그 나머지였다.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맞아, 막 얼굴이 화끈하면서 눈도 못 마주치겠고.”

“진짜 아름다우시지.”

로젤린은 상급 기사들의 말에 수긍했다. 자신도 전하를 보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른 적 있었는데! 다들 그랬구나. 전하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런 거였어. 로젤린이 “저도요. 심장이 막 두근거렸습니다.” 한마디 보태니 레이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그렇다면서 로젤린과 손뼉을 짝짝 부딪쳤다.

이 모든 광경을 애칭 슈슈, 슈텐만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축제 당시 로즈와 도련님 사이에 흐르던 기묘한 공기를 보았다. 가슴 안쪽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기류가 분명 있었건만, 로젤린이 지금 완전히 길을 벗어나 버린 것이다. 로젤린 너는 거기에 끼어 있으면 안 돼…… 이 멍청이들이 지금 뭐 하는 거야…….

“피부도 엄청 좋으시지 않나.”

누군가의 말에 로젤린이 자신은 전하의 피부를 만져 봤다며 자랑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어우야, 하면서 로젤린의 어깨를 툭 밀면서 낄낄대는데 슈텐은 환장할 것 같았다.

“엄청 매끄러우셨습니다.”

로젤린이 말했다. 아, 로젤린. 진짜…… 아. 로젤린…….

* * *

“뭐지.”

“…….”

“살면서 몇 번 보지 못한 눈빛인데. 왜 나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지 슈텐 경?”

남자의 눈빛에 연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비 오는 겨울 날 거리에 버려진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안 그래도 싫어하는 장소에 가는데, 더 찝찝하게 만들지 말고 당장 그만둬.”

슈텐의 어깨가 축 쳐졌다.

리카르디스를 실은 마차는 대신전을 향하고 있었다. 같은 황성 내에 있지만, 마차를 타고 삼, 사십분은 가야 하는 먼 거리였다.

날씨가 좋아 창을 열어 뒀더니, 옆에서 말을 타고 있던 슈텐이 내내 저런 표정을 하고 있어 리카르디스는 확 기분이 상해 버렸다.

계속해서 힐끔거리는 슈텐의 눈빛이 몹시 불쾌했던 리카르디스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반대쪽 창문으로 로젤린이 멍하니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말 위에서 앉은 다리를 하고 있는 재주가 아주 멋졌다. 리카르디스는 마차의 뒤를 따르던 레이몬드를 불렀다.

“레이몬드 경.”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잠시 이리로.”

리카르디스는 레이몬드가 말을 몰아 다가오자 그의 윗주머니에 있는 과자를 쏙 빼앗았다. 당당한 도둑의 태도에 레이몬드는 아, 어, 입술을 오므리기도 벌리기도 했지만 결국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리카르디스는 강탈한 과자를 그대로 로젤린에게 던졌다. 그녀는 마차의 반대쪽을 보고 있었으면서도 날아오는 과자를 확 낚아챘다. 손을 펴 건포도 오트밀 쿠키의 정체를 확인한 로젤린이 눈을 크게 뜨며 반색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그머니 움직이더니, 마차의 앞에서 호위하는 기사단장 스타스의 뒤통수 어디쯤을 떠돌았다.

“근무 중인데 먹어도 됩니까?”

“된다. 크게 다친 후이니 잘 먹어야지.”

리카르디스의 대답에 로젤린이 입꼬리를 쭉 늘려 웃었다. 최상단에 위치한 결정권자가 자신의 편이라 마음이 든든한 듯했다. 삐이익!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물고 있는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빠져나왔다. 화답하듯 하늘 위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울렸다. 마카롱이 하강해 로젤린의 팔 위에 앉았다.

“같이 먹자, 마카롱.”

이름이 이름이라 그런지 오트밀 쿠키 대신에 마카롱을 먹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로젤린은 마카롱에게 쿠키를 물려 주고 제 입에도 하나 쏙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 경.”

“예. 전하.”

“수습 기사를 한 명 더 들였다면서.”

마차 주위를 호위하던 다른 상급 기사들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리카르디스가 제 사람들을 아끼는 거야 유명하다지만, 수습 기사를 한 명 더 들였니 안 들였니 정도의 소소한 것을 알 정도는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요새 리카르디스의 관심은 유별나게 로젤린을 향하고 있었다.

“예. 헤사입니다. 전에 전하와 같이 밤에 마셨던 산딸기 와인이랑 비슷한 머리 색을 가졌습니다. 웃을 때 눈이 완전히 접히는데 아주 예쁘고 귀엽습니다.”

레이몬드는 심하게 사레들렸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리카르디스와 로젤린의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레이몬드는 “너, 로젤린 언제 전하와……!” 따위와 같이 무언가를 추궁하고자 했으나, 슈텐이 재빠르게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아, 맞다.”

아옹다옹 다투는 두 남자의 공방을 보던 로젤린이 리카르디스에게 완쾌 선물로 받은 검은 군마, ‘초콜릿’을 마차 곁으로 바짝 몰았다. 안장 위에 일어선 그녀는 자연스럽게 창을 통해 마차로 쏙 들어갔다.

빈 안장 위에는 마카롱이 그녀 대신 앉아 고삐를 물었다. 초콜릿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등 뒤를 슥 한번 보기는 했지만 문제없이 운행되었다.

“……안장이 불편했나?”

“아니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합니다.”

보통은 묻고 들어오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표정이 제법 심각해 보여 리카르디스는 뒷말을 삼켰다. 로젤린은 창문을 전부 닫는 와중 동공이 확장된 레이몬드와 눈이 마주쳤다.

탁.

로젤린은 레이몬드의 경악 어린 눈동자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가벼운 손길로 문을 닫았다. 그녀가 리카르디스를 돌아보았다.

“전하.”

“불안하게 자꾸 왜 이럴까. 아직 수습 가능한 정도일 수도 있으니 얼른 말해 봐. 안 그런 척 하고 있지만 사실 굉장히 초조하다.”

“전하. 제 새로운 수습 기사가 마인입니다.”

리카르디스의 눈썹 위치가 올라갔다. 그가 제 눈썹을 한번 쓸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미묘하게 큰 사건인 듯 아닌 듯…… 이 정도는 괜찮군.”

또 다른 마인. 어딘가에는 살고 있었을 테지만, 시기와 장소가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잘은 몰라도 대륙에 자자하게 퍼진 명성에 따라오는 어떤 작용일 것이다. 그게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모르겠으나.

“검은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주 귀엽습니다.”

귀엽다고 검은달이 아닌 건 아니지만, 확실히 검은달이 귀엽지 않기는 했다. 나름 확실한 구분법인가. 리카르디스가 웃음을 흘렸다.

“일라베니아 내에도 마인은 있을 테니.”

“전하, 방금 한 얘기는 비밀입니다. 다른 사람한테 말하시면 안 됩니다.”

헤사가 부탁한 적은 없으나,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밝혀지길 바라지 않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비밀.

“약속하겠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리카르디스는 자신의 코앞에 불쑥 튀어나온 로젤린의 새끼손가락을 보고 당혹스러워 했다.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이라니. 세티스티아가 살아 있을 적에나 몇 번 해 본 것이었다. 리카르디스가 머뭇거리자 로젤린이 손을 그의 얼굴에 더욱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무언의 압력이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에 꿰었다.

로젤린은 얽힌 새끼손가락을 두어 번 세차게 흔들고 엄지를 딱 붙여 도장까지 찍었다. 이 어설픈 서약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코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헤사가 전하께 폐가 안 되도록 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속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 예쁘다는 소년이 진정 검은달의 암살자일지언정, 갖은 수단을 동원해 회개시키겠다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걸고 한 말인 만큼 반드시 지켜지리라.

둘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밖에서 서성이는 로젤린의 보호자, 레이몬드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두 사람 다 무시했다.

“그때의 사냥 대회 이후로는 대신전에 가 본 적이 없겠군.”

“예.”

“웅장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천천히 구경 시켜 주고 싶지만, 나를 붙잡고 늘어지려는 자들이 많아. 느긋하게 둘러볼 시간은 없을 테지.”

“인간들만 없으면…….”

먼 곳을 바라보는 로젤린의 눈빛이 선뜩하게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급하게 말을 붙였다.

“안 된다.”

가만히 기도 잘하고 있는 신관 털 한 올 건드릴 생각 말라는 얘기였다.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안 합니다.”

저를 뭐로 보냐는 식으로 흘겨보는데, 리카르디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안 된다’는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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