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투기장의 별칭이라 보기에는…….”
투기장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거칠고 땀내 나는 사내들의 무식한 싸움장. 그 만큼 별명들도 무식하고 거친 것들이 즐비했다. 예를 들자면 투견이라던가 손톱수집가, 사형집행인 따위의.
그러다보니 ‘허수아비 길레드’ 라는 평범한 이명이 도리어 튀어 보였다.
“소탈한 감이 있지요? 어딘가 비실비실해 보이고.”
“그렇군.”
“정확히 그겁니다. 수련용 허수아비같이 맞을 줄만 안다고 붙은 별명이라더군요. 싸움질은 허접한데 맷집만 좋다 합니다. 승률은 저조하지만, 가끔 터지는 행운의 한 방으로 배당금을 적당히 챙기기도 한. 그저 그런 나쁘지 않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싸움꾼입니다.”
허수아비 길레드는 목을 돌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거대한 남자가 어깨로 퍽 치고 지나가며 시비를 걸자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투기장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우연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기고 지는 패턴이 단순합니다. 은밀하고 복잡하게, 자연스러움을 위해 섞어 놓은 여러 경기들이 도리어 지표가 된 달까요. 물론 길레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정도의 소득이지만, 외부에 한패가 있다면 얘기는 다르지요. 제법 한 몫 잡았을 겁니다.”
“싸움 잘하고 연기 잘하는 사기꾼일 가능성은?”
알터가 와하하 웃었다. 투기장의 소음에 묻혀 그다지 눈에 띄진 않았다. 그가 칼릭스의 어깨를 탁탁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연히 있지요!”
보통 저런 반응 뒤에는 ‘없다’ 따위의 반응을 기대하기 마련이라,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알터가 투덜거렸다.
“아, 제가 마인도 아니고 어떻게 압니까. 제가 저 사람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세모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도련님도 참. 그렇게 욕심 부리시면 배탈 납니다.”
“이 자식이 말만 번드르르해서는…….”
칼릭스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는 듯 꽉 막힌 목소리로 얘기하자 알터가 흐흐 웃었다.
“마인인 것은 알 수 없어도. 승부 조작은 확실하거든요? 심지어는 이 짓을 십 년 넘게 해 왔으니 돈도 제법 벌었을 테고.”
“그렇겠지.”
“그런데도 비스타를 떠나지 않는단 말이죠. 난다 긴다 하는 싸움꾼이나 용병들이 비스타를 찾는 이유는 금전적인 문제뿐이고, 그게 충족되면 위험한 국경 지대를 떠나기 마련인데…… 길레드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건가.”
“예, 발타라는 코앞의 위험을 감수하고도 남아야 할? 비스타 내에 형성되어 있는 마인들의 연결 고리를 벗어나 외부로 향할 용기가 없다던가 하는 그런……?”
“비약인걸.”
“비약이죠. 정확히 알지 못하니 그려 보는 수밖에요. 생각보다 이런 수가 제법 통하기도 하거든요.”
와아악! 비명 소리인지 함성 소리인지 모를 것들이 섞여 있었다. ‘새끼손가락’이 경기장 밖으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새끼손가락’은 자신이 이길 때마다 상대의 새끼손가락을 자르는 기행으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역시나 불법 투기장다웠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번의 패배로 인해 대전자의 새끼손가락을 자를 수 없게 되었다.
허수아비 길레드가 올라갈 차례였다.
“길레드의 대전자는 떠오르는 신성이네요. ‘애꾸눈’ 카터. 왜 애꾸눈이냐면 이길 때마다 상대방을 애꾸눈으로…….”
미친놈들이다. 칼릭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길레드가 이길 겁니다. ‘애꾸눈’이나 ‘새끼손가락’처럼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입히는 대전자를 만나면 항상 이기더군요.”
그 순간 칼릭스는 허수아비 길레드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으로 가득 찬 이 난장판 속에서, 길레드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칼릭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알터와 칼릭스의 대화를 들은 것처럼.
칼릭스는 그에게 두었던 시선을 천천히 자신의 발치까지 끌고 왔다. 소리치고 악을 쓰는 사람을 수십 명 지나쳐야만 닿을 수 있는 먼 위치.
‘……설마, 이 거리에서 우리의 얘기를 들은 건가?’
잠시간 닿았던 길레드의 시선이 무언가를 예감하게 했다. 비로소 칼릭스는 커다란 세모 위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었다.
* * *
“아이고 어서 오시죠!”
길레드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문을 열어 주는 남자가 너무 해맑았다.
그는 불법 투기장에 있던 다른 동료들을 통해 수상한 두 남자의 정보를 몇 개 얻어 냈다. 처음 보는 인물들. 허수아비 길레드, 자신에 대해 미리 조사하고 왔다. 마인임을 의심한다. 승부 조작을 눈치챘다. 등등.
승부 조작 건을 통해 그 불법 투기장까지 흘러왔다니. 소설을 기가 막히게 잘 쓴다면 잘 쓰는 자들이고, 머리가 좋다면 참 좋은 사람들이었다.
비스타에서 몰래 ‘마인’이라는 물건을 찾는 사람 중에 그걸 떳떳한 곳에 사용하려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도, 약점 잡히는 것도 질색이라 여차하면 손에 피를 묻힐 각오까지 하고 왔건만.
“들어오세요, 뭐라도 드시겠습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남자가 정말 해맑았다.
길레드는 재빠르게 방 안을 훑었다. 두 사람 이외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닫히는 문소리가 무거웠다.
의자에는 또 다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 코와 입만 간신히 보였다.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길레드는 긴장을 유지한 채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검을 잡을 때 생기는 굳은살이 있지만 거리에 숱하게 보이는 용병 같은 부류는 아닌 듯했다. 곧게 핀 허리와 태도 하나하나에 이런 뒷골목에서 보기 힘든 품위가 느껴졌다.
‘귀족인가…….’
길레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갑작스럽게 불러 내어 미안하군.”
“……아닙니다. 용건을 말씀하시죠.”
남자가 느릿하게 제 후드의 끈을 잡아끌었다. 후드를 완전히 벗어서 곱게 접어 소파 한 편에 놓아 두는 태연한 행동을 보며, 길레드는 눈을 홉뜨고 있었다. 검은 머리, 날카로운 눈매. 녹색 눈동자. 그 특징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귀염둥이 칼!”
칼릭스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불법 투기장에서 구르며 갖은 험악한 인상을 다 본 길레드가 움찔할 정도였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다.”
“아, 네. 카, 칼릭스 님? 경?”
“편한 대로.”
길레드가 머쓱하게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칼릭스. 맞다. 그런 이름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후계자이자, 대륙에 명성이 자자하게 퍼진 ‘마인’의 혈육. 비스타에서 돈 많고 잘생긴 데다가 귀엽고 착하기까지 하다고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문을 가진 사람치고는 인상이 영, 아니긴 했다. 잘생겼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지만, 저 날카로운 눈매에서 착하다는 단어를 떠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귀엽다는 얘기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길레드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된다고 생각했다.
“아, 예. 칼릭스 님. 저는 길레드라고 합니다.”
“일단 자리에 앉지.”
길레드는 아까 전에 비해 누그러진 기색을 보였다. 적의 대신에 자리 잡은 것은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탐색의 눈빛이었다. 대륙에 자자하게 퍼진 ‘붉은수레바퀴’의 이름 덕분이었다. 숨어 사는 마인들에게 로젤린의 얘기는 전설이나 영웅담처럼 퍼지고 있었고, 그 영향이 지금도 드러나는 것이었다.
“내 사정으로 인해, 그쪽이 원치 않았던 식의 접근을 하게 된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저를…… 아니지, 마인인가요?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솔직히 감도 잡히지 않는군요. 마인과 가장 가까이에 계신 분이 아닙니까.”
칼릭스는 말을 골랐다. 허울 좋은 핑계야 만들어 내자면 수없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자들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뒷골목을 전전하고 사는 대표적인 하층민. 그럴싸한 말로 간단히 손을 빌릴 수 있겠지만…….
어쩐지 그러기 쉽지가 않았다. 달콤한 말이 나가는 대신 입안은 쓰기만 했다. 칼릭스가 피식 웃었다.
“내 필요에 의해서.”
“제가 어디에 필요합니까?”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만일이라 하신다면?”
칼릭스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매끈한 탁자 표면에 그가 비쳤다. 탁, 탁, 탁. 일정한 소리를 내던 손가락이 멈췄다. 정적이 무거웠다.
“전쟁.”
길레드는 아, 하고 신음했다. 요새 비스타가 어수선하더라니. 골목골목 있는 주점마다 전쟁의 가능성이 알음알음 돌더라니. 누런 이에 정돈되지 않은 턱수염을 가진 취객들이 말하는 것과, 정장을 차려입은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가 말하는 ‘전쟁’의 무게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칼릭스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얘기를 이었다.
“내가 지금부터 꺼내는 제안은 너와 네가 알고 있는 또 다른 마인들에게 건네는 제안이다. 결코 강제하지 않으며, 거부한다고 해도 불이익이 따르지 않으리라, 내 누이의 이름에 맹세하지.”
11
뿌리 출신의 수습생들은 어지간히 실력이 뛰어나지 않는 이상 상급 기사의 눈에 들기 힘들었다. 고만고만한 실력들이라면 상급 기사도 당연히 친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가문의 자식들을 데려왔다. 스승이 없는 이상 큰 성장을 보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것이 뿌리 출신들 대다수가 수습생에만 머무르는 이유였다.
그 와중에 로젤린의 휘하에는 뿌리 출신의 기사가 두 명이나 있었다. 동료 상급 기사들이 그녀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 취급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복도를 걷던 중, 로젤린은 파르딕트와 만났다.
“어이, 로젤린.”
“파르파르.”
두 사람이 주먹을 부딪쳤다. 파르딕트가 가르쳐 준 인사법이었다.
“너 또 뿌리 출신 데리고 왔다며. 수집하는 거야? 대체 왜 뽑았어, 걔는?”
로젤린은 생각하다가, “귀여워서.”라고 했다. 파르딕트는 잠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어쩔 수 없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