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
인상을 찌푸린 두 남자가 골목 입구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이거 노동 착취 아닙니까, 도련님?”
알터가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렇게 빤히 보이는 약한 척이 칼릭스에게 통하지 않으리란 것쯤은 알았으나, 그 나름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 칼릭스 에스터의 보좌관이라는 자리는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전선에 머무르는 시간이 긴 백작을 대신해 칼릭스는 주로 성안에만 머물렀고, 그 성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알터가 맡는 일 또한 쳇바퀴 굴러가듯 비슷한 일들뿐이었다.
그 일정한 굴레에서 벗어난 지는 제법 오래 되었다. 사냥 대회에서 로젤린이 실종되었던 때부터. 그때부터 알터의 순조롭고 무난한 생활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결국 스스로 달아 놓았던 ‘월급 도둑’이라는 흡족한 별명도 내려놓아야만 했다.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요양을 마치고 칼릭스와 함께 수도로 떠났을 때, 알터는 비스타에 남아 마인을 찾기 시작했다.
발타로 떠나지 않은 마인들은 전투가 잦은 지역에 자리 잡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했다. 칼릭스가 이 거리에서 소매치기 마인 소년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알터는 비스타부터 뒤졌을 것이다.
문제는 어딘가에 분명 있을 마인과 함께 마인처럼 무섭게 생긴 자들도, 마인처럼 강한 자들도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용병과 싸움꾼들이 쉼 없이 밀려드는 인파 속에서 알터는 그들을 구별해 낼 만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직접 발로 뛰어다녀도 얻는 소득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니, 칼릭스가 하루 걸러 하루 닦달해 대는 서신들에도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며 차일피일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칼릭스가 자신이 직접 알아보겠다며 비스타로 내려왔다. 평소 차분한 성격은 어디다 버리고 온 것인지. 알터는 오랜만에 보는 제 주인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최초의 하얀 밤과 검은달이 뜬 날 ‘그림자 없는 밤’ 축제부터 시작해서, 일라베니아 제국의 밤은 연일 빛나고 있었다. 오늘도 여전히 갖은 색깔의 아기자기한 등불들이 거리를 밝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축제의 빛이 옅어지는 좁은 골목의 안쪽에 있었다. 칙칙한 회갈색의 후드를 뒤집어 쓴 칼릭스가 하얀색 일색인 거리에서 눈에 너무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후드를 벗자니 검은 머리가 너무 눈에 띌 테고.
알터는 좁고 어두운 골목과 대비되는 밝은 상 거리를 바라보며 종일 투덜거렸다. 노동 착취 투덜투덜, 휴식을 휴식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투덜투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따라가는 게 아니었는데 투덜투덜…….
“알터. 지금 이 소리 들었나?”
“예? 무슨 소리?”
칼릭스가 먼 곳으로 시선을 두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알터는 거리의 소음을 뚫고 제 주인에게 들어갈 만한 특별한 소리가 있나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칼릭스가 후드를 젖히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네 월급이 오르는 소리.”
짜릿한 돈의 맛! 알터가 감격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 도련님…… 제가 까라면 까겠다고 말씀 드린 적 있던가요?
“제 취미가 노동 착취당하는 거라고 말씀드린 적 있던가요!”
“싱거운 말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가.”
“크으, 역시 우리 도련님. 용건만 간단히! 시계도 도련님처럼 시간을 효율적으로 나누지는 못할 겁니다!”
“그만하라고 좀.”
알터는 희희덕 웃으며 제 품에서 구깃구깃 접혀진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칼릭스는 그것을 잽싸게 펼쳐서 읽었다.
악필로 쓰인 정보들은 토막 나 완전하지 못했고, ‘?’라던가 ‘△’ 같은 기호로 뒤덮여 있었다. 총체적으로 살펴보자니 미심쩍은 구석이 있긴 한데 잘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칼릭스가 서늘한 눈빛으로 월급 도둑을 째려봤다.
“마인도 아닌 제가 뭔 수로 확실하다 동그라미를 칩니까. 의심은 가지만 물증이 없으니 확정 지을 수 없는 노릇이고.”
알터의 말대로이긴 했다. 눈앞에서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펑펑 써 대어도, 마력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확정 지을 수는 없었다. 이 종이에 동그라미를 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인뿐이었다. 칼릭스는 서류를 곰곰이 읽었다. 무슨 사거리 정육점, 무기점, 용병단, 불법 투기장…….
“그리고 이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동그라미죠.”
알터는 종이에 그려져 있는 것 중 가장 큰 세모를 가리켰다. 그 아래, [불법 투기장] 이라고 적힌 글자가 알터의 침에 의해 번져 있었다.
허름하고 반 쯤 무너져 가는 것 같은 건물이었다. 알터가 안내한 불법 투기장은 불법 투기장이라는 이름이 정말 너무 잘 어울렸다.
몇 번의 골목을 꺾어 숨겨진 문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허름한 건물에서 쨍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절그럭거리는 쇠사슬과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도 간간히 들렸다.
“죽여!”
“죽어!”
눈알을 어쩌고 불알을 어쩌고! 부모님의 안부를 서로 묻는 관전자들의 거친 언사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반쯤 내부가 보이는 건물은 전혀 방음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저 사람들 불법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맞겠지?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이 장소를 못 찾는 게 아니라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리라.
칼릭스가 건물의 입구를 찾아 들어가려 하자, 거대한 남자들이 앞을 막아 섰다. 흉터가 여기저기 깊고 굵게 새겨진 데다가, 인상도 사납고 수염도 숭숭 나 있어 위협적이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들보다 곱절은 더 사나운 인상의 소유자를 부모로 두고 있었다.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방문객의 태도에 남자가 씩 웃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로구만. 초대장은?”
칼릭스는 초대장을 받기 위해 알터를 돌아보았다. 알터는 입술을 흉하게 오므린 채,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이 자식이…….’
칼릭스의 눈매가 더욱 사나워졌다. 알터는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허접한 곳에 초대장 같은 게 있을 줄은 몰랐죠.”
목소리가 컸다. 초대장도 없어 보이는 허접한 곳을 보물단지처럼 지키던 남자들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칼릭스는 진심으로 알터를 해고하고 싶어졌다.
혀를 찬 칼릭스가 품에서 금화 하나를 튕겼다. 남자가 공중에 떠오른 금화를 잡아챘다.
“이봐, 나는 이깟 돈이 아니라 초대장을…….”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주위의 다른 산적 같은 사내들도 흉흉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압박하며 한걸음씩 다가왔다. 알터는 식은땀을 흘렸다. 대충 돈을 먹인다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나.
“도, 도련님 그냥 우선 나갔다가…….”
칼릭스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먹보다 큰 주머니는 이미 두둑하게 무언가로 채워져 있었고, 분위기 상 대충 그 안의 내용물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칼릭스가 남자에게 주머니를 던졌다. 찰랑이는 금속음이 건물에서 퍼져 나오는 비명 소리를 뚫고 뚜렷하게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
남자가 산적 같은 얼굴을 누그러트려 활짝 웃었다.
“잘 받았습니다, 손님! 즐거운 시간 되십쇼!”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지 않나. 뭐 결과가 좋으니 됐지만…….
알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알터와 칼릭스 주위를 포진해 있던 많은 남자들이 꽃집 청년 같은 상냥한 미소를 띠며 문을 활짝 열어 줬다.
알터는 허망함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칼릭스의 뒤를 따라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이 병신 같은 새끼! 일어나! 일어나라고!”
“목을 졸라! 죽여 버려! 대가리를 박살 내!”
투기장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좁아 보였다. 사람들로 꽉 차 있는 탓이었다. 그 중앙에는 네 개의 나무 기둥을 세워, 쇠사슬과 밧줄을 칭칭 감아 놓아 장소를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그 안에서 두 남자가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한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고 그 위로 피 흘리는 남자가 올라타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가 그 안에 있었으면 니들은 이미 뒤지고도 남았어, 소꿉놀이 하냐!”
야유가 쏟아졌다. 우리 할머니 운운하며 야유를 퍼부은 자가 어린 여자아이, 그것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라 몹시 혼란스러웠다. 피가 튀고, 술병이 날아다니고, 관전자끼리도 싸우고.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음, 개판이네.”
알터가 감상을 늘여 놓았다. 칼릭스는 구석에 나무 상자를 쌓아 올려 술 장사를 하는 자에게 와인 한 병을 샀다. 와인을 한입 머금은 칼릭스는 곧바로 손수건에 마신 만큼 뱉어 냈다.
그는 찌푸린 인상으로 와인을 째려보다가 알터에게 병을 넘겼다. 불법 투기장을 구경하느라 한눈팔고 있던 알터는 칼릭스의 행동을 미처 보지 못했고, 그 덕에 칼릭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알터는 와인을 마시고 말았는지 욱욱하며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그 사이 주위를 둘러봤다. 문신, 흉터, 반쯤 헐벗은 남자들, 담배 연기. 어린아이부터 노파까지. 연령대도 다양하고 거는 액수도 천차만별이었다. 칼릭스처럼 후드를 눌러쓴 자들도 있었다.
‘이 안에…….’
마인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데…….
힘을 숨긴다고 해도 양지보다는 그늘진 쪽으로 숨어들었다고 하니, 영 이상한 장소는 아니었다.
“도련님.”
“왜.”
“저기 구석에 녹색 머리 보이십니까?”
알터가 가리킨 곳은 다음 결투를 위해 몸을 풀고 있는 자들이 대기하는 장소였다. 그 중, 유별나게 체구가 크지도 않고, 유별나게 강해 보이지도 않는 평범한 남자가 보였다. 그 거친 이들 사이에 있기에는 어딘가 살짝 유약해 보였으나, 몸에 덕지덕지 붙은 흉터가 배경에 녹아들게 했다.
“제 세모의 주인공입니다.”
칼릭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동그랗고 맑았다. 소나 말 같은 초식동물이 떠오르는 눈동자였다.
“이 투기장의 붙박이라 하더군요. 허수아비 길레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