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85화 (85/220)

85화.

“전 수습 기사였던 레티시아 경과 에버하르트 경이 남는 시간에 헤사의 교육을 도맡기로 했습니다. 오늘부터 당장 시작하기로 했다니, 열심히 배우십시오. 솔직히 내게 주어진 업무의 반 이상은 레티시아 경과 에버하르트 경이 처리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돕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돕는 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헤사에게도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업무라고는 처리할 줄 모르며, 네가 열심히 배워 오면 다 맡길 예정이라는 말을 굉장히 당당하게 했다. 하지만 헤사는 그녀의 태만한 업무 태도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헤사에게도 많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대하고 있다고 하지 않나! 전의 수습 기사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몰라도, 지금 로젤린과 함께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들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수습 기사가 되리라!

헤사는 오후에 바로 전 수습 기사 중 한 명인 에버하르트와 만났다. 에버하르트는 헤사를 보자마자 히죽히죽 웃으며 손을 머리로 뻗어 왔다. 헤사는 눈을 크게 뜬 채 경직했다. 다가오는 손이 당장에라도 자신을 아프게 할 것 같았으나…….

그저 섬세하지 못하게 머리를 헤집을 뿐이었다. 에버하르트는 몹시 들떠 있던 상태라 제 손길에 잠시 굳어 버린 소년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고 작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하기 바빴다. 헤사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하급 기사 에버하르트다 꼬맹아!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이게 그 에버하르트…… 헤사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에버하르트는 룰루랄라 콧노래만 불렀다.

“선배인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잘 가르쳐 줄게. 로젤린 경께서 내게 특별히 부탁하셨거든. 너…… 제대로 할 줄 아는 거 하나도 없지? 이야, 고생 좀 하겠네. 열심히 하자 꼬맹아?”

헤사의 눈이 돌아갔다.

“망할 꼬맹이!”

에버하르트가 씩씩거리며 등장했다. 레티시아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굽혀펴기를 계속했다. 새롭게 로젤린의 수습 기사가 된 뿌리의 헤사. 그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후임자를 만나러 간다고 발걸음 가볍게 떠나더니,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다.

로젤린에게 전해 듣기로는 ‘음. 헤사요. 굉장히 귀엽습니다. 갓 태어난 고양이같이.’라는 감상이 다였다. 지금 에버하르트의 반응을 보자니, 확신하기 어려운 정보였지만.

“고오오이연놈! 시건방진 새끼!”

에버하르트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계속 씩씩거렸다. 레티시아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났다. 에버하르트는 화내는 와중에도 마른 수건을 가지고 와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같은 뿌리 출신인 데다가 성별도 같으니 말이 잘 통할 거라며 그렇게나 거들먹거리더니…….’

레티시아가 쯧 혀를 차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 냈다. 에버하르트는 옆에서 헤사의 만행을 종알종알 얘기했다.

갑작스럽게 헤사가 결투를 신청했다고 한다. 가르침을 청한다 정중하게 얘기는 하고 있지만 눈빛이 호기로워 자라나는 새싹을 작신 밟아 줄 생각을 하던 에버하르트는…… 참패했단다.

검투에서는 간신히 이겼지만, 박투에서 굴욕적으로 명치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렸단다. 그런 에버하르트를 내려다보는 수습생의 눈빛은 뭐랄까.

“씹다 뱉은 음식물에 벌레가 꼬여 있는 걸 보더라도 그것보다는 부드러웠을걸! 쥐새끼 같은 게 얼마나 이리저리 약 올리면서! 레티시아 혼내 줘!”

저런 놈이니 어린애랑 수준 맞춰서 놀고 있지…… 헤사뿐 아니라 에버하르트까지 통제해야하는 레티시아는 골치가 아팠다. 그녀가 수건에 얼굴을 묻고 후우……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버하르트가 비록 촐랑거리는 멍청한 촉새라도 무력은 무시할 게 못되었다. 그가 방심을 했다고 하더라도, 새로 들어온 수습생 또한 분명 괜찮은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으리라.

“로젤린 경이 오니까 표정 싹 바꾸고는 꼬리에 불난 강아지처럼 어찌나 꼬리를 흔들어 대던지! 이중인격자야 완전! 레티시아 내 복수를 해 줘!”

레티시아가 에버하르트의 엉덩이를 퍽 찼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이 자식은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안 된다. 누가 싸우고 오랬나. 일을 가르치고 오라고 했지.

일과를 마치고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문제의 수습생을 만나러 갔다. 에버하르트는 싸움 지고 나서 제 형을 데리고 가는 꼬마 애처럼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었다.

“그 꼴사나운 어깨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내가 널 어떻게 해 버리겠어.”

레티시아의 서늘한 협박에 에버하르트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검은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작달막한 소년이었다. 분홍색이 살짝 섞인 빨간 머리의 소년이 호기롭게 레티시아를 올려보고 있었다. 첫 만남에 보이는 적개심이라고 보기에는 과한 감이 있었다. 레티시아는 에버하르트 멍청이가 무슨 초를 쳐 놓은 게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에게. 수습생 헤사. 나는 로젤린 경의 휘하에 있는 하급 기사, 서리나팔의 레티시아다.”

“헤사입니다.”

예의는 갖췄으나 눈빛이 불손했다. 에버하르트가 뒤에서 바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저 자식은 전쟁에는 내보내면 안 되겠다. 너무 단순해서 도발에 백이면 백 넘어갈 게 분명했다.

“수습 기사는 상급자의 일과에 따라 같이 움직인다. 수습생은 상급자의 수족이나 다름없으니, 로젤린 경이 언제 일어나고, 언제 임무를 하고,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해. 오늘은 그 일과에 대해서…….”

헤사가 손을 가볍게 들었다. 레티시아가 턱짓으로 발언을 허가했다.

“대련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에버하르트가 뒤에서 방방 뛰었다. 저거야 저거! 저놈이 저거 해서 내가! 잉잉 레티시아! 하는 속마음이 다 들려왔다.

레티시아는 에버하르트를 무시한 채, 소년을 다시 찬찬히 훑어보았다. 팔이 가느다랗다. 단련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 성장기인지 몸이 덜 자란 상태였다. 에버하르트의 복부를 타격하고 바닥에서 추하게 기어 다니게 할 정도의 타격을 주기에는 한참 모자라 보였다.

‘단순히 힘이 센 게 아니군.’

그렇다면 하나밖에 더 없지 않은가.

‘마인이다.’

로젤린 경이 받아들인 경위가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소년이 마인이라면 나름 이해가 됐다. 레티시아가 그를 빤히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듣지 못했나. 오늘은 수습 기사가 할 일에 대해 배운다고 했어.”

도발에도 안 넘어 오자 헤사가 입술을 잘근 물었다. 저 뒤의 원숭이는 잘 넘어오던데…… 하는 당황의 기색이 느껴졌다.

“……피하시는 겁니까?”

에버하르트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지만 레티시아는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라 우습지도 않았다.

“서리나팔의 가언을 알고 있나, 수습생?”

헤사가 눈썹을 치켜뜨고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시골 후미진 곳의 작은 영지라 잘 모를 테지. 서리나팔의 가언은 ‘서리나팔의 여자는 절대 지지 않는다.’ 이다. 이게 무얼 말하는 거라 보는가?”

“강하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세상에 절대 지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로젤린 경이라면 또 모를까. 아니 로젤린 경도 나에게 체스를 지고는 하시니, 그분 또한 지지 않는 건 아니겠지.”

헤사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제법 숨기는 척하더니, 어린애는 어린애인지 감정을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사소한 싸움의 승패 하나에 웃고, 하나에 울며 이겼네, 졌네 따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다. 지금 내가 수습생에게 이기면 어쩔 것이고, 지면 어쩔 것 같나. 진다 해도 그것은 앞으로 내가 강해지기 위한 밑거름이 될 뿐이다. 나의 패배가 전혀 중요한 싸움이 아니라는 거다.”

그건, 그냥 허울 좋은……. 헤사가 울컥해서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레티시아가 말을 덧붙이는 게 더 빨랐다.

“서리나팔은 가언은 그것을 말한다. 진정 싸워야 할 때가 찾아왔을 때야 말로 물러서지 말라. 그것이 이기는 길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쓸데없이 힘을 빼지 마라 수습생. 수습생이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에버하르트가 아니다. 수습생이 해야 할 일은 로젤린 경을 보조하는 것. 그리고 오늘은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다. 그런데 지금 수습생은 배우는 데에 필요한 시간을 깎아 먹고 있군. 병장기도 없이 전쟁에 나가는 꼴이다. 수습생의 힘이 얼마나 대단하건 간에, 이번은 필패다. 싸움의 종류를 알고, 싸워야 할 때를 알아라.”

헤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소년이 레티시아의 시선을 피하며 손을 꼬물거렸다. 레티시아가 픽 바람 빠지듯 웃었다.

뿌리 출신이 황성에서 얼마나 갖은 설움을 당했겠는가. 바짝 선 가시를 눕히려 해도 눕힐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서 원초적인 힘 대 힘으로 싸워 기를 누르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따끔하게 혼내야 하지만, 반성의 기미가 보였다. 천성이 나쁜 아이는 아닌 듯했다.

레티시아가 손을 무릎에 대고 상체를 숙여, 헤사와 눈높이를 맞췄다. 소년이 홍조가 올라온 얼굴로 눈치를 봤다. 그녀가 씨익 웃은 다음에 소년의 어깨룰 툭툭 두드렸다.

“배짱은 썩 좋아 마음에 든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싸움에서는 물러나지 마라 헤사 경.”

헤사가 손의 굳은살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뒤에서 에버하르트가 입을 떡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후로도 헤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뾰족하게 대했지만, 로젤린과 레티시아. 레이몬드에게만은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였다. 머리가 나쁜 편도 아니고 본인도 열심이라 업무를 익히는 속도도 빨라 레티시아는 결과적으로 만족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업무를 익히는 도중 헤사가 뜬금없이 물었다.

“……서리나팔의 남자는 지기도 합니까?”

서리나팔의 ‘여자’만 지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나 보다. 레티시아가 살짝 웃었다.

“서리나팔은 대대로 데릴사위를 들이거든. 데릴사위들은 가언을 변화시킬 영향력도 없을뿐더러, 가위 바위 보에도 열 내는 바보들이 많았다. 실제로 잘 지고 돌아다니기도 했고. 궁금증은 풀렸나?”

뭐가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헤사는 테이블에 엎드려서 숨넘어가게 웃었다. 어린 웃음소리가 유리 소리처럼 맑았다.

후에, 레티시아와 로젤린이 담소를 나누며 헤사를 ‘귀엽다’라거나 ‘귀엽고 착하다.’라고 얘기를 나눴는데, 이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 에버하르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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