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83화 (83/220)

83화.

하급 기사가 된 수습 기사들은, 상급 기사의 지도 아래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자와 스승이 아닌 동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관계의 형태를 다시 쓰게 되는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정식으로 기사가 된 만큼 임무를 배정받아, 하루 종일 상급자를 따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급 기사가 되면 기사로서 일 인분은 하게 된 것이라 으쓱하게 되어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일을 기피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전과 같이 로젤린을 따르겠노라 자청했다. 임무를 제외한 시간을 그녀를 위해 쓰겠다고 얘기했고, 로젤린은 기뻐서 펄쩍 뛰며 그들을 한 번씩 안아 주었다. 몇 달 되지도 않은 인연의 끈이 질기기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발전했지만 부족한 부분도 많으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해 보도록 하죠, 우리.”

두 사람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섬칫한 기운에 잠시 몸을 떨었다. 살짝 미친 짓 하는 것 같은 기분이지만…… 괘, 괜찮겠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소리 없이 시선을 주고받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로젤린의 편의를 돌볼 것이라 해도,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수습 기사가 더 필요하긴 했다. 레이몬드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수습 기사들이 단련하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승급한 수습 기사들보다 새로 들어온 자들이 훨씬 많다더니, 너른 연무장이 꽉 찰 정도였다. 아직은 어린 티가 나는 자들이 기사랍시고 등을 꼿꼿이 한 채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와 로젤린을 맞이했다. 대부분의 시선은 로젤린에게 쏠려 있었다.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연무장이 우렁차게 울렸다. 레이몬드가 피식 웃었다. 황제 폐하가 와도 저 정도의 목소리는 아니겠다 싶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그대들에게. 편하게들 쉬도록 해. 로젤린 경의 수습 기사가 될 만한 인재가 있는지 둘러 볼 뿐이니.”

편하게 쉬라는 레이몬드의 말은 그들의 반대쪽 귀로 흘러 사라졌다.

‘로젤린 경의 수습 기사가 될 만한 인재?’

다들 잠시간 술렁이다 야욕이 넘치는 표정을 하고는 멋진 폼으로 검을 휘둘렀다. 너무 예상한 반응이라 웃겼다. 레이몬드는 혼자서 흐흐흥 소리 내어 웃었다. 귀엽게 놀기는, 병아리들.

선망, 존경, 호기심, 탐구.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시선들이 로젤린을 떠돌았다. 로젤린은 햇빛을 받아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나른하게 서 있었다. 사람들이 열의에 가득 차서 검을 휘두르건,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무슨 짓을 하건 관심 없어 보이는 모양새였다.

“근데 레이몬드.”

“왜 로젤린. 아, 쟤 봐라, 옷 벗는다. 너한테 복근을 보여 주려는 모양인데.”

레이몬드가 가리킨 남자는 아직 성장 중이긴 하지만 제법 잘생긴 축에 속하는 수습 기사였다. 은근한 눈빛을 하며 윗옷을 천천히 벗어 재끼는데, 마을 처녀들이라면 꺅꺅 소리 지르며 볼 만한 몸매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젤린은 마을 처녀가 아니었고, 이 직장은 갑옷 같은 근육을 가진 자들이 돌멩이보다 흔한 곳이었다. 수습 기사의 몸은 마치 두부 같아 보일 정도의.

“지원서 안 받았잖아. 나한테 지원한 애들 모아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저 정도 복근이라면…….”

로젤린은 제복을 슬쩍 까서 제 배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것이 더 훌륭해. 레이몬드가 식겁해서 그녀의 제복 상의를 얼른 내렸다.

“로, 로, 로젤린! 밖에서 그러면 안 돼!”

“쟤는 윗옷 아예 벗었잖아.”

레이몬드는 저놈이 잘못한 거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거기 너! 어디서 기사가 단정하지 못하게 옷을 벗어! 일주일 근신이다!”

근육을 자랑하던 수습 기사는 축 쳐져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아, 나도 안 되고 쟤도 안 되는 거였어? 합리적인 결말에 로젤린은 수긍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레이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어디까지 했더라.”

“지원서.”

“아, 그래. 지원서. 그건 딱히 안 받아도 될 것 같아서. 다들 네 수습 기사가 되기만을 바라고 있을걸? 지금 네가 얼마나 유명한지 모르는구나?”

“내가 유명해?”

로젤린이 눈을 동글동글하게 뜨고 올려봤다. 레이몬드가 흐흐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와락 안아 어깨동무했다.

“그럼. 멋지게 리카르디스 전하를 구한 강한 기사 로젤린! 다들 널 좋아하고 존경하니까. 적당히 보고 너…… 내 수습 기사가 되어라…… 하면 다들 황송해하면서 네 발밑에 몸을 던질 거야.”

로젤린은 다들 자신을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대목에서 크게 감명 받은 눈치였다. 예전에 레이몬드에게서 “너…… 친구…… 나밖에 없다?”는 말을 들은 게 충격이었던 만큼 기쁜 듯했다.

로젤린은 주위를 쭉 둘러봤다. 여자 기사, 남자 기사 할 것 없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쩐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생각나는 눈동자들이었다. 로젤린은 히죽 웃었다.

“기분 최고야.”

레이몬드도 그녀와 마주 보며 와하하 웃었다. 우리 로젤린 인기 많은데? 대단한데? 하고 빤히 보이는 식으로 추켜세워 줘도 굉장히 으쓱해했다.

두 사람은 연무장을 한참을 더 돌아다녔다. 레이몬드는 검을 휘두르는 수습 기사들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고, 로젤린은 수습 기사들과 일 대 다수의 대련을 했다. 그녀와 대련하던 수습 기사들 중 세 명이 기절해서 실려 나간 이후, 로젤린은 검술의 시범만 보였다. 부단장의 부관과 유명한 상급 기사가 지도해 주니 다들 의욕이 충만해서 열심히 배우려 했다.

눈치 보며 머뭇거리던 수습 기사들도,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마카롱이 내려오는 것을 기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로젤린 경의 유명한 애완동물, 마카롱 경이 아닌가!

“와, 마카롱 경!”

“진짜 크다!”

“멋있어!”

“독수리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입니다!”

마카롱은 고개를 하늘 쪽으로 뻗는다던가, 날개를 한쪽을 슥 들어 준다던가 하는 식으로 수습 기사들에게 멋진 자태를 뽐냈다. 주인이나 애완동물이나 참 사람 좋아하는 애들이야……. 레이몬드는 흐릿하게 웃었다.

너른 연무장을 꽉 채우던 수습 기사들은 로젤린과 레이몬드의 근처에서 웃고 떠들었다. 그 때문에, 홀로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는 소년이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몰랐다. 마카롱의 날개깃을 쓰다듬던 로젤린도 소년의 존재를 눈치챘다. 산딸기로 만든 와인과 비슷한 예쁜 머리색을 가진 소년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화들짝 몸을 떨었다. 열렬하게 쳐다볼 때는 언제고, 그 적나라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알아챈 로젤린이 도리어 놀랍다는 듯, 어린 얼굴에 경외가 서려 있었다. 소년이 머뭇거리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묵례했다. 로젤린이 눈을 깜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니까, 만지기 전에는 마카롱 경, 만지는 걸 허가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물은 다음에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만져야 된다고…… 어허어 마카롱 경! 그러면 못써! 후배들의 실수는 사랑으로 감싸 줘야지!”

레이몬드는 수습 기사 한 명을 공격하는 마카롱을 말리던 중 로젤린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 방향을 따라가니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 보였다.

“왜 그래, 로젤린.”

“쟤는 이름이 뭐야?”

아무리 하얀밤 기사단을 관리하는 자 중 한 명이라지만, 그 수많은 수습 기사들의 이름을 전부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몬드는 소년의 이름을 바로 떠올려 냈다.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들어온 애들 중 몇 안 되는 뿌리 출신의 헤사. 검술은 좀…… 많이 약하지만 박투에서는 두각을 보이더라고. 기본적인 전투 감각이 뛰어나서 선발됐어.”

수습 기사, 헤사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나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한 송이 들꽃이 들려 있었다. 수많은 수습 기사들을 헤치고 그녀의 앞에 선 소년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소년이 고개를 푹 숙이고 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귀 끝이 발개져 있었다.

“이 꽃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로젤린 경?”

레이몬드는 당황했다. 이렇게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뇌물을 바치다니, 배짱이 대단한 놈이 아닌가!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년이 건넨 꽃을 받았다.

꽃 줄기가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자 헤사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귀 끝부터 퍼져 나간 붉은 기운이 온 얼굴을 물들였다. 소년은 불에 덴 것처럼 허둥지둥, 몸 둘 바 몰라 하다가 곧 결의에 찬 눈동자로 로젤린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로젤린의 얼굴에 미묘한 이채가 떠올랐다. 동시에 레이몬드의 팔 위에 앉아 있던 마카롱도 헤사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소년의 몸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장박동과 함께 세차게 마력이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로젤린이 최근 수없이 겪었던 검은달의 마력처럼 검붉고, 난폭하게 변질된 것이 아니었다. 색으로 친다면 순수한 검정. 티 하나 없는 완벽한 암흑. 고요한 힘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소년이 가진 마력은 로젤린의 것과 흡사했다.

로젤린의 떠나지 않는 시선에 헤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의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수습 기사들의 지도 및, 마카롱 경이 멋진 자태를 뽐내던 상황을 가르며 들어온 꽃 한 송이의 파급력이었다. 이 이상하고도 어색한 기류라니. 심지어는 헤사를 바라보는 수습 기사들의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지고 있었다. 레이몬드가 슬쩍 눈치 보다가 연극하는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로, 로젤린 우리 이제 슬슬 돌아갈까? 수습생들은 다음에 둘러보고?”

아, 수습생. 그러고 보니 수습 기사를 뽑으러 온 거였지. 로젤린은 본래의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헤사를 향했다. 레이몬드가 다들 네 수습 기사가 되기만을 바랄 것이라며, 지원서 따위는 필요 없으니 그냥 적당히 고르기만 하라고 했었다.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몬드는 돌아가자는 제 말에 그녀가 답한 줄 알고 반색했지만, 로젤린은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고,

“너, 내 수습 기사가 되어라.”

라고 말했다. 백 명에 달하는 수습 기사들이 있는 거대한 연무장에는 바람이 지나는 소리만 흘렀다. 바보같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헤사가 로젤린이 말한 한참 뒤에 화들짝 놀라더니 입을 가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