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어떻게 뒷감당하려고 저러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저 배짱 두둑한 대신관의 안위가 염려되었다. 그는 제국의 2황자라는 지위 때문에 갖은 행사에 불려 다니는 몸이었다. 신성 제국의 특성상 행사는 신전이 엮여 있는 경우가 많았고, 그만큼 지루한 설교 시간 또한 많이 접해 보았다. 그래서 잘 알고 있었다.
이델라브힘의 뜻을 따르고 그의 축복을 세상에 나누어 주는 것이 신관이었으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영광은 이델라브힘보다 일라베니아의 황제에게 더 치우쳐 있었다.
신성 제국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위대한 신. 그러나 그 신에게 선택받은 황제가 더 위대하다. 신은 멀리 있고. 인간인 황제는 가까이 있다. 이델라브힘의 영광을 교묘하게 인간인 황제에게 돌아가게끔 교육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정반대로 일라베니아의 위업을 대폭 줄이다 못해 거의 삭제해 버리기까지 했으니. 누군가가 이 설교를 문제 삼는다면 라헤안시에게도 큰 타격이 갈 것이다.
“일라베니아 제국력 589년. 대신관 라헤안시가 자비로우신 이델라브힘을 대신하여 그대들을 축복하는 바. 헐벗은 자에게 벗어 주고 굶주린 자에게 제 먹을 것을 내어 주란 말은 안 할 테니 나쁜 짓 하지 말고 건강하라. 이상 땡땡 끝이다. 자, 해산!”
라헤안시는 대충 손을 저으며 설교를 끝냈다. 그리고는 목이 타는지 평신관이 들고 있던 접시의 성수를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졸지에 빈 접시를 들고 있게 된 신관의 표정이 볼 만했다.
“아, 아차. 맞다 맞다. 이 항아리에 내 축복을 담은 물이 있으니 한 모금씩 먹고 돌아가거라. 만병통치는 아니지만 감기 정도는 낫게 해 줄 터이니. 어허, 새치기하는 나쁜 아이에게는 줄 수 없다.”
단상을 쭉 둘러싼 큰 항아리들에 그런 비밀이 있을 줄이야. 사람들은 설교가 끝났음에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성수라는 말에 눈망울을 반짝였다.
신관과 성 기사들의 무서운 눈빛 아래, 사람들은 차례대로 줄을 서서 성수를 마셨다. 신전에 헌금을 어지간하게 많이 내지 않는 이상에야 성수는 쳐다볼 수도 없는 귀한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집안에 아픈 사람들을 데리러 가는지 분주하게 광장을 빠져나갔다.
기사들은 짧지만 폭풍 같았던 설교를 반추하며 입을 여전히 다물지 못했다.
“괴, 굉장해.”
그 굉장하다는 말이 과연 좋은 쪽에 속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리카르디스는 그의 말에 동감했다. 굉장한 미친놈이었다.
하지만 단상을 둘러싼 저 수많은 항아리들.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와 엘피디오 다음으로 성력이 강한 편이었으나, 저 항아리들을 모두 성수로 채울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몇 주동안 꼬박꼬박 만들고 모아 둔 것이 아닐까. 세상만사를 귀찮아하는 태도에 비하면 만민을 굽어 살피는 훌륭한 신관의 자세가 아닌가. 리카르디스는 피식 웃고는 광장을 떠났다.
거리의 사람들은 성수를 먹었느니, 안 먹었느니. 그림자 없는 밤이 무엇인지 아느냐며 와와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축제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잠시 사라졌던 로젤린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성수를 먹어 보고 왔다고 얘기했다. 특별한 맛을 기대한 것 같은데, 그냥 시원하고 맛있는 물이었다며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로젤린은 길을 잃은 전적이 있었던 터라, 또 자리를 함부로 비웠다고 혼났다.
‘아니 근데…… 성수를 먹어?’
먹어도 되는 거야? 리카르디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사절단이 일라베니아로 돌아오는 길. 리카르디스는 ‘파편’에 중독되고 큰 부상을 입었던 로젤린을 치료할 때 한계까지 성력을 쏟아부었었다. 그때야 그저 로젤린의 정체를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고, 정확히 아는 게 없어 뭐라도 해 보자는 마음이었으나…….
생각해 보니 돕기는커녕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성력과 마력이 간섭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그 불안정한 상태에 다른 종류의 힘이 들어갔을 때의 작용은 알지 못했다. 무지가 해악은 아니나, 다소 위험을 동반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로즈. 잠시만 손을…….”
리카르디스가 손을 내밀자 로젤린이 그 위로 손을 탁 얹었다. 커다란 개가 손을 불쑥 내미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리카르디스는 곧 정신을 차리고 본 목적으로 돌아가 성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제 힘을 가르며 들어오는 성력을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몸을 떠돌던 성력은 중간중간 어떤 힘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리카르디스는 그것이 마력일 것이라 추측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완전히 분리되어 있던 성력이 로젤린에게 조금 스며들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낮은 수준으로 흡수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그녀 또한 성력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이는 몸으로 변화를 한 것 같았다.
마력과 성력의 만남은 아주 기묘했다. 물과 기름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섞이지 않는 성질이지만, 서로에게 결코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 객관적인 사실이 아직까지는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못한 존재였다. 일반적인의 상식을 온전히 기대하기에는 불안한 부분이 많았다. 정보가 필요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힘. 성력과 마력의 표면적인 부분이 아니라 조금 더 깊이.
리카르디스는 성력과 마력을 연구하는 기관의 이름을 아주 잘 알았다. 그 기관의 이름은 신전이며, 연구자들은 신관이다. 그리고 대신전은 그 모든 정보들이 총망라된 집합체다. 대신관이라면 아마 황태자 위에 오르지도 못한 황자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라헤안시…….’
조만간 그를 찾아가 봐야겠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는 로젤린의 손을 꼭 잡았다.
“……길을 또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는 굉장히 현실감 있는 변명을 하며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그의 옆에 바싹 붙어 걷다가 잡혀 있는 손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살폈다.
“도련님의 손은 굉장히 크네요. 멋있습니다. 손가락도 길고.”
로젤린이 잡혀 있지 않은 손으로 리카르디스의 손등과 손가락을 덧그리듯 톡톡 두드렸다. 리카르디스의 귀 끝이 빨개졌다. 이후에 후드 자락을 슬쩍 들어 손에서 이어지는 팔목 라인을 은근히 과시하는데 르원은 차마 그 광경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했다.
모두 천천히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중, 눈치 없는 파르파르가 “다들 이렇게 느려서 호위하겠어?”라는 망발을 내뱉었다. 파르파르는 하니에게 매우 혼났다. 육지로 올라왔으면 좀 인간 흉내라도 내란다. 언제까지 고래로 살 거야! 이어서 루루가 너무 진심으로 화내서 파르파르는 굉장히 시무룩해져 버렸다.
* * *
로젤린이 레이몬드와 가벼운 티타임을 가지고 있던 때였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방을 찾아와 머뭇거리다 털어놓았다.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번갈아 보다 환하게 웃었다.
“아, 정말 축하합니다. 정말 잘됐군요. 수고 많았습니다, 정말.”
‘정말’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한 엄청난 축하였다. 전(前) 수습 기사들은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아 냈다. 에버하르트는 너무 울어서 말도 못할 정도였고, 레티시아도 마찬가지로 엉엉 울며 로젤린을 얼싸안았다. 에버하르트도 은근슬쩍 안기려고 했지만, 레티시아가 그의 발을 거세게 밟아 무산시켰다.
발타에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만큼 공석도 늘어났다. 제국의 2황자라는 지고한 신분이기에, 애도의 시간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영지에 있는 동안 추모식과 승단식이 모두 끝났다.
슬픈 일이 있었지만 기쁜 일도 있었다. 몇 년째 수습 기사에서 머무르던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가 드디어 승급한 것이다.
하급 기사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만 했다. 기본적인 지식과 예법 등의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숙사에서 받는 벌점이 기준보다 낮아야 하는 것 또한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검술 실력이었다. 기초적인 체력 검사, 평소 검술 교관의 평가와 수습 기사들끼리의 대무까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그 까다로운 승단 심사를 통과한 것이다.
로젤린 대신 그 승급 심사를 지켜본 레이몬드의 말에 따르면 에버하르트는 마치 다람쥐같이, 레티시아는 마치 표범같이 상대의 공격을 피해 냈다고 한다. 어찌나 날랜 솜씨인지 부단장 나단 경이 눈여겨볼 정도였다고.
“저는 공격을 피하는 능력만 좋아졌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글쎄 상대방의 공격이 다 보이지 뭡니까. 로젤린 경이 저희들을 보는 기분이 그랬을까요?”
에버하르트는 로젤린이 “네.” 하고 정직한 대답을 해도 바보처럼 웃었다. 정식 단원이 되었으며, 또한 봉급도 받고 이름뿐이지만 작위도 하사받았다.
뿌리 출신인 에버하르트는 더욱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레티시아도 가난한 영지의 아가씨였던 터라, 봉급의 얘기를 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동생들에게 괜찮은 드레스를 선물해 줄 수 있을 것이라며. 정작 그 여동생들은 드레스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모양이지만, 언니 마음은 또 다른 듯했다.
로젤린은 수습 기사들을 받아들인 이후 곧바로 제작했었던 검 두 자루를 그들에게 선물했다. 승급한 수습 기사들에게 스승인 상급 기사가 검을 선물하는 것이 관례라는 레이몬드의 조언을 따른 것이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멍한 얼굴로 받은 검을 더듬었다. 레티시아가 검을 들어 허공을 천천히 그었다. 그녀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돌았다.
유명한 장인이 그들이 선호하는 검의 형태와 무게, 손의 크기까지 고려해 만든, 세상에 둘도 없는 검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고려하는 세심함은 로젤린이 아닌 레이몬드의 결과물이었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저 스승의 은혜에 가슴이 사무쳤는지 눈물을 재차 쏟아 낼 뿐이었다. 눈알이 흐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울어서 로젤린은 매우 당황했다. 기쁜데 왜 울지. 우는 그들을 붙잡고 물어봤더니 너무 기쁘면 눈물도 나온다며 에버하르트가 필담으로 알려 줬다.
아, 그래 에버하르트와 레티시아는 그럼 매우 기쁜 거로군요. 로젤린은 흡족해하며 눈물을 더 흘리라고 권유했다. 우십시오. 더 우세요. 마음껏.
그 눈물의 현장 뒤에서 레이몬드가 머뭇거리며 “그, 그 검 말이야, 그거 내가…….” 하고 말하려 했지만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의 엉엉 우는 소리에 묻혔다. 그 뒤에도 “내가, 그걸!”이라든가, “그 장인에게 아무나 부탁 못하는데 말이야……!” 따위의 시도가 있었으나 역시나 두 하급 기사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이몬드는 결국 시무룩한 얼굴로 차만 홀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