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로젤린은 디에즈와 헤어진 후 곧바로 대광장에 왔다. 광장에도 먹을 것을 파는 상점과 가판대가 즐비해 있었다. 로젤린은 디에즈의 걱정 그대로 노점 음식에 눈을 빼앗겼다.
리카르디스 및 동료들과의 재회는 그렇게 멀어지는 듯 보였으나, 그녀의 생태를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던 리카르디스 덕에 그녀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상급 기사들을 줄이 가장 길게 서 있는 음식 상점마다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 로젤린이 ‘줄을 선 집’을 ‘맛집’으로 동일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리카르디스는 알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고기 맛집 앞에서 로젤린은 파르딕트에게 딱 걸려서 잡혀 왔고, 모두에게 둘러싸여 혼났다.
“로즈!”
파르딕트가 허리에 손을 얹고 왁 소리를 질렀다.
“전…… 도련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이 녀석!”
로젤린은 입만 쭉 빼고 툴툴거렸다. 잘못한 것은 있으니.
“주인 잃은 개마냥 어찌나 불안해하시는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어!”
부적절한 표현 때문에 파르딕트는 르원에게 걷어 차였다. 리카르디스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아, 자는 건가 싶을 정도의 평온한 얼굴이었음에도 로젤린은 힐끔힐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다친 곳은?”
몰래 훔쳐보던 중 리카르디스가 갑작스럽게 얘기를 꺼내서 로젤린은 화들짝 놀랐다. 곧 그가 말한 내용을 반추한 그녀의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서렸다.
‘분명 혼날 때인데……?’
생각보다 목소리가 담담했다.
“……없습니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뜨고 로젤린에게 다가왔다. 그보다도 키가 큰 사내들이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위협했을 적에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 그녀에게 밀려왔다. 혼난다! 완전 혼난다!
“……그 의심의 눈빛은 뭘까. 아무튼 다친 곳이 없다니 그건 다행이군.”
앗, 오늘의 전하는 굉장히 상냥하다! 로젤린은 풀 죽었던 강아지의 탈을 벗어 던지고 방긋 웃었다.
“그렇다면 로즈. 헤어진 사이에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전투를 벌였거나, 혹은 치안대가 주목할 만한 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나?”
싸움 직전까지는 갔지만, 직접적으로는 싸우지 않았으니까…… 말 안 해도 되는 게 아닐까!
“없습니다!”
활기찬 대답에 리카르디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천천히 뒤로 젖혔다.
‘진짜로 없기는 한 것 같군…….’
리카르디스는 로젤린과 떨어진 이후 곧바로 대광장에 왔다. 떨어져 있는 내내 그는 눈을 뜨고도 악몽에 시달렸다. 로젤린이 소동을 일으키거나, 혹은 사건에 말려들거나, 또는 치안대를 패는 장면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상상 속 로젤린이 일으킨 여러 가지 사건의 공통된 점은, 마지막은 항상 그녀가 감옥 안에 갇힌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수를 헤아려 놓아야 실제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으므로, 로젤린은 그의 머릿속에서 세 번쯤 반역자가 되었고, 다섯 번쯤 감옥을 부수고 탈옥했다.
눈앞에서 히히 웃고 있는 로젤린을 보니 그제야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가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고 로젤린을 혼내기 시작했다.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놓쳐? 그것도 먹을 거 때문에? 내가 음식만도 못하나? 나야, 먹을 거야! 하며 그녀를 들들 볶아 댔다.
그렇지만 파나 채소가 끼워져 있지 않은, 고기만으로 이루어진 대왕 꼬치가 그녀를 현혹시킨 주범이었다는 사실을 들은 리카르디스는 “아, 그건 확실히…….”라는 반응을 보였다. 고양이 나무에 취해 버린 고양이처럼, 꽃에게 날아가는 나비처럼 홀렸으리라. 그쯤 되면 한눈을 판다기보다는 본능의 영역이 아닐까.
시무룩한 로젤린이 과일주를 마시고 다시 활기를 되찾았을 때였다. 떠들썩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대광장의 정중앙, 설치된 단상 위에 하얀 예복을 입은 남자가 올라왔다. 옷의 차림새와 목걸이의 모양이 남자의 지위를 나타내고 있었다. 대륙에 단 일곱 명밖에 없는 대신관 중 한 명이었다.
머리를 단정히 묶거나 깔끔하게 정리한 타 신관들과는 겉모습부터가 좀 달랐다. 등불로 인해 금발같이 보이는 옅은 분홍색 곱슬머리는 부스스하게 자연스럽게 풀려 있었다. 헐렁해 보이기도, 거꾸로 입은 것 같기도 한 엉망인 옷매무새 때문에 그가 입고 있는 것이 예복인지 하얀 커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대신관은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성전을 뒤적였다. 덕분에 모자도 더 삐뚤어졌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나이 든 사람처럼 느릿했다. 하지만 환한 단상 위의 대신관은 스무 살이나 겨우 채웠을까 싶을 정도로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신관이 되기 위해서는 성력의 양도 중요했지만, 신의 믿음 아래 얼마나 오래 수련했는지 또한 무시할 만한 항목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 젊은 대신관은 아주 어릴 때 신전에 들어갔거나, 또는 세월을 무시할 만큼 뒷배가 단단하다는 얘기였다.
로젤린을 제외한 일행들은 모두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라헤안시 대신관님이 설교를 맡으신 모양이군요.”
설원의 월계수. 그 이름을 버린 일라베니아 신성 제국의 4황자. 라헤안시였다.
하얀 밤과 관련된 국가 행사에는 항상 대신관들이 참가했다. 올해의 ‘그림자 없는 밤’은 라헤안시가 맡은 모양이었다. 황자 출신의 대신관이라지만, 늙은 대신관들의 압박을 피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성전 글귀를 읽어 주는 것이나,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 역시 신관의 일이었다. 하지만 귀족들과 달리 평민들에게는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글을 모르니 성전을 줘도 소용없고, 내용도 이해 못하니 풀어 설명해 줘야 했다. 주머니에 은근슬쩍 찔러 주는 금은보화도 없으니, 이런 곳에 기꺼이 오겠다 하는 대신관이 있을 리가.
항상 인상을 찌푸리거나 귀찮아하는 표정을 숨길 시늉도 안하는 신관들을 보아 온 탓인지, 사람들은 라헤안시의 한껏 풀어진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귀한 대신관이 거리에 온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다는 기색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누구에게든 저놈은 원래 나무늘보 같은 인간이라며 설명하고 싶었다. 도통 그럴 방도가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공적인 자리에서만이라도 빠릿빠릿하게 굴면 안 되는 건가?’
라헤안시가 한쪽 손을 들었다. 조용하던 군중들이 한층 더 숨을 죽였다.
“어허어 보자 보자, 보름달이 일라베니아의 성 끝에 걸렸으니 이로써 그림자 없는 밤이 찾아왔도다, 백성들이여.”
리카르디스가 눈을 찡그렸다.
“……말투가 왜 저 따위지?”
리카르디스의 싸늘한 반응과 다르게, 광장의 사람들은 “오오……!” 하는 작은 함성과 함께 모두 무릎을 꿇었다. 리카르디스와 기사들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굴욕적이었다.
“태초에 혼돈, 크레안 티다니온의 암흑만이 세상을 메우고 있어 풀 쪼가리 하나 자라지 못했노니, 그 혼돈을 물러 내고 빛을 가져온 자가…… 누구?”
라헤안시는 성전을 대충 읽다가 귀 뒤에 손을 가져다 대며,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태도를 보였다. 마치 대답을 촉구하는 모양새 때문에 광장이 술렁였다. 매년 있는 그림자 없는 밤이지만 이런 설교는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망설이는 게 보이자 라헤안시가 다시 “외쳐 봐, 누구!” 하고 얘기했다. 군중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떠듬떠듬 이, 이델라브힘……. 하고 얘기했다.
“안 들리는구나 더 크게! 누구라고!”
“이델라브힘!”
“그렇다 이델라브힘이시다. 맨 처음 대답한 소녀여. 아주 영특하구나 상으로 성전을 주겠다. 금박이 붙어 있으니 갖다 팔면 돈이 꽤나 될 것이다.”
라헤안시의 뒤로 성수를 들고 있던 평신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자세히 보니 관자놀이가 씰룩거리고 있었는데, 여간 골치가 아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단상과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소녀는 성전을 건네받고는 어리둥절하다는 듯 눈동자만 굴렸다. 정말로 넘길 줄이야. 리카르디스는 차가운 눈으로 그 광경을 봤다. 미친놈…….
“이델라브힘께서 빛의 권능으로 크레안 티다니온의 암흑을 걷어 내자, 비로소 세상이 보였나니. 세상이 이델라브힘의 빛을 보았노니. 이 영광을 누구에게 돌려야 마땅하겠느냐?”
“이델라브힘!”
“그렇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구나, 백성들이여. 심각하게 똑똑하니 내 마음이 심히 흡족하도다.”
다들 입을 모아 이델라브힘의 이름을 외치는 광경이 아주 장관이었다. 라헤안시는 보슬보슬한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계속 말했다.
“그러나 크레안 티다니온도 원래의 세계를 가지고 있던 강력한 신이다. 이델라브힘과 크레안 티다니온은 사흘 밤낮을…… 아, 이 사흘 밤낮은 그저 표현상으로 집어넣은 말이니 괘념치 말라. 여하튼 그렇게 싸우고 싸웠으나 이 신들의 전쟁은 완벽한 승자와 완벽한 패자가 없이 끝나고 말았으니……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낮과 밤이다. 이델라브힘이 관장하는 낮과 혼돈의 장막이 덮이는 크레안 티다니온의 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인 것이다.”
신관들이 외워서 읽어 주는 문구들은 그들이 아는 단어로만 이루어져 어렵기 마련이었다. 글자를 좀 알고 배운 자들도 골머리를 썩어 가며 해석해야 하는 것이 성전인데, 라헤안시의 얘기들은 다소 약장수 같고 불경한 감이 있지만 귀에 쏙쏙 들어왔다. 다른 대신관과 황족들이 알면 기함하기는 할 테지만.
“그렇다면 매년 찾아오는 그림자 없는 밤이 무어냐! 그것은 우리의 이델라브힘께서 최초로 밤을 빼앗은 날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힘. 성력이 극으로 치닫는 날, 밤의 장막은 사라지고, 온 세상이 축복의 빛으로 뒤덮이노니. 만물이 소생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성전에는 이 축복의 밤은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이해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신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라 되어 있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은 그 방증이라 한다. 으음 뭐…… 솔직히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평신관들이 또 뒤에서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잘나가다가 꼭 한마디를 덧붙여서…….
“아무튼 그리하여, 이델라브힘의 축복은 독수리와 함께 뭐, 호수로 내려와서 일라베니아 초대 황제 폐하께 뭐, 그 축복의 밤을 열 수 있는 권능을 주셨나니, 어허…… 이 부분부터는 내가 영 재미가 없어서……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대충 그리 알면 된다. 우리 황제 폐하 만만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