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80화 (80/220)

80화.

‘한 사람당 한 방씩이면…… 기절시키거나 다리를…….’

머릿속으로 살벌한 생각을 하며 로젤린은 거리를 쟀다.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 가판대 상인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이 좋은 날, 불행해질 여자의 미래가 빤히 보였다.

열 명이 넘는 남자들이 로젤린을 넓게 둘러쌌다.

그들 중 하나가 자신이 가진 목소리보다 더 낮게, 위협적으로 “이봐, 아가씨.”라고 말하기 바로 직전.

“거기 잠깐.”

저 멀리서 로젤린을 둘러싼 무리를 향해 누군가 말을 꺼냈다. 남자들이 뒤를 돌아봤다. 로젤린도 고개를 돌려 이 긴박한 상황을 깨트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남자였다.

로젤린은 곰곰이 남자의 목소리를 반추했다.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데…….

“그쪽은 내 일행인데.”

남자들이 코웃음을 쳤다.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이쪽이 댁의 일행이라고 우리가 얌전히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나?”

남자는 무리의 대장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 멈춰 섰다.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는 눈부터 코까지 덮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있지.”

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무거웠고, 베일 듯 서늘했다. 그제야 로젤린은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챘다. 목소리는 같았지만, 평소와 분위기가 너무 달라 잠시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 편이 너희들에게도 좋을 거라.”

가면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을 보고 남자들이 움칠 몸을 떨며 몇 걸음 물러섰다. 머리가 세모난 검은 뱀이 그려진 가면. 남자가 말한 대로 건드려서 하등 좋을 게 없다는 뜻의 표식이었다.

서쪽 암흑가를 지배하는 큰손, 검은독사의 문양이었다. 남자가 그 문양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은 검은독사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건드렸다가는 피를 볼 게 분명했다.

남자들이 다급한 손놀림으로 검을 집어넣었다.

“아, 아이고. 저희가 귀한 분인 줄도 몰라 뵙고…… 하여간 거리가 너무 어두워서 헤헤…… 제가 항상 등불 좀 많이 걸어놓자고 건의를 하는데도, 참…… 사람들이 그러면 다른 거리랑 차별화가 안 된다고 그러지 뭡니까…….”

“내가 너희들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남자들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슬슬 멀어졌다.

로젤린이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물약을 파는 상인의 가판대에 내려놓았다.

“이 패의 주인에게 전해라. 거리의 들쥐 때문에 내 기분이 몹시…… 상했다고.”

검은 독사가 그려져 있는 패와, 질 좋아 보이는 보석이었다. 상인은 화들짝 놀라며 그걸 소중히 품 안에 넣고 가판대를 버려 둔 채 어느 골목 구석으로 사라졌다.

방금 사라진 놈들을 잡아 족치라는 말이었으나, 로젤린은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로젤린의 앞에 멈춰 섰다. 한참 망설이던 그가 로젤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도 로젤린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았다. 커다란 손은 따뜻했다. 맞닿은 온기에 로젤린의 몸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그녀는 만약 자신이 남자의 정체를 몰랐다 하더라도 이 손을 뿌리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말없이 골목을 걸었다. 반쯤 무너진 판잣집과 안쪽이 보이지 않는 가게들이 늘어선 곳이었다. 그 수많은 공간에서 음습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시선은 로젤린 그녀를 향하기도, 남자를 향하기도 했다.

어두운 밤. 어두운 골목. 뚝, 뚝……. 어디선가 물이 떨어져 고이는 소리. 퀴퀴한 곰팡이 냄새, 주위를 맴도는 시선까지.

로젤린은 갑작스럽게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숨이 거칠게 일어나고, 신경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만이 만드는 걸음 소리가 마구 불어나 뒤따라오는 기분이었다.

아까의 남자들이 쫓아온 것인가? 로젤린은 주의를 기울여 골목골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에 집중했으나, 여전히 두 사람의 걸음 소리 뿐이었다. 로젤린은 마력을 사용해 청각을 강화했다. 작은 촛불이 아롱거리는 수십 개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속삭였다. 저들은, 저 남자는. 오래된 손님이. 여자를 건드려서는, 정체는? 사람들이 로젤린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여러 말이 겹쳐져 온전한 문장을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 두루뭉술한 언어들이 뾰족하게 날카로운 형태를 띠고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남자가 작게 속삭였다.

“걱정 마요.”

서릿발 같던 아까와 달리, 다정한 목소리였다. 마치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안다는 듯. 남자가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아프지는 않았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쫓아오지 않고.”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누구도 당신을 위협할 수 없으니.”

온기가 묻어 있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로젤린은 제 안에서 서서히 조여 오던 기묘한 감각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가시처럼 곤두서 있던 신경과 거칠어졌던 심장박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로젤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웃고 있던 남자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남자는 잡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려 로젤린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딱히 기분 나쁠 것도 없어서 로젤린은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았다. 남자가 곤란하다는 듯 웃고는 다시 걸었다.

남자는 지리를 잘 알고 있는지 로젤린이 한참 헤맨 복잡한 거리를 금세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어두운 골목의 끝과 밝은 거리가 만나는 곳에 잠시 멈춰 섰다. 한 걸음 밖에, 로젤린이 찾고 있던 축제의 등불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가 가면을 벗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둠에 잠겨 있던 황금색 눈동자가 본연의 빛을 되찾았다.

“저는 일이 있어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것 같네요. 오늘 이곳에서 만난 건 비밀로 해 줄래요?”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에게 혼나기 전에 디에즈와 만났다는 화제로 시선을 돌리려 했던 터라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가 대충 로젤린의 속내를 짐작했는지 웃었다.

“길을 잃어버렸었거든요. 창피하니까 비밀이에요.”

길을 잃어버린 또 다른 사람으로서 로젤린은 자신이 창피할 만한 상황에 처해 있었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겠습니다. 비밀.”

디에즈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곰곰이 무언가를 되짚었다. 그는 곧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그녀에게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거기 있었죠?”

언제나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던 사람이었다. 만남부터 지금까지 ‘당신’이라는 호칭을 쓰는 걸 보면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리카르디스 전하도 기사들더러 애칭을 사용하고 그 자신도 도련님 행세를 하지 않았던가. 로젤린은 디에즈 또한 그런 거라 생각하며 그의 이름과 정체를 말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일행을 만나려 사람들에게 물어서 대광장에 가려고 했습니다. 저도 길을 잃었나 봅니다.”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축제 날에 술 취한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어요. 그렇다 쳐도 완전히 다른 방향이긴 하군요. 이 길을 따라가면 곧바로 대광장이 나와요.”

디에즈는 문득 불안했는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누가 말 걸면 따라가지 말고, 한눈팔지 말고 곧장 가세요.”

성을 나올 때에 상급 기사들과 리카르디스, 잇세리온에게 번갈아 가며 들었던 경고 문구였다. 로젤린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드렁한 반응에 그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맛있는 건 일행들 만난 다음에 사 먹고요.”

“네.”

정말 이렇게 믿음이 안 갈 수가!

불안해하는 디에즈를 뒤로하고, 로젤린은 가방 안을 열심히 뒤적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로젤린의 움직임에 따라 아래로 향했다.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사탕, 축제에 여성들이 쓰고 다니는 하얀 레이스 베일, 사냥용 올가미, 아이들 용 나무 단검, 먹다 남은 빵까지. 축제를 즐겨도 너무 즐긴 듯했다.

로젤린은 그 중에서 하얀 레이스 베일을 꺼내 들었다.

“여기요. 선물입니다.”

디에즈는 눈을 크게 뜨고는 베일과 그녀를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선물을 받았다.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디에즈가 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데, 기쁨을 참는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선물을 줬을 때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왜 저에게 이걸…… 주는 겁니까?”

로젤린은 눈알을 굴리다가 의문형으로 대답을 했다.

“잘…… 어울리실거 같아서?”

그냥 딱히 별 이유가 없었기에, 아까의 말을 그대로 답습했다.

“잘 어울리면 아무에게나 선물을 줍니까?”

선물을 줬더니 추궁을 받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웃지도 않고 굉장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로젤린은 당황했다. 어, 왜 선물을 주냐면…… 잘 어울리면 아무에게나 선물을 주냐면…… 그건 아니지만…….

“제가, 당신을 좋아하니까?”

좋아하면 선물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니깐. 로젤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무섭게 추궁할 때는 언제고 대답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하얀 베일을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도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나?

“난…….”

디에즈가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이 무사히 돌아와 기쁩니다.”

만난 지 몇십 분이 지난 지금에 하기는 늦은 감이 있는 데다, 나누던 대화에서 어긋나 생뚱맞기까지 한 말이었다. 하지만 로젤린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저도 당신의 무사한 모습을 봐서 기분이 좋습니다!”

디에즈가 그런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레이스 베일 위로 제 얼굴을 묻었다. 피곤에 지친 사람이 침대에 기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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