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밤이 깊어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졌다. 도련님 주위를 원의 형태로 호위하던 기사들의 간격도 더욱 좁아졌다. 키가 큰 사내들에 의해 앞이 잘 보이지 않자, 로젤린이 종종 헤매었다.
“이런, 이러다 길이라도 잃겠어. 이리와 로즈.”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의 어깨를 끌어 제 곁에 서게 했다. 기사들이 방패막이 되어 걷기가 수월해졌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리카르디스가 걸고 있는 꽃 목걸이의 향기가 진해졌다. 로젤린이 코를 킁킁거리며 꽃향기를 맡기 시작했다. 리카르디스는 제 가슴께에서 떠도는 로젤린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먹어도 된다.”
“네.”
로젤린은 칼릭스에게 배운 대로 이파리를 떼어 내고 꽃술 뒷부분을 머금고 쪽쪽 빨았다. 리카르디스도 그녀를 흉내 내서 연분홍의 꽃을 입에 물었다. 한 방울도 안 되는 달콤함이 꽃 향과 함께 입안에 물씬 풍겼다.
“……오랜만에 해 보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예전에 많이 했었지.”
리카르디스는 그 말을 내뱉으며, 칼릭스가 거리에서 꽃을 물고 다닌 일을 더 이상 놀릴 수 없게 되어 버렸음에 아쉬워했다.
로젤린은 어린아이들이나 살 법한 싸구려 악세사리에 큰 관심을 보였다. 조금이라도 반짝이는 게 보일라치면 멈춰 서니, 이쯤 되면 까마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로젤린은 알록달록한 물건이 무질서하게 올라간 가판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쭈그려 앉아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열성적으로 살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의 옆에 같이 쭈그려 앉았다.
“필요하다면 사 줄테니 몇 개 골라 봐.”
“아니요. 저 돈 많습니다.”
뭐어?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다 삼키지 못해 조금 내뱉어 버렸다. 로젤린은 색이 비슷한 펜던트를 두 개 들고는 열심히 등불에도 비춰 보고 눈에 가까이도 대어 보았다. 그리고는 큰 결심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사겠습니다.”
“어머, 아가씨가 안목이 높으시네!”
“그럼요.”
장사치들이 으레 하는 말에도 로젤린은 뿌듯해했다. 리카르디스도 그녀 옆에 딱 붙어서 칭찬했다.
“예쁜걸. 반짝반짝하고 투명해서.”
“네, 되게 예쁩니다. 도련님 눈동자처럼.”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딱 굳었다. 그는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어, 어 뭐…… 내 눈이 좀…… 보석 같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 그래서…… 산 건가?”
“네, 예뻐서.”
리카르디스의 귀 끝이 붉어졌다. 그가 어색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덮은 후드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오갈 곳 없이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가판대 위의 또 다른 펜던트에 닿았다. 예쁜 페리도트색. 리카르디스는 부끄러워하던 것도 잊고 손을 뻗었다. 그는 옆에서 구경 중이던 로젤린의 얼굴 옆에 펜던트를 딱 붙였다.
“이건 네 눈 색과 비슷하다. 로즈.”
“아, 진짜네요. 예쁩니다. 제 눈도 예쁘니까요.”
로젤린이 상체를 기울이며 리카르디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얼굴과 얼굴이 마주했다. 머리를 덮은 후드의 끝자락이 닿을 정도였다. 축제를 다니는 내내 후드로 가려져 잘 보지 못했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여기저기 달린 등불로 인해 하얀 얼굴은 은은하게 빛났다.
리카르디스는 펜던트의 가짜 보석보다 영롱하게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았다. 가늘게 뜨고 있는 눈가가 떨리고, 눈썹은 찌푸려져 있었다.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리카르디스는 입이 바짝 말라와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래.”
로젤린이 눈을 휘며 웃자 그녀의 눈동자 안에 담겨 있던 등불들이 반짝거렸다. 리카르디스가 얼굴을 붉히고는 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아주 예쁘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로젤린은 용케 알아들었는지 “그렇지요?” 하고 신나 했다.
그리고 기사들은 이 모든 광경을 네 발짝 뒤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니와 루루는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전하…… 가시밭길을…… 걸으시는…… 우리 가엾은 전하…… 그들은 눈물이 고여 반지르르해진 눈으로 자꾸 먼 하늘만 바라봤다. 아래를 봤다가는 뚝뚝 흘릴 것 같았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리카르디스는 지금 로젤린을 단순한 부하로 대하고 있지 않았다. 둘 사이에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도 못한 종류의 감정이 표출되고 있어 기사들은 억 소리도 못 내고 굳어 버렸다.
물론 리카르디스 혼자만의 얘기인 것 같긴 했으나, 그래서 더 문제였다. 리카르디스가, 2황자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가 짝사랑을 한다? 심지어 상대가 로젤린 에스터? 소설로 나와도 허황되다고 욕먹을 판에, 눈앞에서 목격하니 충격이 세 배였다.
거기에다가 화려한 언변은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어린애 소꿉놀이하듯이 이거 예뻐, 저거 예뻐. 이러고 있으니 가슴이 갑갑해지고 숨이 턱턱 막혀 왔다.
하지만 소꿉놀이라도 열심히 해 보겠다는 필사적인 노력이 보였기에 신하된 자로서 기사들은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졌다. 단 한사람을 제외하고.
“로즈! 저기에 맛있는 거 있다!”
파르딕트의 외침에 로젤린이 한 마리의 표범처럼 거리를 달려갔다. 하니가 열 받아서 파르파르의 정강이를 깠다. 루루도 이 고래 새끼…… 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파르파르만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하며 까인 정강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 * *
로젤린은 혼자가 되었다. 대왕 꼬치를 발견해 양손에 떡하니 들고 흡족한 마음에 자랑이라도 할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리카르디스도, 같이 이것저것 잘 사 먹던 파르딕트도, 다른 기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파도같이 밀려들었고, 로젤린도 어어 하며 밀려나 발길이 닿는 대로 이동해야만 했다. 로젤린은 좁은 골목 사이에 몸을 쏙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아는 사람은 없었고,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로젤린은 벽에 기대어 시무룩하게 쭈그려 앉았다. 양손에 들고 있던 대왕 꼬치 두 개가 서서히 식어갔다. 그녀는 침울함에 젖은 얼굴로 우선 꼬치를 먹기로 했다.
후후 불어 베어 먹으니 한 조각만에 입안이 가득 찼다. 소스는 달콤하고 껍질은 타서 살짝 눌어붙은 부분이 있어 고소했다. 먹다 보니 저조했던 기분이 좀 괜찮아진 것도 같았다. 로젤린은 입을 부지런히 놀렸다. 어서 먹고 일행을 찾으러 가야 할 듯했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여기저기 쏘아 다니는, 흥분 상태의 로젤린을 본 리카르디스는 미리 이 사태를 예견했으므로…….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로즈?]
[대광장의 분수 앞에서 기다립니다.]
[훌륭해.]
잃어버렸을 때의 목적지 또한 정해져 있는 상태였다. 대광장의 분수. 로젤린은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목적지를 다시 한 번 되뇌었다.
꼬치를 다 먹은 후 로젤린은 술에 취한 남자가 알려 준 대로 걸어, 대광장에 도착했다.
‘대광장?’
무척이나 클 것 같은 이름에 비해, 좁은 거리가 얼기설기 이어져 있는 공간이었다. 밤인 줄도 모르고 빛나던 여타 거리와 다르게 너무 어두웠다. 마치 이곳만 잠들어 있는 듯.
악기를 연주하고, 행복함에 푹 빠져 노래하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불콰하게 물든 얼굴로 실성한 듯 웃고 있거나, 또는 살벌하게 인상을 구기며 거리에 새로 들어온 인물을 훑어볼 뿐이었다.
‘음, 대광장 아니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이 암흑가의 입구에 들어서기 훨씬 전부터 알았겠지만 로젤린은 이미 중심부까지 들어선 상태였다. 이쯤 오니 로젤린도 모를 수가 없었다. 뱀의 대가리를 자르고 단검에 묻은 피를 날름 핥고 있는 남자는 암만 보아도 축제에 어울리지 않았다.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도 있으니. 그런 곳은 안 들어가는 게 좋아 로즈.]
대충 여기가 나쁜 사람들이 모이는 거리이겠거니 생각한 것이다. 뱀의 피를 핥는 건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냥 느낌이 그랬다. 로젤린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도중, 아까 지나쳤던 가판대에 눈길을 빼앗겼다. 작은 유리병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는데 뭔가 알록달록해 예뻐 보였다.
“이게 뭡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눈썹 한쪽을 추켜세웠다. 그는 로젤린이 거리로 들어 올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몸짓이나, 깔끔한 후드나, 걸음걸이가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아 저절로 눈길이 갔다고 말하는 쪽이 정확했다.
눈이 삐지 않은 이상 잘못 들어올 리 없으니, 아마 새로운 고객쯤 되리라. 하지만 그가 파는 품목 중, 돈깨나 쓸 것 같은 사람이 살 만한 물건은 없었다. 뒷골목에 나도는 것 중에서도 유독 싸구려였기 때문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약이지만 아가씨가 살 만한 약은 아니겠군.”
“맛있는 건가요.”
와 정말로 이 사람은…….
‘완벽하게 잘못 들어왔구나.’
새로운 고객도 아니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속삭였다.
“……얼른 이 거리를 떠나시게. 아가씨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야.”
보름달이 성의 끝에 걸리는 축제 날. 암흑가라 하더라도 아주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었다. 상인이 친절을 발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눈치가 심각하게 없어 보이는 이 아가씨도 축제를 즐기러 나왔을 테니, 부디 불운이 빗겨 나가길 바라며.
그러나 상인의 경고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가 그랬듯이 거리 골목골목에 있는 남자들 또한 로젤린의 ‘맛있는 건가요.’ 발언으로 새로운 인물이 고객이 아님을 완전히 깨달았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약을 담은 유리병을 바라보던 로젤린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거리에 들어올 때부터 따라온 집요한 시선들이 한층 더 날카로워진 것을 눈치챈 것이다.
로젤린은 물건을 구경한다고 어정쩡하게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남자들이 검집에서 무기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전 뱀의 피가 묻어 있던 단검을 핥은 남자도 다가오고 있었다.
사건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지만, 이미 일어나 버린 후였으니. 빨리 정리하는 게 최선이다. 로젤린이 몸 안에서 마력을 대류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