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로젤린만 신났다. 리카르디스는 “그래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군.”이라는 태평한 대답을 하며 불만스러워 하는 잇세리온에게 손짓했다. 준비하란다. 잇세리온은 속을 부글부글 끓이며 옷이며 돈이며 축제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물론, 리카르디스 정도의 신분을 지닌 사람이 고작 호위 한 명만을 대동한 채, 성 밖을 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카르디스의 호위를 책임지는 스타스에게 그 소식이 들어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잇세리온에게 난데없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가 다급히 집무실로 찾아왔다. 무슨 일로 나가시느냐고 물으려던 스타스는 복귀 보고를 까맣게 잊은 채 신나서 희희덕거리는 로젤린을 발견했다.
그는 로젤린을 잠시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왔다. 잠시 후 돌아온 로젤린은 스타스의 뒤에서 시무룩해져 있는 상태였다. 호되게 혼난 모양이었다.
이후, 스타스는 리카르디스로부터 ‘축제에 볼 일이 있어 가 봐야겠다’ 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 로젤린에게 슬쩍 시선을 두었다. 매년 축제마다 소란스럽다며 질색하던 리카르디스가 수배는 시끄러울 게 빤한 거리로 나갈 이유가 짐작된다는 표정이었다. 황자가 기사를 위해 놀러 나가려 한다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타스는 최선의 인선을 위해 골똘히 고민했다.
야간 근무를 맡은 상급 기사 네 명. 파르딕트, 하가넬, 르원, 슈텐.
하급 기사 두 명. 바스티안, 클로드.
총 일곱 명의 호위 인력이 움직였다. 다들 하얀 제복을 벗고 가벼운 셔츠와 튜닉으로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산을 이루고 강을 이루는 축제 거리. 호위도 두 배로 번거로울 것이 뻔했지만, 축제에 간다고 하니 모두들 은근히 즐거워했다.
리카르디스와 로젤린도 옷을 갈아입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복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쪽의 머리색은 밤하늘이고, 다른 한쪽은 아주 달빛 별빛마냥 찬란했다. 심각하다. 심각하게 눈에 띄었다. 잇세리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사람은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나서야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 * *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흥에 취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마차 안까지 실려 왔다. 로젤린이 잽싸게 창에 붙어 바깥을 구경했다. 어두운 밤이 잠시 사라진 듯 모든 공간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여기저기 다양한 색깔의 등불들이 비추는 거리에는 어린아이들도 돌아다녔다. 전국을 떠도는 서커스단이 공연 준비를 하고 있고, 모든 상가들이 한몫 잡기 위해 열심히 호객 행위를 하는 중이었다. 낮부터 쭉 이어진 축제는 밤이 되자 더 북적이기 시작했다. 최초의 하얀 밤과 검은 달이 뜬 날. ‘그림자 없는 밤’을 기리는 축제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마을, 큰 영지 할 것 없이 밝게 빛나며 밤을 몰아냈다. 사람들은 밝은 색의 옷을 입고, 검은색에 가까운 것은 모두 가리거나 깊은 곳에 숨겼다.
리카르디스는 이런 국가 행사에 대해 건조한 태도를 보이는 편이었으나, 마차에서 내린 로젤린을 보고는 거리의 모든 이처럼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저렇게까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니 됐나…….’
로젤린은 그야말로 굉장한 흥분 상태였다. 고개를 좌우로 돌려 가며 삭삭 훑어보는 빠르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코를 움찔거리며 후각에 집중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여기저기서 풍겨 왔다. 배고픈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치명적일 것이다.
“꼬리가 붙었나?”
리카르디스가 르원에게 묻자, 르원이 로젤린을 쳐다봤다. 로젤린이 고개를 좌우로 젓는 걸 확인한 르원이 답했다.
“확인된 바 없습니다.”
“그러면 됐군. 그대들도 조금 느슨해져도 괜찮지 않겠나.”
“전하!”
리카르디스가 인상을 쓰며 파르딕트의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툭 쳤다.
“혹시 설교용 단상이 필요하나, 파르딕트 경? 올라가서 크게 외쳐 보지그래.”
아프지 않긴 했지만 뜨끔은 했다. 확실히 계속해서 전하, 전하아! 하고 목 놓아 부른다면 누구라도 이곳에 귀한 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파르딕트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싼, 누가 보아도 호위 대형을 짜고 있는 그들에게 목소리 낮춰 얘기했다.
“호칭 정리부터 하지. 일단 나는…… 도련님으로 할까.”
“예, 전하!”
“……도련님이라고.”
“예, 도련님!”
다들 약간 모자라긴 한데, 대답은 곧잘 했다. 리카르디스는 기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제복을 벗고 평민의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단련된 두터운 몸과 곧은 자세는 숨겨지지 않았다.
검으로 인한 흉터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으나 불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가 보아도 기사였다. 알맹이가 그대로인데 옷만 바꿔 입으면 뭐하나. 리카르디스는 짜증 어린 목소리로 그들을 질책했다.
“좀 이 거리의 분위기에 맞출 수는 없는 건가?”
기사들은 우물쭈물하며 그의 눈치를 봤다. 고급스럽긴 하지만 돈 많은 평민들이 입을 법한 복식인데 뭐가 문제인 걸까?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본래 평민 출신이었던 르원만 피식 웃었다. 리카르디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대들은 서로 애칭을 부르는 게 좋겠어. 말투도 좀 비격식적으로 바꾸고. 그대들의 분위기가 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일상 속에 무뎌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파르딕트 경부터 시작해.”
“파르파르입니다.”
파르딕트를 제외한 여섯 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로젤린만 멀뚱히 “파르파르.” 하며 입으로 한번 되뇌어 암기했다. 그 다음으로 로젤린이 “……로즈입니다.” 하고 반 박자 늦게 답했다.
딱히 애칭이랄 것도 없고, 이 자리에서 재빠르게 만들어 낼 만한 능력도 그녀에게는 없었다. 로젤린의 어머니인 에델바이스가 부르던 것을 떠올려 입 밖에 내보냈지만, 별로 좋아하는 호칭이 아니라 인상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이후로 하니, 루루, 비스탕, 크림, 슈슈 등의 귀여운 애칭이 건장한 남자들의 입에서 줄줄이 튀어나왔다. 실제로 그들의 어머니가 사용하는 애칭이라는 사족이 덧붙여진 관계로, 리카르디스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아야만 했다. 참혹했다.
“환장하겠군.”
상처만 남은 애칭 정하기 시간이었다.
파르파르는 입에 낯선 호칭을 사용해 가며 어설픈 연기를 보였다.
“저, 기. 두 번째 골목의. 주점에, 숙성 사슴 고기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들어 봤어, 로, 로즈?”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속지 않을 연기였으나, ‘클로드 경’, ‘슈텐 경’이라는 딱딱한 말 대신, “크림.” “슈슈.” 와 같은 애칭으로 부르다 보니 주위 행인들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게 보였다. 이런 어설픈 수작이 생각보다 잘 먹히는 모양이었다.
로젤린은 자신이 로즈라고 불릴 때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동료 기사들을 노려보았다. 입술을 앙다물고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파르파르에게 “떽끼. 로즈 이 녀석! 이것도 다 작전이야!” 라고 혼난 후에는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으며 혼자 분을 삭여야 했다.
“로즈.”
그걸 지켜보던 도련님이 그녀의 입에 구운 닭다리를 물려 주었다. 굳어 있던 로젤린의 얼굴 근육이 스르르 이완되었다. 마치, 단 한 번도 심기가 불편해 본 적 없는 사람 같았다. 그 이후로는 호칭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배고픈 로젤린보다는 배부른 로즈가 좋다는 것이 아닐까.
초반에는 누가 봐도 이름만 귀여운 기사들이던 그들이 서서히 행인들의 분위기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도련님에게 별다른 위험이 없으리란 사실을 서서히 깨우친 것이다. 위험이라고 해 봤자 삼류 건달이나 소매치기 정도였는데, 파르파르와 하니, 슈슈의 덩치를 보고도 다가올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자들은 어김없이 나타난 로즈에게 제압되었다. 재빠르게, 하지만 상대를 다치지 않게 무력화 시키는 솜씨가 훌륭했다. 그녀의 밑에서 꿈틀거리며 벗어나려던 소매치기는, 로젤린이 귓가에서 낮게 속삭이는 몇 마디를 들은 후 시체처럼 미동 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다.
로젤린이 방긋 웃었다. 마카롱에게 배운 몇 가지 험한 말들을 했을 뿐인데 효과가 엄청났다.
‘마카롱한테 말해 줘야지.’
로젤린과 기사들에게 걸린, 축제의 좋은 뜻을 해치려는 불순한 분자들은 전부 치안대에 압송되었다. 경례하는 남자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상복을 입고 있지만 워낙 유명 인사라 알아보는 모양이었다.
“파르파르.”
“왜, 로즈.”
“저거 사 줘. 나 돈 안 들고 왔어.”
파르파르는 허, 참, 내. 어이가 없으려니. 너 나한테 빚진 거 있거든? 방패 값 물어내라? 툴툴대면서도 그녀가 사 달라는 소 염통 직화 구이의 대금을 치렀다. 이후 그녀는 하니 이거 사 줘, 슈슈 저거 사 줘, 비스탕 저거 사 와 하고 돌려 가며 빚을 지다가 안 되겠는지 도련님에게 돈을 꿨다.
“월급 가불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도련님. 일 열심히 하겠습니다.”
세상 공손한 태도라서 도련님은 알겠다고 했다. 기사들은 악세사리나 축제 기념품 등의 쓸데없는 것들을 사면서도 먹을거리가 보이면 꼭 하나씩 사서 로즈의 손에 들렸다.
그녀는 도련님에게 받은 과일과 크림이 잔뜩 들어간 크레페를 먹을 쯤에는 살짝 울먹이고 있었다. 매일이 축제였으면 좋겠다나. 마침 옆을 지나가던 어린 남자아이가 매일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다는 똑같은 말을 해서 리카르디스는 잠시 손으로 얼굴을 덮어야만 했다. 흑흑 소리가 나며 리카르디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우시는 겁니까, 도련님?”
“아니 잠시…… 머리가 아파서…….”
어떻게든 어물쩍 넘어갔다. 동그란 달이 밤하늘에 가장 높게 걸릴 쯤엔 기사들도 완벽하게 축제에 동화되었다. 이제는 도련님을 호위 하는 게 아니라, 도련님을 끌고 다니며 놀러 다니는 느낌에 가까웠다. 로즈와 파르파르는 죽이 잘 맞는지 많이 먹기 대회 또는 많이 마시기 대회마다 석권하며 축제를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