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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77화 (77/220)

77화.

여행자의 옷을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빛이라 했던가. 아니다, 전부 거짓부렁이다. 바람이다. 파괴력 있고, 종잡을 수 없는 돌풍이 여행자의 옷을 찢어 버릴 것이다!

잇세리온은 알몸이 되어 버린 제 주인의 처참한 몰골에 눈물이 절로 나왔다. 그야말로 완전한 무장해제가 아닌가.

“가시밭길을 좋아하시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전하…… 왜…… 하필…….”

“……가시밭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잇세리온은 손수건으로 제 눈물을 찍었다.

‘흐흑 전하…… 이제는 눈치도 닮아 가시는 겁니까…….’

칼릭스로부터 분명 듣지 않았던가?

마력에 근간을 두고 있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 잇세리온은 기함했었다. 대충 로젤린이라는 기사가 변화했다는 것쯤은 그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저 나이 대의 아이들은 하루하루가 다르지.’ 쯤의 노인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덕분에 충격도 두 배였다.

하지만 리카르디스는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놀라지 않은 듯. 침착하게 칼릭스와 얘기를 주고받았다.

잇세리온이 아는 리카르디스는 상황과 정보를 합산하여 여러 가지 결과를 그려 내는 일을 능숙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이런 상상도 하지 못할 안건에서조차 빛을 발할 줄은 몰랐다. 리카르디스는 대화 내내 칼릭스에게 정보를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정보를 확인하는 식의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고 나갔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다고 해서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닐 텐데, 로젤린을 대하는 리카르디스의 태도는 예전과 비슷했다. 아니 예전보다 더 친숙해졌다.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눈빛과 표정의 날카로움도 무뎌져 있었다.

세티스티아 황녀가 살아 있던 때가 생각나는 얼굴이었다. 잇세리온은 웃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에 가슴이 찡해져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물론, 화목하고 가슴 찡했던 상황은 곧 끝을 맞이했다. 샌드위치의 소스를 리카르디스의 손에 한 방울 떨어트린 로젤린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아 날름 핥았기 때문이었다. 잇세리온이 뒷목을 잡았다. 로젤린 경, 감히 황족의 몸에 어쩌고저쩌고! 잔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얼굴이 발개져 있는 리카르디스도 이번만큼은 잇세리온의 잔소리를 막지 못했다.

한참 뒤 진정한 잇세리온은 자신이 집무실에 들린 진짜 목적을 상기했다. 그가 들고 있던 서류를 팔락거렸다.

“전하. 성과가 좀 있었습니다.”

“어느 쪽?”

“백옥 성입니다. 어수선함을 틈타, 발타에서 접촉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백옥 성은 5황자 디에즈가 머무는 곳이었다. 발타가 엘피디오의 석영 성이 아닌 백옥 성으로 바로 접촉을 했다?

“엘피디오는?”

디에즈가 단순히 발타와 엘피디오의 다리 역할을 자처했다면, 곧바로 엘피디오의 석영 성으로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5황자 전하의 독단입니다.”

리카르디스에게 디에즈는 언제나 엘피디오의 뒤에 가려져 있는 흐릿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생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하게 엘피디오를 비호하며 등 뒤를 지키는 자가 아니었다. 엘피디오의 그림자에 숨어, 발타와의 독자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무엇을 위해서? 단순한 실리를 위함인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일까.

리카르디스는 먼 곳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현 황태자 자리에 가까운 건 자신과 1황자 엘피디오였다. 군중들이야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황태자는 엘피디오였다. 황제가 선언만 하지 않았을 뿐.

설령 리카르디스가 위에 서는 자의 소명을 가슴속 깊이 끌어안고 있어 훌륭한 황제의 재목이건, 설령 엘피디오가 멍청하여 나라를 다 말아 먹을 작자이건. 황태자는 엘피디오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표면상으로 드러난 황태자 위를 둘러싼 싸움의 형태는, 제법 무게가 비등하여 저울이 수평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황자들이 함부로 이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싸움도 급이 맞아야 하고, 종이 맞아야 하지. 사자 싸움에 여우나 하이에나 따위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3황자 틸렌드는 1황자 엘피디오의 동복동생이다. 리카르디스 다음으로는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으나, 사자갈기 공작가는 엘피디오에게 힘을 쏟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안 그래도 나날이 리카르디스의 몸집이 커지고 있는 판에 힘을 나눌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틸렌드 또한 야욕이 큰 사내였다. 혼자서 파벌을 만들어 엘피디오의 그늘을 피해 조금씩 세력을 확장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어머니, 황후에게 딱 걸려서 죽지 않을 만큼 혼났다. 형을 도와줘도 모자랄 판에 뒤통수를 치려고 하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이후 틸렌드는 얌전히 제 형의 왼팔인지 오른팔인지를 담당하여 싸움에서 물러났다.

4황자 라헤안시는 리카르디스와 마찬가지로 외가의 힘이 크지 못했다. 싸움에 끼어들기에는 지위, 세력 모두 부족한 점이 많았으나, 후계 구도에서 멀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애초에 그가 권력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괜한 분란에 휩싸이기 싫었던 라헤안시는 일찌감치 싸움에서 손을 떼고 신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리카르디스가 가끔 대신전에 들렀을 때나 종종 보는 얼굴이었는데 빈둥거리면서 잘 노는걸 보니 적성에도 맞는 듯했다. 어린 6황자와 7황자는 잘난 형들 아래 기죽어 얌전하게 지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과 엘피디오를 제외하면 이 싸움에 끼어들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금 이 관계를 차분히 정립해 보니. 둘만 없다면, 1황자와 2황자만 없다면 디에즈가 상당히 왕좌에 가까운 위치라는 걸 깨달았다.

아, 그런 거였나. 거대한 맹수 두 마리의 싸움. 패자는 죽고 승자 또한 큰 상처를 입을 것이다. 디에즈는 숨죽이고 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위태로운 승리의 상처에 제 발톱을 들이 미는 때를 간절히 기다리며.

“…….”

두 남자가 너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로젤린은 최근 들어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읽기 시작했다. 이런 무거워 보이는 상황에서는 갑자기 맥을 끊는 개인적인 얘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 아니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종용될 거리도 아니라는 것쯤은 대충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갉작갉작 엄지손톱끼리 서로 긁는 손장난만 하며 별다른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로젤린은 배가 고팠다. 고작 과일과 빵 몇 쪼가리를 먹는 것 정도로는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이 그녀의 위장을 감돌았다.

마침 반가운 소리가 울렸다. 꼬르륵, 꾸르륵 하는 우렁찬 소리였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얘기하던 두 남자가 대화를 중단하고 로젤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젤린이 방긋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들으셨습니까? 배가 고픕니다! 알아주시는 겁니까? 그녀가 너무나도 해맑은 표정을 지어서, 그들은 일순 잘못 들은 건가 착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배는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얼굴 근육을 씰룩이며 로젤린의 복부쯤에 시선을 두자, 그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배에서 난 소리입니다. 손이라도 번쩍 들어 보일 기세였다.

리카르디스는 입가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음…… 로젤린 경.”

“예! 전하!”

“혹시…….”

“예!”

“배가 고픈가?”

“예, 전하!”

이렇게 힘차게 대답할 것까지야. 상급 기사 서임식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리카르디스는 이마를 짚는 척, 얼굴을 가리고 나서야 흐느끼며 웃었다.

“몸도 다 낫지 않은 사람이…… 흐흠, 배가 고프면 쓰나.”

“그렇습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해. 오는 길, 정말 수고 많았다.”

“호위가 적습니다. 곁을 지키겠습니다.”

“요즘 들어 암살자들의 수준이 급격히 낮아졌지. 발타 쪽에서 몸을 사리는 것 같더군. 그대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하카브의 도움이 끊기자, 마음이 급해진 엘피디오가 암살자라면 닥치는 대로 보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검은달의 암살자들도 막아 냈던 하얀밤 기사단원들이 고작 국내의 어중이떠중이 암살자들을 처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리카르디스는 어느 때보다도 쾌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리카르디스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줄도 알았다. 잇세리온이 가세해서 그녀를 달랬다.

“오늘만이라도 푹 쉬시죠, 경. 축제 날이 아닙니까. 온 거리에 먹을 것, 구경할 것, 먹을 것이 넘쳐 납니다.”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을 바라보았다. 지금 ‘먹을 것’ 두 번 얘기한 거 아닌가? 어쩐지 실수가 아닌 것 같았다.

“……전하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반복된 먹을 것 얘기 두 번에 로젤린은 혹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곧 리카르디스를 두고 갈 바에는 사흘간 굶겠다는 듯 결의에 찬 눈빛을 했다.

리카르디스가 팔짱을 끼며 코로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상관의 입장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로젤린은 황자의 명령이라 해도 잘 듣는 자가 아니었기에 숨어서 호위할 것이 분명했다.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축제에 볼일이 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습니까?”

로젤린이 반색했다. 잇세리온은 얼굴 표정을 구깃구깃하게 만들었다. 그런 일정 없습니다, 전하! 라고 반박할 마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리카르디스가 잇세리온과 지긋하게 눈을 맞추며,

“볼일이 있었어.”

하고 단정 짓는 바람에 말하기도 전에 막혀 버렸다. 잇세리온은 분한 마음에 큭, 윽. 하며 목 끝까지 차오른 온갖 말들. 안 된다. 위험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냐. 말이 되냐. 따위의 모든 것들을 속에서 잠재워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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