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로젤린이 그의 숨소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전하!”
로젤린이 방긋 웃으며 그를 불렀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테이블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똑바로 앉아서도 별 다른 반응 없이 가만히 눈만 깜박거렸다. 속눈썹이 나른하게 팔랑였다.
‘깨신 것 맞나?’
로젤린은 아직 꿈의 세계에 반쯤 정신을 걸쳐 둔 것 같은 그를 깨우기 위해 테이블 위의 꽃다발을 들어 올렸다.
“전하, 제가 왔습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위풍당당한 목소리에 비해 꽃다발을 건네는 손길은 수줍기 그지없었다. 리카르디스가 멍하니 꽃다발을 안았다. 들쭉날쭉 엉성한 데다가, 꽃봉오리가 없는 줄기도 더러 포함되어 있었다. 몇 개 있는 꽃조차 잎이 한두 개 떨어진 걸로 봐서는 어디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직접 만든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곧 꽃다발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색색의 꽃잎에서 향기가 흘러 넘쳤다. 푸릇한 빛깔의 향기가 선명해, 눈꺼풀 안쪽에도 색이 만개했다. 부드러운 이파리가 입술과 피부를 간지럽게 스쳤다. 가슴 안쪽 가득 봄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로젤린.”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눈을 뜨니 로젤린이 뿌듯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어설픈 꽃다발이 아니라 갖은 보석과 귀한 것을 선물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리카르디스는 꽃다발을 안고 있는 손에 더 힘을 줬다. 자신이 본 것 중 가장 예쁜 것만을 담아 소중하게 모아 온 것이리라. 자리에 쭈그려 앉아 한 송이 한 송이 판별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리카르디스는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몇 번이나 삼켰다가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보고 싶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로젤린이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이상하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네가 왔다.
* * *
[별 다른 일은 없나요?]
겨울석류의 밀리아가 순진하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페르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그것 참 안타깝군요.]
별다른 일이 있길 바랐던 것 같은 대답이었다. 페르탄은 당황했으나 단단하게 굳어 있는 무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밀리아는 가만히 페르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드러나지 않는 당황을 읽혀 버린 느낌이었다. 페르탄은 가볍게 묵례하며 물러섰다.
날은 맑고, 길은 정돈되고, 바람도 잘 불지 않는 좋은 여행길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별다른 일’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황성이 코앞이었다.
그맘때쯤 다시 창문이 열렸다. 곧 황실의 일원이 될, 리카르디스가 창문에 찰싹 붙어 높디 높은 황성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찬사가 들리는 듯했다. 페르탄도 순백의 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군집한 성을 바라보았다. 티 한 점 없이 아름다웠다.
성에서 시선을 돌려 마차를 바라볼쯤에는 호위 대상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페르탄은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머리가 굳어 눈동자만 굴렸다. 바로 그때 마차 안쪽에서 소곤소곤 속삭이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보니 마차 바닥에 호위 대상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여기는 아주 추운 곳이야.]
페르탄은 그녀가 말하는 ‘여기’가 그 아름다운 하얀 성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원히 녹지 않는 눈이 쌓여 있고,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 불어와. 눈을 깜박하는 사이에 어둠이 내려 앉아 추위를 한층 더 혹독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야.]
가혹한 운명이 찾아오리라. 열 살 난 어린 아이에게 닥칠 것이라 예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하고 싸늘하게.
밀리아는 거듭해서 경고했다. 이곳은 영원한 겨울이야. 버텨 내야 해. 더 차가워지고, 더욱 혹독해지더라도. 괴롭더라도 견뎌야 해. 사람은 약하지만, 소중한 것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어.
페르탄은 밀리아의 말이 그녀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버텨야 해, 더 차가워지고 괴로워도 견뎌. 나는 약하지만, 너희를 위해 강해지겠어. 그렇게.
[언제까지요?]
페르탄은 자신이 질문을 받은 것도 아니건만 당황했다. 그 괴로움의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일까.
밀리아도 리카르디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 하고 잠시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페르탄은 밀리아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어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얼굴이 자신과 같은 당황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주 잠시간의 공백 후, 밀리아가 어린 소년의 어깨를 꽉 쥐었다.
[봄이 올 때까지.]
영원한 겨울 속의 봄. 그려지지 않는 미래였다. 그녀 또한 그 모순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때까지 반드시 기다리는 거야, 리카르디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밀리아를 올려다보던 리카르디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방긋 웃었다.
[네, 어머니. 기다릴게요.]
10
리카르디스의 환한 미소가 점차 의문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마주한 로젤린이 눈을 부릅뜬 채 굳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숨도 멈춘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뭐지? 무슨 일이지?
“로……젤린 경? 로젤린?”
한참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녀가 꿈틀, 움직이더니 이내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아…….”
아. 감탄사인지 아니면 어떤 단어의 시작인지 모호한 말이었다.
“아름다우십니다.”
“…….”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말이었다. 걱정스레 그녀를 지켜보던 리카르디스가 허탈함에 웃었다. 로젤린은 다시 한번 파들파들 떨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찬란하게 빛나는 미모에 연신 충격을 받는 중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웃는 모습을 아주 보지 못한 것도 아니며, 그가 아름다운 게 하루 이틀의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로젤린이 이토록 경악하는 이유는 오늘의 리카르디스가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를 감싼 주위 공기가 깃털처럼 가볍고 봄 햇살에 말린 시트처럼 포근했다. 행복하다는 듯 눈을 휘며 제 모습을 담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로젤린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말, 너무 완벽했다. 얼굴이……!
“…….”
어디로 보나 오랜만에 재회한 황자와 기사 사이에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보통은 잘 지냈느냐, 여행길은 힘들지 않았냐는 안부가 우선이지 않나?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대도 오랜만에 보니…….”
리카르디스는 적당한 뒷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었다. 눈앞의 로젤린은 여전히 예쁘고 귀여웠지만, 지금 그 말을 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이마와 볼에는 정체 모를 검댕이가 묻어 있었고, 머리카락 여기저기 이파리를 달고 있는 지금. 예쁘다, 귀엽다는 표현은 놀리는 듯한 느낌을 줄 것 같았다.
“…눈이…… 더…… 뾰족해진 것 같군. 아주 멋있어.”
신성 제국 일라베니아의 2황자,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 고작 이것밖에 못해? 독설가, 달변가, 15살에 학자와 토론을 했던 내가, 고작 눈이 뾰족해? 뾰족해서 멋있어? 미친 거 아니야?!
리카르디스가 자괴감에 휩싸여 무너져 갈 때, 로젤린은 한껏 흐뭇해하는 중이었다. 맞습니다, 제 눈이 좀 뾰족하고 멋있죠. 하는 듯이. 그제야 리카르디스의 입가가 풀어졌다.
그가 손을 들어 로젤린의 머리에 파묻힌 나뭇잎을 떼어 냈다.
“아픈 곳은?”
“아, 장시간 말을 타느라 엉덩이가 조금,”
“그래! 그래, 이만 하지. 피곤한 사람을 붙들고 내가 너무 배려가 없었어.”
리카르디스가 황급하게 말을 돌렸다.
‘역시 방심하는 순간 튀어나오는군.’
정말 그녀는 여전했다. 리카르디스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로젤린 경!”
외출했던 잇세리온이 로젤린을 발견하고 반가운 비명을 질렀다.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건강해 보일 수가. 샌드위치를 씹어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것 같은 저 힘찬 목 넘김!
로젤린이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회복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건강해 보이는군요! 아이고,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그런데, 로젤린 경. 스타스 경에게 복귀 보고는 하고 온 겁니까?”
로젤린이 괜찮다고 하자마자 잇세리온이 낯빛을 싹 바꾼 채 따지고 들었다.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로젤린의 시선이 슬그머니 잇세리온의 얼굴을 벗어났다. 아니 이 사람이!
“어쩐지 스타스 경이 퇴근 시간인데도 집무실을 떠나지 않더라니! 초조하게 서류만 뒤적이더니만!”
“제가 갔을 때는 자리에 안 계셨기에…… 그래서 그냥…… 왔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오면 어떻게 합니까!”
리카르디스는 잇세리온을 의식하고 목 아래로 웃음을 꾹 눌렀다.
“아까 문밖의 호위 기사분들이 로젤린 경의 얘기는 안하던데…… 아앗! 또 창문으로 들어왔군요!”
리카르디스는 로젤린이 혀 차는 소리를 들었다. 거 눈치 되게 빠르네. 분명 그런 뜻이었다. 잇세리온도 알아들었는지 잔소리를 마구 퍼부었다. 아까 칼릭스에게 인간을 벗어난 존재 어쩌고 얘기 들은 건 전부 잊은 눈치였다.
“잇세리온. 그쯤하고 넘어가지. 막 도착해서 피곤한 사람 아닌가.”
최근 들어 로젤린의 일 때문에 무척이나 피곤한 잇세리온은 원망스럽다는 눈빛으로 제 주인을 쳐다봤다.
로젤린은 강력한 뒷배를 얻었다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가장 나쁘고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잇세리온은 그녀의 어설픈 비열함에 울컥하진 않았다.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열한 미소를 짓는, 로젤린을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표정과 눈빛.
잇세리온은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었다.
‘어, 억…… 설마. 아니겠지.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아니야! 부정을 해 보았으나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인간에서 살짝 빗겨 나가 있는 존재를 바라보는 리카르디스의 눈빛이, 마치 꽃물로 물들인 어린 아이의 손톱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