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리카르디스의 말대로, 황제는 제 친아들을 배제하면서까지 제 욕망을 이루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만약 페르탄이 황제에게 아이를 찾자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엘피디오는 죽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가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이거 참…… 대단하군. 대단해…….]
그가 소파의 손잡이를 꽉 쥐며 이를 악물었다. 뼈가 날카롭게 돋아난 손등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멋대로 주고…….]
그가 고개에 힘을 빼고 앞으로 툭 숙였다. 머리가 흐르며 그의 얼굴을 가렸다. 움찔거리는 입술만 보였다.
[멋대로 빼앗아.]
페르탄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는가, 백작. 그대가 그랬지. 신성력은 황실의 전유물. 내가 힘을 지닌 것 또한 황실로 오게 될 운명을 신이 안배한 것이라고.]
방 안이 점점 어두워졌다. 선명하던 햇살이 가득했는데, 먹구름이라도 드리운 것이었을까. 더욱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남자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렇군. 나는…… 이런 운명이었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이런 운명이었어…….]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나간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으며, 그 또한 운명이었으리라. 운명의 수레바퀴라고도 불리는 가문다운 태도를 언제나 고수했다.
그러나 페르탄은 이때 최초로 후회를 하게 되었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는 흔하디흔한 일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일라베니아의 평화를 위한 초석.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붉은수레바퀴가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손에 남은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바란 건 아니었을 텐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그러나 이미 그 길로부터 너무나 많이 걸어왔으며, 돌아본다고 해도 돌아갈 수는 없다. 앞으로를 준비하는 것이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붉은수레바퀴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차마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서서히 깨져 가고 있는 어린 소년의 미래를 본 페르탄은, 그 순간만큼은 또 다른 운명이 그에게 찾아오길 바랐다.
* * *
로젤린의 귀환 소식에 기숙사 건물은 시끌벅적했다. 덕분에 로젤린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몇 시간이나 갇혀 있어야 했다. 어지간하면 리카르디스를 보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반짝이며, 더러는 눈물을 보이며 제 귀환을 축하해 주는 동료를 두고 떠나기에는 로젤린이 사회적으로 너무 성장한 상태였다.
쌀쌀맞게 굴던 상급 기사 몇몇조차도 부드러운 미소로 “건강해 보여서 다행입니다, 로젤린 경.” 하면서 갓 태어난 강아지 새끼 솜털만큼 간지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 변화가 몹시 반갑고 행복했던 로젤린은 쏟아지는 축하를 잔뜩 음미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마나 기뻐하는지.
흐뭇해하는 로젤린에게, 에버하르트가 작은 의견을 냈다. 동료 기사들을 더 깜짝 놀라게 해 주자는 것이었다.
로젤린은 문 뒤에 웅크려 숨어 있다가 갑작스레 앞구르기를 하며 튀어나온다든가, 큰 나무 상자에 몸을 구기고 들어가 있다가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뚜껑을 열어 주는 순간 펄쩍 날아오른다든가 하는 식의 이벤트로 사람들의 깜짝 지수를 더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로젤린은 연무장의 나무에 숨어 있다 지나가는 파르딕트도 놀라게 만들었다. 파르딕트는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린 채 갑자기 나타난 로젤린을 보고 기겁해서 뒤로 넘어졌다. 그 뒤 그녀의 귀환에 기뻐하기보다는 그녀의 행위에 화냄으로써 로젤린의 기세를 한풀 꺾이게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로젤린은 행복함에 잠시 잊어버렸던 본 목적을 되찾아 왔다. 리카르디스를 만나러 가야 했다.
로젤린은 복도를 걷다 네스터와 마주쳤다. 얼굴을 붉힌 네스터는 자신이 상급 기사로 승급했노라, 은근히 자랑하며 그녀가 칭찬해 주기를 바랐다. 물론 그 은근한 자랑을 알아들을 리 없는 로젤린은 “아, 네 그렇습니까.” 정도의 건조한 답변밖에 해 줄 수 없었다.
저 멀리 보니 정원사가 나무를 솎고 있었다. 로젤린은 네스터와의 이야기를 중단하고 미련 없이 떠났다. 네스터가 뒤에서 울상을 지었다.
정원사가 가지를 솎거나 꽃을 새로 심을 때면 로젤린은 항상 그 곁을 떠돌았다. 운이 좋으면 잎이 한두 개 떨어진 꽃 무리를 거저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로젤린은 정원사의 발치에 떨어진 꽃과 풀줄기 중, 본인의 기준으로 예쁜 것들만 주워 모아 아래 둥치를 끈으로 묶었다. 어설프게나마 꽃다발의 형식은 갖출 수 있었다. 냄새를 맡으니 향긋했다. 로젤린은 뿌듯한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길에 로젤린은 부단장실에 들러야 한다던 레티시아와 다시 마주쳤다. 로젤린의 간식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그녀가 바구니에 샌드위치며, 케이크며, 과일이며 잼이며, 여러 가지를 바리바리 싸들고는 로젤린에게 안겼다. 로젤린은 당장 꽃보다 향기로운 빵을 음미하고 싶었으나, 드물게 식욕보다 목적이 앞선 상태였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시간이면 리카르디스는 집무실에서 서류와 눈싸움을 하고 있을게 분명했다. 정문을 향하던 로젤린의 발걸음이 멈췄다. 정문으로 가면 시종이 미리 방문자를 알리기 때문에 그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창문으로 들어가야지.’
레이몬드와 잇세리온, 나단과 스타스가 창문으로 드나들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 했으나, 지금은 그들의 잔소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리카르디스가 깜짝 놀라며, 아니 로젤린 경! 세상에! 언제 온 건가! 아니, 이 꽃다발은? 완벽하다. 역시 내 기사야. 보고 싶었다! 하며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배가 부른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져 왔다.
‘역시 창문으로 들어가자.’
로젤린은 호위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살금살금 벽을 기어오르다가 상급 기사 카일로에게 딱 걸렸다. 완전 혼났다. 로젤린은 제 원대한 계획을 필사적으로 피력했다. 카일로는 어처구니 없어 했지만, 로젤린에게서 작은 쿠키 하나를 뇌물삼아 받아 들고는…….
“두 개 더 주시죠. 협상은 없습니다.”
라고 했다. 너무 강경한 태도라 두 개를 더 줘야 했다. 로젤린은 화가 나서 씩씩거렸고 카일로는 그녀의 반응에 은근 즐거워했다. 여동생이 두 명 있다더니, 놀리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로젤린은 테라스에 도착했다. 커튼은 반쯤 드리워져 바람에 부드럽게 휘날리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로젤린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천 자락이 팔락이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과 풀벌레, 새가 저마다 요란하게 울었다. 그 사이로 고른 숨소리가 퍼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는 로젤린을 단숨에 노곤하게 만드는 잔잔한 울림이었다.
로젤린은 꽃다발과 간식 바구니를 든 채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리카르디스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숨소리로 인해 그가 얕은 잠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로젤린은 꽃다발과 간식 바구니를 그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리카르디스는 잔뜩 인상을 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펴 주고 싶었다. 로젤린은 테이블 옆에 있던 협탁을 끌어 의자 삼아 앉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팔을 얹어 턱을 괴어 그를 가만 바라보았다.
바람이 흔들렸다. 커튼이 춤을 추고 그 움직임에 햇빛이 고스란히 리카르디스에게 쏟아졌다. 그가 인상을 쓰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로젤린이 턱을 괸 채 다른 손을 들어 그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리카르디스의 얼굴과 그녀의 손이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그림자가 크게 드리웠다.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기분이 좋아진 로젤린이 혼자 씩 웃었다.
그러고도 한참 지났다. 사십 분쯤. 팔이 아프지는 않지만 심심했다. 로젤린은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제 손 그림자를 변형시키며 놀았다. 햇빛이 강한만큼이나 그림자가 선명했다. 강아지, 여우, 새, 백조, 나비. 칼릭스가 과거의 로젤린이 자신에게 가르쳐 준 것이었다며, 지금의 로젤린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림자 나비가 나붓나붓 날갯짓하며 리카르디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움직였다. 그때 리카르디스의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자신이 베고 있는 제 손으로 볼을 문질렀다. 어딘가 가려운 듯이.
곧, 스르륵하고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초점이 맞지 않는 듯이 두어번 깜박이더니 로젤린을 눈에 담았다. 그녀가 밝은 창밖을 쳐다보며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둥그스름한 이마와 콧날의 선이 빛을 받아 희게 빛나고 있었다.
‘꿈인가?’
리카르디스는 엎드린 채로 눈동자만 굴려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사방에 햇빛이 시릴 정도로 내려쬐고 있음에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얼굴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로젤린이 두 손을 교차로 한 상태로 모으고 있었다. 날개 같았다.
그녀의 손이 그림자를 만들어 제 눈을 따가운 햇빛으로 부터 가려 주고 있었다. 손가락 틈새로 빛이 깜박깜박 점멸했다가 다시 나타났다.
테이블 위의 식은 홍차가 아직 향을 내고, 습도 하나 없이 바싹 마른 공기는 상쾌했다. 햇빛이 쏟아지며 테이블의 나무 무늬를 선명하게 다시 그리고, 공중에는 먼지가 반짝였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테이블 위에 거대한 꽃다발과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간식 바구니가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꽃 냄새와 달콤한 음식 냄새. 갖은 풍요롭고 예쁜 것으로 둘러싸여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사치가 아닌가.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왜 지금의 이 순간을 꿈보다 더 꿈같다고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방금 깼는데도 잠이 몰려왔다. 무언가가 끝난 것 같기도, 시작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