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명석하면 그 또한 좋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면 될 터.]
평민 출신일 가능성이 높으니, 교육 시간을 넉넉히 잡아야 한다. 적어도 이 년, 삼 년.
[그 아이의 부모가 될, 귀족 가문 또한 찾으라. 과거 내가 시찰을 간 적 있는 지역 안에서. 그 아이는 그때 태어난 것이다. ]
평민에게서 난 자식은 황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러니 변방의 영지에 시찰 갔을 때, 여인과 정을 통해 낳은 아이라 속이자는 것이다.
[이름은…… 그래. 리카르디스가 좋겠다. 다음 아이가 태어나거든 붙여 주려 했었지. 위대한 치세를 펼친 일라베니아 황제의 이름이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명을 받듭니다.]
아이는 자라고 자라 엘피디오와 다투게 될 것이다. 쓰임새가 다 하는 날에 사라지게 될 황제의 꼭두각시.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휩쓸릴 작은 운명이 안타까웠으나 신성력은 황실의 전유물이다. 그 강한 힘을 지니고 황실에 오게 될 운명 또한 신의 안배이리라.
페르탄은 곧 한 명의 아이를 찾아냈다. 아이는 작은 야생동물 같았다. 뒷골목의 고아 출신. 쓰레기를 주워 먹고 구걸하는 아이들 중 하나였다. 바싹 마르고 볼품없다. 꾀죄죄한 데다가 행동거지가 사납다.
그러나 흙먼지에 가려져 있던 밝은 은발은 아름다웠고, 맑은 눈동자는 총기가 넘쳐 보였다. 나이 대도 적당하며, 신성력은 이례적인 수준. 고아이기에 핏줄의 개입도 없다. 완벽한 적합자였다.
아이는 변방의 겨울석류 자작 가문에 맡겨지게 되었다. 겨울석류 자작은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고, 제 딸이 황비가 될 수 있다는 얘기에 이 터무니없는 제안을 덜컥 승낙했다.
자작의 딸, 밀리아는 지나가는 음유시인과 사랑에 빠져 일 년 전 여자아이를 낳은 후, 집안에서 구금되다시피 지내 왔다. 미혼의 몸으로 천한 평민 남자의 아이를 낳다니, 알려지면 귀족 사회에서 대대로 회자될 수치였다.
겨울석류 자작이 그 일을 숨긴 결과로 집안의 사용인들도 아이의 아버지를 모른다고 했다. 그 치밀함 덕분에 밀리아가 리카르디스의 부모 역으로 발탁된 것이다. 딸이 한 명 있는 흠이 있었으나, 그쯤이야 감수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리카르디스였다.
밀리아는 자신이 이 고아 소년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그 때문에 몇 년 뒤에는 바라지도 않던 황성에 끌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페르탄이 리카르디스를 데리고 오는 당일 날에 들었다. 기겁할 일이었다.
그러나 밀리아가 처음 본 리카르디스에게 한 말은.
[어머, 오빠 생겨서 좋겠네, 우리 티아!]
였다. 밀리아의 품안에는 그녀를 똑 닮은 은발을 가지고 있는 어린 소녀가 안겨서 우꺄우꺄 소리를 내며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밀리아가 손을 올려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잔뜩 경직 시킨 채 그녀의 손길을 받았다. 뺨을 맞으리라 예상했던 것 같았다.
소년은 그녀의 김빠진 반응에 자신도 김이 빠진 듯 바짝 세운 가시를 눕혔다. 언제나 반항심 넘쳐 보이던 소년이 밀리아의 손길 한 번에 누그러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페르탄은 몇 개월 주기로 리카르디스를 보러 갔다. 바싹 마르고 작았던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홀쭉했던 볼이 부드러워지고, 뻣뻣하고 정돈이 안 되어 있던 머리도 빛이 부서져 내리는 아름다운 은발이 되었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항시 구부정하게 몸을 옹송그렸으나, 곧게 뻗은 자세는 태생을 의심하기 힘들 정도였다.
겨울석류 가문에 끌려올 때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던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많이 깨우친 듯했다. 아이는 총명했다. 타고난 머리가 좋은 탓도 분명히 있었으나, 손가락에 박인 굳은살은 필사의 노력을 비추고 있었다. 고작 일 년 사이의 변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단발머리의 소년이 밀리아의 딸, 세티스티아를 안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애정을 듬뿍 담고 있었다. 밀리아는 그런 리카르디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소년은 더 이상 그녀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몸을 움츠리지 않았다. 어린 새싹이 봄의 햇빛을 부드럽게 담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걸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가족.
가족이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연극을 위해 모아 둔 꼭두각시 인형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페르탄은 가문을 뒤돌아 나가며 저 멀리 화원에서 어린 동생과 소꿉놀이하는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여자아이가 오바, 오빠. 하면서 알 수 없는 옹알이 같은 걸 섞어 무어라 말하자, 리카르디스는 더 없이 행복하게 웃었다.
햇빛이 비추는 작은 정원 속. 아름다운 은발의 소년과 소녀. 여기저기 들꽃이 피어 있고 아이의 장난감 위로 무당벌레가 앉아 있다.
평화롭고,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세티스티아 황녀가 죽었다. 그녀가 제 오라비를 따라 황실 일원으로 인정받은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별장에서 돌아오는 길, 수십의 무리가 습격을 감행한 결과 마차가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마차의 파편이 황녀의 복부를 찔렀으나 그녀는 즉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통받다 죽었다. 자신보다 더 오래 그녀가 살길 바랐던 리카르디스는, 제 동생이 보다 빠르게 이 세상을 떠나지 못했음에 더 괴로워했다.
어린 황녀를 관통한 나무 파편에는 리카르디스의 문양이 조각난 채 새겨져 있었다. 습격한 자들은 그 마차를 타고 있는 사람이 그 문양의 주인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 이야기를 리카르디스에게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슬픔에 잠겨 오랫동안 웅크렸지만, 곧 다시 일어섰다. 세티스티아가 떠났다 하더라도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슬픔에 온전히 잠기는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는데,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페르탄이 보아 왔던 밀리아 황비는 영민하고, 당차고 좀 이상한 여자였다. 어딘가 엉뚱하기는 하지만 이 거친 황실에서도 기죽지 않고 제 딸, 아들을 위해 우뚝 서 있으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티스티아 황녀가 죽은 이후, 밀리아 황비는 미쳐 버렸다. 보통의 사람처럼, 보통의 사람보다 더. 어떤 것에도 부서지지 않게 꼿꼿이 버티고 있던 그 힘에 반발력이 작용한 듯, 더 괴롭고 아프게 부서졌다.
하루 온종일 울다가 실신하고, 깜깜한 밤에 세티스티아의 방 안을 거닐고, 갑자기 수풀로 뛰쳐나가는 등. 속으로 삭이지 못한 슬픔을 표출하는 것이었으나 그마저도 일부일 뿐이라, 그녀의 안에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는 격정적인 감정은 마모될 줄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밀리아는 황폐해지고 쇠약해졌다. 어딘가 다치고 베이지도, 병에 걸리지도 않았으나 그녀는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밀리아 황비의 곁을 계속 지켰다.
페르탄은 밀리아를 자주 찾아갔다. 어떤 죄책감의 발로라기보다는, 밀리아가 방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페르탄은 그녀가 아이를 잃은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해 자신을 부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밀리아 황비는 페르탄을 보고 화내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흐려진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밀리아 황비는 페르탄에게 악을 쓰며 저주하는 대신,
[네가, 내 아이를 죽인거야.]
그녀가 소중하게 지탱하고자 했던 제 아들, 리카르디스에게 모든 것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너만 아니었으면!]
정신이 이상해졌다기보다는, 꾹 눌러 담았던 그녀의 진심이 드디어 터져 나온 것이라고 페르탄은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그 말을 참아 낼 힘이 없었던 게 아닐까.
리카르디스의 얼굴은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도무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에게 모진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씩 움직였다. 턱 근육이 씰룩이고 눈썹이 일그러졌다.
괴로워 보였다. 그러나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마주한, 무엇보다 아픈 칼날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 내었다. 밀리아가 그 안에 담아 낸 것을 쏟아 낼 대상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밀리아 황비는 금이 가 있는 얇은 유리 같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너무 무거웠다. 무겁고 날카로워 그녀 자신조차 상처 입혔다. 리카르디스는 밀리아가 그 무겁고 날카로운 것들을 자신에게 쏟아 내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비워 내기를 바라고 있었다.
언제나 리카르디스를 탓하지 만은 않았다. 미안하다며 리카르디스의 손을 잡고 울기도 했다. 내가 너무 약해서 미안해. 리카르디스. 혼자서 버텨 내게 해서 미안해. 그렇게 숨이 닳는 듯 헐떡이며 울었다.
그것은 리카르디스에게 향하는 질타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페르탄은 아직까지도 그녀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 했다.
세티스티아 황녀의 기일로부터 178일 후. 리카르디스는 밀리아 황비를 떠나 보냈다. 사인은 익사였다. 자살이었는지, 약해진 몸을 이끌고 산책하다 실수로 호수에 빠진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페르탄은 리카르디스를 찾아갔다. 밀리아의 서신에 길들여진 탓이었을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월장석 성으로 흘렀다.
리카르디스는 그저 커튼을 친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울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으나 어딘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웠고, 정돈되지 않아 어지러웠다.
침묵을 지키던 리카르디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내가 없었다면 엘피디오는 죽었겠군.]
손톱이 서로 부딪치며 딱, 딱 불쾌한 소리를 울렸다.
[그래서 날 찾은 거였어.]
페르탄과 황제는 단 한 번도 리카르디스에게, 그가 황자로 둔갑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 적 없었다. 그러나 황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엘피디오와 싸워 온 그 세월은 모든 이유를 가늠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