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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73화 (73/220)

73화.

살아 돌아온 로젤린을 죽이려 하지 않은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그녀가 제 발로 직접 발타라는 사지에 들어갔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경계했을 텐데, 그 수상한 낌새를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속마음을 능숙하게 속이고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위험인물인 셈이다.

로젤린은 사지에서 또 다시 살아 돌아왔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만약 그녀를 죽인 ‘그것’이며, 지금의 상황에 놓여 있다면, 반드시 로젤린의 죽음으로써 이야기를 끝맺길 원할 것이라 생각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소름이 돋았다. 로젤린에게 가는 화살을 다 쳐 내고 있다 생각했건만, 그보다 더 위험한 무언가가 그녀 곁을 맴돌고 있다니.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유일한 변수라고 부를만한 게 있다면, 로젤린과 그자가 같은 성질을 띤 존재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들 반응을 예상할 수 없었다. 호의? 적의? 스물다섯이 되는 동안 인간으로밖에 살아 보지 못한 자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변수는 일단 그대로 둔다. 이용하기엔 너무 불확실한 요소였다. 행운과 우연에 기댈 만큼 가볍게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천천히, 조심히, 자세하게 풀어 나가야만 한다.

조급함에 놓치는 것이 없도록.

* * *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앉으라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앉겠습니다. 얘기가 길어질 듯하니.”

칼릭스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번듯한 장식 하나 없이 생활과 집무에 필요한 가구만 갖춰 놓은 이곳은 일라베니아의 수도에 있는 붉은수레바퀴 저택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은 아들이 왔음에도 창가에 서서 바깥만 보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영지를 지키라 명령했다.”

“누님께서 아프셨습니다. 또한 2황자 전하로부터의 서신이 있었기에, 월장석 성에 발을 들여놓은 것뿐입니다.”

페르탄이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누님이라고 부르고 있느냐.”

영지를 지키라는 명령을 무시한 것, 또한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로서 월장석 성에 출입한 것. 두 가지의 큰 건을 두고 페르탄은 다른 점을 콕 집었다.

“알고 계셨군요. 누님께 그다지 관심이 없으셔서 모르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물론 칼릭스도 제 아버지가 모를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애초에 로젤린이 마인이라 해명한 사람이 그가 아니던가.

칼릭스가 아는 한, 로젤린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 그녀를 마인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은, 아버지가 정확한 사정은 파악하지 못했더라도 ‘로젤린’이 죽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는 얘기였다. 또한 지금의 로젤린이 다른 사람이라는 점도.

“건방지게 굴지 말거라. 제 누이의 치마폭에서 좀 벗어났나 했더니, 안 본 사이에 아주 세 살배기가 되었구나.”

“붉은수레바퀴의 요람에서 벗어나 걸음마를 하는 중입니다. 자랑스럽지 않으십니까.”

페르탄은 몸을 완전히 돌려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붉은수레바퀴는 총명하고 강한 후계자가 있으니 걱정 없으리라. 숱하게 들어온 말이었으나…….”

그가 창가에서 테이블로 걸어왔다. 칼릭스에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너는 어리석고, 약하구나.”

칼릭스는 제 아버지를 올려다보고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감사합니다.”

페르탄이 자리에 앉았다. 그가 케이크를 맨손으로 덥석 집어 먹었다.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로젤린의 죽음을 알고 있음이 확실한데,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명령을 듣지 않고 누이를 보호하려던 자신을 질타할 뿐이었다. 칼릭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네가 붉은수레바퀴를 잊어버린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누이는요!”

쾅!

칼릭스가 테이블을 치자 찻잔이 흘러 넘쳤다. 페르탄은 손에 묻은 크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너마저 붉은수레바퀴를 위험하게 만들지 마라. 그것이 네가 달고 있는 이름 위에 서는 자로서의 의무이자, 숙명이다.”

“재밌는 말씀을 하십니다. 엘피디오야 말로 발타 이전에 일라베니아에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입니다.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함부로 황족의 이름을 거론하지마라.”

“황제는 무능하지만 제 밥그릇만 있으면 만족하는 인물입니다만, 엘피디오는 무능하면서 남의 밥그릇까지 탐을 냅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아버지가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대륙 위의 사람들은 죽어 나가고, 엘피디오는 제 배 불리기만을 원할 텐데 진정 붉은수레바퀴만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칼릭스는 눈이 뒤집어져서 씩씩거렸다. 페르탄의 왼쪽 눈썹이 움찔거렸다. 흉터가 있는 부위는, 그의 통제를 벗어나 속내를 드러내고는 했다.

“엘피디오 전하는, 통제 할 수 있는 위험이다.”

그 개차반을 통제할 수 있는 위험이라 말하다니. 바닥을 치던 존경심이 조금 올라왔다.

“그러나 리카르디스 전하는…… 위험하다.”

흘러넘친 홍차를 가만히 바라보는 페르탄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칼릭스는 그의 말에 의구심을 가졌다. 리카르디스 전하가 엘피디오보다 위험하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는 결코 황제가 될 수 없고.”

페르탄이 읊조리는 말은 반항기 넘치는 아들이 아닌, 그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 * *

황제 라이노는 분노했으나, 그를 지배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이었다. 그 대상이 제 핏줄이라 할지라도 제 몸에서 떨어져 나온 이상 그것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1황자 엘피디오는 두 살 무렵부터 라이노를 넘어서는 성력을 지녔다. 그의 모친이 지니고 있던 성력을 대물림 받은 것인지, 가까운 친족끼리의 근친혼으로 인한 돌연변이의 탄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두 앞으로를 기대할 뿐이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중요한 건 ‘앞으로 완전히 성장한 엘피디오가 얼마나 큰 성력을 지닐 것인가’가 아니었다. 자신을 넘어섰다는 것.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 어린아이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그 자체였다.

어차피 축복의 밤은 누구도 띄울 수 없을 텐데, 이런 시대에 신성력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진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얘기했다. 이델라브힘의 더욱더 강한 힘이 필요하다. 그에 걸맞은 사람이 없었기에,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때에 엘피디오가 태어났다. 엘피디오 바르솔 일라베니아. 고귀한 혈통, 그 첫 번째 아들. 신에게 선택받은 증거인 강한 신성력. 물려받은 아름다운 외모와 밝은 금발. 비록 아직 어릴지언정,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황제의 재목이 되리라.

자신이 내려놓는 것과, 뺏기는 것은 손에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잃는다는 결과는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라이노는 십여 년 후, 제 아들에게 권좌를 빼앗길 운명에 처했다. 비참했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그 감정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미래의 일. 그사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 않나. 기다리자. 황제는 숨을 죽이고 세월을 보냈다.

엘피디오가 일곱 살이 되었다. 총명하여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하고, 당당하고 자신감이 있었다. 몇 명의 아래 형제들이 있으나, 엘피디오는 자신이 황제가 되리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라이노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위험이 거대하게 차올라 목을 조였다. 그 아이가 성력이 약했더라면, 비천한 어미를 두었다면, 적자가 아니었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이는 얼마든지 또 있다. 엘피디오는 너무나 큰 위험이다. 죽여야 한다!

그가 생각한 것 중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제 아들을 죽인 비정한 황제라 불리는 것이 제 아들에게 패배해 꼬리 말고 도망가는 무능한 황제보다는 나았다.

라이노는 일라베니아와 같이 발맞춰 걸어온 충실한 번견,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명령했다.

[엘피디오를 죽여라.]

갖은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유일하게 망설인 순간이었다. 그의 가문은 일라베니아를 지킨다. 황제를 지키는 일은 일라베니아를 지키는 것. 그것이 몇 대를 걸쳐 온 오랜 사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명령은 후대를 위해 자라고 있는 새싹을 짓밟는, 그의 사명과 반하는 일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라이노의 욕망을 읽어 냈다. 그는 엘피디오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단순히 자신이 원할 때까지 군림하고 싶을 뿐이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생각했다.

엘피디오를 살려야 한다.

선대 황제는 병에 걸려 죽는 그 순간까지 권좌에 앉아 있었다. 그가 특별하게 신성력이 강했던 것도, 특별하게 유능했던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아들 덕분이었다. 모두가 황제가 되고 싶어 하지만 자리는 하나. 싸움은 불가피 했다. 선대는 한 명의 후계를 정확하게 꼽지 않았기에 싸움은 선대가 죽을 때까지 치열하고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황제의 다른 아들들은 능력이 따라 주지 않을뿐더러 야욕이 없었다. 모두 엘피디오가 차기 황제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엘피디오에게도 그만한 대항마가 있다면, 황실에서 그가 유일해지지 않는다면…….

[아이를 찾겠습니다.]

[아이?]

[월계수의 고귀한 혈통이 아니더라도 신성력을 강하게 타고나는 아이들은 있습니다.]

황제는 그 말만으로 백작의 모든 뜻을 알아챘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깊게 생각했다. 곧바로 황제가 씩 웃었다.

[아이를 찾아라.]

[명을 받듭니다.]

[엘피디오와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는 사내아이.]

붉은수레바퀴 백작은 머릿속으로 아직 찾지 못한 아이의 모습을 그렸다.

일곱 살 전후의.

[엘피디오와 비등하거나 그를 넘어서는 신성력.]

강한 신성력을 지닌.

[황실의 혈통이 될 테니 아름다운 머리 색을 지닌 것은 당연해야 한다.]

밝은 금발이나 은발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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