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72화 (72/220)

72화.

“이게, 무슨 지금…….”

리카르디스는 말문이 막혀 그저 칼릭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은 후련하다는 표정을 하고 벌떡 일어섰다. 리카르디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남매가 양 옆에서 번갈아 가며 뒤통수를 치고 있었다. 사람 황당하게 하는 것이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특성인가?

칼릭스는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리며 웃었다. 잇세리온은 그 짧은 사이 너절해져 있었다. 리카르디스도 심각한 얼굴로 잠시 입을 가리고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도 이 돌발 행동의 여파가 컸는지, 십 분의 시간이 말없이 흘러갔다.

“그러니까 경이, 지금…… 내 기사가 되겠노라 선언한 게 맞는가?”

“예, 그렇습니다만,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그럼 왜 이, 이, 이 사달을 만든 겁니까!”

잇세리온이 버럭 성질냈다. 칼릭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제 결심을 보여 드리고자.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저라는 인간의 가치가 단순히 무력에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지…….”

“저는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을 달고 있을 때,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일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얀밤 기사단에 들어간다고 붉은수레바퀴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으나, 후계자의 이름이 계속 남아 있기는 힘들지 않겠습니까? 저희 누님처럼 말입니다. 이 이름을 달고 만일의 사태에 전하께 도움이 될 수 있게 힘을 모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아까의 칼릭스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미심쩍고, 수상하다는 듯이. 숨기지도 않고 아주 대놓고 흘겨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자리에 풀썩 앉았다. 멀쩡한 의자를 두고 다들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착석했다.

“칼릭스 경,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이냐면.”

“예, 전하.”

“꿀 한 조각 따러 갔다가 벌집이 통째로 떨어진 기분이다.”

“그렇습니까.”

“벌집 주위로 벌들이 날아다니긴 하는데, 독이 없는 종류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 그런 기분. 이제 남은 건 꿀이 가득한 벌집을 들고 가기만 하면 되는 거지.”

리카르디스는 손가락으로 벌의 궤도를 그리는 시늉을 했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칼릭스는 웃음을 꾹 눌렀다.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

리카르디스는 저 태평한 남자의 머릿속을 좀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여간 이 검은 머리 남매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말하라. 물어도 되겠느냐고 하지 않는 것은 그대가 내 사람이라고 서약했기 때문이다.”

칼릭스는 손을 깍지 끼고 엄지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제가 새삼스럽게 전하의 인품에 반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그건 바라지 않으니.”

리카르디스는 진절머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퍽 징그럽다는 듯 보는 시선에 칼릭스는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저 누님께서 전하를 놓지 못하기에.”

“단순한 가족애로 위험한 길을 걷고자 자처하는 것이냐.”

칼릭스는 “예.” 하고 대답했다. 딱딱한 결심이 묻어 있었다. 그래야만 하는 때입니다. 리카르디스는 칼릭스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봤다.

그는 이런 표정을 하는 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할지, 어떤 결의를 가지는지 잘 알았다. 아주 예전의 로젤린이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자의 눈빛이었다. 단단하게 굳어 쉽게 부서지지 않는 종류의 마음이었다.

속이 갑갑해졌다. 정말 이 남매는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일방적인 희생을 건네받은 기분이 얼마나 엿 같은지 설명을 해 주고 싶지만…….”

“…….”

“우선적으로 이 말부터 하지.”

리카르디스는 벌떡 일어나서 탁자 한 편에 놓아 둔 화병에서 꽃을 확 뽑아냈다. 잇세리온이 악 소리를 냈다. 그 귀한 꽃을……!

리카르디스는 화병의 물을 받아 칼릭스의 이마에 철퍽하게 묻혔다. 물이 뚝뚝 콧날을 따라 떨어졌다. 갑자기 물세례를 받은 칼릭스는 눈만 깜빡거렸다.

“영광의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를 설원의 월계수, 리카르디스 다리우 일라베니아의 기사로 임명한다.”

“전하!”

잇세리온이 소리쳤다. 손뼉을 마주치지 않으면 그나마 불발이건만, 제대로 짝 소리가 나 버렸다.

“……솔직히 받아 주실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를 믿으시는 겁니까?”

리카르디스는 손에 묻은 물기를 칼릭스의 옷에 슥 문질러 닦았다. 그가 기가 막혀 하는 표정은 보이지도 않는 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우직한 성질 머리들은 잘 알고 있지. 그대가 간자가 되기 위해 허언할 성격도 아니거니와, 다른 건 몰라도 제 누이를 끔찍이 아끼는 것만은 알겠다. 그대의 손으로는 결코 로젤린 경을 위험에 빠트리지 못 할 테지. 나는 그대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두려움을 믿는다. 잃어 본 자들만이 아는, 두려움을 믿는다.”

“예, 전하.”

칼릭스는 고개를 깊게 숙이며 대답했다.

리카르디스는 이후로도 한참을 더 칼릭스와 얘기했다. 한 치의 변함없는 표정을 고수하는 두 남자 옆에서, 잇세리온의 얼굴만 핏기가 빠져나간 듯 새하얘졌다가, 새파래지기를 반복했다.

미지의 존재, 의태가 가능한…… 마력을 다루는…….

정보가 오고 갈 때마다 잇세리온이 ‘헉, 억!’ 따위의 감탄사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는 바람에 몇 번이나 중단 되었다.

칼릭스는 말하는 틈틈이 리카르디스의 반응을 확인했다. 이미 정보를 습득 했거나, 미리 짐작을 했다는 듯 침착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놀랍게도, 그는 칼릭스의 예상보다도 로젤린에 대해 많이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칼릭스는 홍차로 목을 축인 후, 잠시 손장난을 하며 머뭇거렸다.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전하?”

“얼마나 대단한 걸 물어보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나.”

“그, 대체 제 누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칼릭스는 드물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카르디스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제 누이가 전과 완전 별개의 존재임을 어찌 알았느냐고? 리카르디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모르는 쪽이 이상하지 않나? 사고 전까지만 해도 수습 기사들에게도 팔씨름을 지던 사람이, 기억을 잃고 난 뒤로는 암살자를 맨손으로 때려 잡고 제압하는데?”

“아버지께서 해명한 것과 같이 그저 마인임을 숨겨 왔다고는 생각 안 하십니까? 솔직히 제가 보기에는 그쪽이 더 설득력 있는 터라.”

리카르디스가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로젤린 경이 태어날 적부터 마인이라는 말을 했었던가.”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말을 이었다.

“단 한순간도. 로젤린 경이 정말 마인이었다면 세티스티아의 위험을 두고 보지는 않았겠지. 그녀와 내가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못했지만, 그런 점에 있어서는 신뢰할 수 있어.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칼릭스는 목이 잠긴 채 대답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예, 전하.”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함구하라.”

로젤린이 과거의 ‘로젤린’과 같은 존재가 아님을 자신이 알고 있노라 제 누이에게 알리지 말라는 얘기였다. 칼릭스는 입을 다문 채 그의 깊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리카르디스가 말하는 것으로부터 올 어떠한 이득이나 손실을 재어 보려 했으나 생각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그 또한 미지수였다. 그러나 그가 제 누이에게 해가 될 만한 무언가를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명 받듭니다.”

순순한 대답에 도리어 리카르디스의 표정이 미심쩍다는 듯 변했다.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뭐…… 그대가 어느 정도 나에 대한 믿음을 가졌노라 생각해도?”

리카르디스가 눈썹을 까딱하자 칼릭스가 살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될 듯합니다.”

“그것 참 영광인 걸.”

리카르디스의 빈정거림을 듣던 칼릭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귀한 분의 시간을 너무 뺏었군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클로에를 통해서 연락하도록 하지. 영지로 내려갈 건가?”

“아니요. 당분간은 수도에 머무를 예정입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칼릭스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카르디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방을 나섰다.

리카르디스가 피식 웃었다. 과연 붉은수레바퀴. 제 누이에 죽고 못 사는 모습을 보여도 실상은 전장에서 날뛰는 사냥개다.

‘처리해야 할 일이라…….’

리카르디스는 그 일이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칼릭스로부터 ‘로젤린’의 석연치 않은 죽음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뒤를 쫓은, 야수의 손을 가진 자가 있다는 것.

그는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천천히 머릿속에 광경을 그렸다.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람의 정체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여자, 남자? 나이는, 직위는, 목적은?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리카르디스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로젤린이라면 근무 중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지도, 다른 이의 천막을 함부로 드나들지도 않을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검지로 탁자를 딱딱 두드렸다.

‘그렇다면 임무의 연장선일 가능성이 크다.’

기사단장 스타스가 그녀에게 따로 임무를 내렸다는 얘기는 못 들었으니, 사냥 대회에서 죽은 부단장과 관련이 되어 있을 테다. 부단장이 그때 당시의 부단장 부관, 나단을 두고 굳이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는 얘기는…… 그 심부름의 대상과 로젤린이 친분이 있는 사이였을지도.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 순식간에 찢겨 나갔다 하시더군요.]

공격은 망설임이 없었다. 목표물이 절벽에서 떨어질 때까지의 집요한 추적. 단순한 쾌락 살인이라기보다는 목격자를 없애겠다는 목적이 분명하다. 정체를 숨기고 황성에 들어온 것 또한 단순한 흥미에 그치지 않으리라.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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