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흥미로운 소식이군. 이 주 전, 라고슈 왕국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정보를 잘 은폐했는지 이제야 소식이 들어왔어.”
칼릭스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일라베니아 제국 아래 발타 다음으로 가장 큰 왕국 라고슈. 현재 라고슈를 다스리는 바이페렘 플로에토는 암암리에 발타의 하카브 왕자와 은밀한 관계라는 말이 돌고 있는 여자였다.
“플로에토를 실각시키고 싶어 하는 무리가 있나 본데, 아마 좀 힘들 것이다. 사랑에 빠져 사리분별이 흐려졌어도 결코 세력이 약하지는 않으니.”
“……라고슈의 바이페렘이 하카브 왕자와 음……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입니까? 좀 상스러워 말을 잇지 못했으나 리카르디스는 여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 그런 사이다. 하카브가 어떻게 꼬여 내었는지 아주 죽고 못 살지. 올해 일라베니아의 건국제에 하카브가 온다고 했으니 깨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겠군. 불쾌하다. 내전이 길게 이어져서 플로에토가 못 오기를 바랄 뿐이다.”
“뭐…… 그런 식으로 일라베니아를 압박하려는 요량인가 봅니다. 일라베니아 측에서 라고슈를 경계하며 병력을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얻는 이득이 있을 테니까요.”
“내전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길 바라야겠군.”
리카르디스가 서류에 슥슥 몇 글자를 더하더니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아까보다 흥미로워 하는 기색이었다. 뭔가 급하거나 보다 더 중요한 안건이리라.
칼릭스는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리카르디스는 호오, 호.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비스타에서 귀엽고 예쁜 데다가 착하기까지 하고 돈도 엄청 많기로 유명하다는데, 알고 있었나?”
큽. 칼릭스는 역류하는 찻물을 겨우 삼켰다. 급한 서류가 아니었잖아! 아니, 라고슈 왕국의 내전이 발생했다는 중요한 안건 다음에 왜 저런 쓰잘머리 없는 것이 끼어 있어!
칼릭스는 매섭게 그를 노려봤다.
“제 뒷조사를 하셨습니까?”
“이런. 오해하지 말게. 로젤린 경의 소문에 딱 붙어서 와 버린 탓이니. 그래서 리쉬의 꿀은 맛있던가? 하나씩 먹어서는 성이 안 찰 텐데. 가는 길에 하나 선물하지. 이렇게 종이에 쌓인 꽃다발 말고, 유리병에 담긴 걸로다가.”
“…….”
이제는 대놓고 놀리고 있었다. 시장 거리에서 제 누이와 꽃을 물고 꿀을 쪽쪽 빨고 다닌 소식이 수도까지 진출한 모양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서류를 한 번, 그리고 칼릭스를 한 번 번갈아 보는 행동으로 그를 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읽던 리카르디스가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경의 누이가 힐리사고 왕국의 변방에서 크레안 티다니온의 현신이라고 불린다는군.”
정말로……? 칼릭스의 미심쩍어 하는 표정에 리카르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인가 보다.
“다행히도 나쁜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일라베니아에서 멀어질수록 크레안 티다니온의 악한 성향은 순화되고는 하니. 그저 대단한 신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아무튼 간에 이 소문은 좀 위험한 것 같군…… 흠. 잇세리온, 클로에에게 이건 일단 묶어 두라고 하지.”
“예, 전하.”
칼릭스는 지금 실시간으로 정보가 분류되어 퍼지게 되는 과정을 목격했다. 확실히 이 건은 수도에서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특히나 황제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만한 여지가 있었고, 그런 정보들은 뒤틀려서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칼릭스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황자가 제 누이의 울타리를 자처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눈앞에서 보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일개 호위 기사를 위해서 이렇게까지나 손을 쓴단 말인가?
칼릭스의 눈에 미심쩍은 빛이 올라오자, 리카르디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로젤린이 맹한 만큼 칼릭스가 배로 빠릿빠릿한 느낌이었다.
“이봐, 경.”
“예, 전하.”
칼릭스의 눈동자는 로젤린의 것과 똑 닮은 녹색이었다. 닮은 것은 색뿐만이 아니었던 건지 날카로운 눈매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물어뜯기도 좋지만,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눈앞에 있는 게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을 못하는 사냥개를 사냥개라 부를 수 있나?”
칼릭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일라베니아 황실의 사냥개. 번견으로 불리는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특성상, ‘개’나 ‘개새끼’ 따위의 말을 많이 들을 수밖에 없었으나, 보통은 당사자가 없는 뒷담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렇게 대놓고 들으니 감회가 새롭기도 했지만 우선적으로 열이 조금 올랐다. 리카르디스가 그의 표정을 보고 아차 하더니 혀를 찼다. 쯧.
‘아니 혀까지 차?’
칼릭스의 얼굴에 울컥하는 기색이 비치자. 리카르디스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오해는 하지 말게. 1황자 쪽 노친네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기분 나쁘게 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래. 경이 마음을 못 정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살짝 넘어왔다는 걸 머리는 이해하는데 아직 마음이 이해하지 못했나 봐. 계속 시비를 걸고 싶은걸 보니. 그대도 애매하게 선에서 놀지 말고 확실하게 태도를 정하는 게 좋겠어.”
꿀을 선물해 주겠노라 놀릴 때부터 유달리 공격적이더니 그런 속사정이 있었나. 칼릭스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그대가 비록…… 그다지 좋지 못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을지언정,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세상 아닌가. 아, 그렇다고 경과 내가 친구라는 얘기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말 하나하나를 참…… 칼릭스의 뚱한 표정을 본 리카르디스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칼릭스의 얼굴에서 로젤린이 보였다. 닮은 구석이 많은 남매였다.
“경은 로젤린 경과 아주 똑 닮았군.”
비웃음에 가깝던 입매가 부드러워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칼릭스는 자신을 쳐다보는 리카르디스의 모습에 놀랐다. 저런 눈빛을 하는 사람이었나, 저 사람이?
칼릭스는 제 마음에 여러 겹 방어벽을 둘러 두었다. 리카르디스가 이상한 방식으로 하나둘 깨고 들어왔으나 마지막 한 겹이 든든하게 버티는 중이었다. 이 마지막 벽은 무엇보다 두껍고 단단해 무엇으로 깨어 버릴 수 없다 생각했는데, 글쎄 이게…….
녹아 내렸다. 그의 미소에 사르르. 칼릭스는 제 표현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마음 깊숙이는 이해하지 못 했던, 믿지 못 했던 일말의 불신이 정말 눈 녹듯 흘러내려 어딘가로 떠내려가 버렸다.
단순히 제 누이를 위해 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명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저 믿음이 갔다. 그 담담한 말투 때문인지, 날카로우면서도 이따금 풀어지는 표정 때문인지, 누군가를 그리는 다정한 눈빛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리카르디스는 정확하게 폐부를 찌르는 말을 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칼릭스는 자신이 멍청하게 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아버지? 아직 제 손에 들어오지도 않은 붉은수레바퀴 가문? 그, 1황자 엘피디오? 아니면 그 엘피디오의 아버지인 황제? 그 누구도 정확하게 제 누이의 아군이 아니었다.
제 누이는 강했다. 하지만 그 강함이 귀족 세계에서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라는 무기를 쥐고 흔들기 위해 많은 자들이 손을 뻗칠 것이다. 칼릭스는 자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나의 힘만으로는 제 누이를 온전하게 지킬 수 없다.
로젤린은 언제나 누구도 손 내밀어 주지 않는 낭떠러지에 혼자 서 있었다. 그 아슬아슬하던 행위는 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끝맺어졌고, 칼릭스는 바보 같은 짓을 두 번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하다못해 손을 잡고 같이 떨어지는 일이라도 해야겠다. 이것이 더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마음은 단단하게 굳어졌다.
칼릭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사람의 이목이 확 집중되었다. 잇세리온과 리카르디스는 ‘칼릭스가 얼마나 로젤린을 닮았는가’에 대해 토론 중이었다. 칼릭스가 한쪽 무릎을 꿇자 리카르디스의 눈썹이 슥 들렸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 에스터가 설원의 월계수 앞에서 진실 된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미친…….”
이건 리카르디스가 한 말이 아니었다. 잇세리온이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그대로 흘려 버렸다. 리카르디스의 표정도 구겨져 있었다. 칼릭스는 두 사람의 경악 어린 시선을 뒤로 계속 말을 이었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는 검은 달을 가르는 이델라브힘의 검이 되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칼릭스 경! 인생은 너무나도 길고……!”
잇세리온은 어버버 말을 더듬으며 그를 만류했다. 칼릭스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리카르디스를 마주 보며 흔들리지 않았다.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는 약자를 보호하고 제국에 충성하겠습니다.”
리카르디스는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칼릭스 경. 이게 갑자기…… 아니, 내가 확실히 하란 건 그런 느낌이 아니라…… 알지 않나?”
“영광된 이델라브힘의 광휘 아래,”
“악! 미, 미쳤어! 미쳤나 봐! 칼릭스 경. 이게 무슨 의미인지……!”
두 사람의 동공이 점점 더 커졌다.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 명은 무릎을 꿇고, 두 사람을 벌떡 일어나 초조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우리 대화로 풀지! 경!”
“두 번째 월계수의 기사가 되어,”
“붉은수레바퀴 백작에게 이를 겁니다!”
아주 아수라장이었다.
“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낮지만 확고한 마침표였다. 그것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머릿속에 경종이 땡땡 울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