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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70화 (70/220)

70화.

그녀가 마인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상급 기사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얘기가 자자하게 공표된 날. 에버하르트는 지금과 같이 흥분하면서 “끝내주는데!”라는 말을 했다가 레티시아에게 얻어맞았다. 하여간 언동을 고급스럽게 좀 쓰라 했더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에 대한 감상은 몇 개월 주기로 바뀌고 있었다. 실력 없는 기사에서 죽음에서 생환한 자. 그리고 지금은 전장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마인이라는 점이 문제될 뻔했으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다른 기사단과 귀족들이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는 모습은 하얀밤 기사단을 하나로 뭉치게 함에 모자람이 없었다. 다들 속에서 부글부글 뭔가가 끓어올랐다.

아니, 기사가 충성심 뛰어나고 잘 싸우면 됐지! 마인이니 아니니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요즘도 촌스럽게 마인이 불길하다고 박해하는 그런 사람이 있었나? 어느 시대 사람이지, 당신은?

하얀밤 기사단원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그녀를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넣기에 급급했다. 욕해도 내가 해. 우리 하얀밤 기사단원을 왜 네가 욕해!

언제나 정중하고 고결했던 하얀밤 기사들이 시정잡배들처럼 껄렁한 폼과 빛나는 눈으로 사냥감을 물색하고 다녔다. 로젤린의 ‘로’ 자만 나와도 어디선가 하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귀신 같은 솜씨로 인해 모두들 입단속을 해야만 했다.

이번 사절단 임무로 한층 더 지위가 높아진 2황자의 직속 호위 기사단 ‘하얀밤’이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들썩이는 성을 안정시켜 놓은 당사자들은 더 이상 그녀를 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마인인 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2황자 전하께서 그녀를 받아들이셨는데 더 할 말 있느냐고 사람들을 겁박하고 다닌 게 자신들이 아니었던가. 다들 조금 찜찜해 할지언정 마인이라는 것을 문제 삼지는 못했다.

게다가 로젤린과 함께 싸운 하급 기사와 상급 기사들은 모두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다. 생환가능성이 거의 없던 2황자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 자체가 그 방증이었다. 아마 로젤린이 아니었더라면 피해는 더욱 컸을 것이며, 2황자의 안위도 장담하지 못 했을 테다.

로젤린과 직접 등을 맞대고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자들은, 아 역시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쩐지 세더라니 마인이었구나. 파편에 중독되고도 살아남더라니. 마인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상급 기사들의 얼굴에서는 다행이다, 라는 숨겨진 뒷말을 읽을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는 복도 사방에 고여 있는 물웅덩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저 창 너머, 멀리서 하얀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상기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연무장까지 흘러갔나 보다.

두 사람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까운 계단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릴 쯤엔 전부 정리가 끝났다.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복도에 햇빛이 쏟아졌다.

* * *

“붉은수레바퀴의 칼릭스가 설원의 월계수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하얀 밤을 부르는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일라베니아의 축복을 그대에게. 오랜만이로군, 경. 앉지.”

칼릭스는 리카르디스의 바로 맞은편에 앉았다. 딴눈을 팔면 안 되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이라니. 붉은수레바퀴의 후계자인 칼릭스가 발을 들일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군. 이 주 뒤쯤에나 도착할 줄 알았는데.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닌가?”

칼릭스는 여기서 황자가 걱정하는 사람이 제 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는 태연하게 잘도 묻고 있었다. 하기야 황자와 자신은 그런 시답지 않은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니긴 했다.

“많이 회복하셨습니다.”

“많이 회복했다는 건 무슨 뜻이지? 아픈 부분이 조금 남아 있다는 건가?”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완벽하게 건강한 상태이십니다.”

“식욕은?”

뭘 묻고 있는 거지, 이 황자는? 남의 누이 식욕 사정을 왜 저가…… 칼릭스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표정을 빤히 보고 있음에도 리카르디스는 뻔뻔한 낯으로 고개를 까닥이며 대답을 촉구했다.

“들르는 음식점마다 주방장이 인사 나올 정도는 되십니다.”

리카르디스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까랑 비슷한 행동인데 의미가 확연하게 갈렸다.

“아플 때는 잘 먹어야지.”

“그……렇습니다…….”

뭔가 이 말을 하려고 부른 것은 아닐 텐데도, 제법 진지한 태도를 보이며 묻고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도 그렇고, 황자도 그렇고. 까다롭고 까칠한 자들이 푸딩처럼 말랑말랑한 태도를 보였다. 이상했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로젤린 경은 소고기 파인가, 돼지고기 파인가?”

물론 이런 질문들은 영 이해할 수 없었으나 황자가 너무나도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어 그저 웃어넘기지 못했다. 대체 자신이 왜 2황자 리카르디스와, 2황자의 집무실에서, 제 누이의 식성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회의감이 몰려왔다.

칼릭스가 침묵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지자, 리카르디스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수석 비서관 잇세리온이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큼, 흠. 하면서 무형의 재촉으로 옆구리를 찌르기까지 하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칼릭스는 포기하고 열심히 과거를 돌이켜 보며 제 누이가 소고기 파인지 돼지고기 파인지를 판별했다.

“구워 먹는 건 소고기를 좋아하시지만 양념된 건 돼지고기를 조금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고기면 잘 드시는 편입니다.”

“생선보다는 육류겠지?”

“사실 생선도 좋아하십니다. 가시를 좀 거슬려 하시긴 하는데, 발라 드리면 잘 드십니다. 짭짤하고 쫄깃한 생선보다는 담백하고 부드러운 쪽을 선호하시고요.”

“질보다 양인가? 양보다 질인가?”

“기본적으로 양이기는 하지만, 최근 입맛이 고급스러워지셨는지라 어느 정도 질이 따라 주기는 해야 합니다.”

잇세리온은 진지한 표정으로 깃펜을 열심히 놀렸다. 칼릭스는 흘끗 그 종이에 써진 내용을 봤다. 방금 전에 자신의 입에서 나온, 이상하게 쓸데없는 그 정보들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회의 결과를 써 내려가는 듯 신중한 표정이었다.

“초콜릿과 생크림 중에서는?”

“생크림을 더 좋아하십니다.”

잇세리온은 그럴 줄 알았다며 칼릭스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내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칼릭스의 얼굴 위로 피곤이 오도독 돋을 때쯤이었다.

“그럼, 그녀는?”

“예?”

그는 잇세리온이 건넨 로젤린의 입맛 보고서를 눈으로 훑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누이는 무엇을 더 좋아하냐고.”

칼릭스는 집무실에만 들어올 때만 해도 마음에 단단히 울타리를 세우고 방패를 들고 있었다.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막아낼 만큼 공들여 세운 울타리였으나, 리카르디스의 이상한 질문 때문에 틈이 생겨 버렸다.

“그러고 보면 초콜릿 케이크를 자주 먹었지. 우리 세티스티아랑 같이.”

칼릭스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지금 리카르디스가 무엇을 말한 것인지 반추할 정신도 없었다.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세티스티아의 입맛에 맞춰 준건지 잘 모르겠어.”

칼릭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카르디스가 제 누이를 위해 밤낮없이 고생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 사실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2황자쯤 되는 위치라면 제 이득을 위해 약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을 테다. 지금 일라베니아에서 ‘마인 로젤린’은 좋은 패. 단순한 도구를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칼릭스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 아래 생각이 들쭉날쭉하게 뒤섞였다.

리카르디스는 그런 칼릭스를 잠자코 지켜보다, 깃펜을 들어 ‘소고기’라고 적힌 품목 밑에 ‘레몬 밤 마리네이드.’라고 적었다. 칼릭스의 딱딱하던 얼굴에 금이 갔다.

‘지금 뭘 적는 거야…….’

황당했다.

“7년이나 내 밑에 있었는데.”

“…….”

리카르디스가 엄지손가락으로 제 눈썹 뼈를 훑으며 말을 흘리듯 내보냈다. 칼릭스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 뭐랄까 그 표정이…….

양립할 수 없는 붉은수레바퀴의 자식에게 보여 줄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리카르디스가 자신의 울타리를 허물어서 속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있었다.

어딘가에 있을 제 누이를 끌어다가 보여 주고 싶었다. 하다못해 그림이라도 그려서 보관하고 싶었다. 기뻐하지 않았을까? 누이의 일생을 크게 차지하고 있던 그 사람의 한구석, 그 한 자락을 누이도 차지하고 있었네요.

칼릭스는 속이 울렁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조금 기쁜 것도 같았다. 칼릭스는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확연하게 기쁜 기색이 묻어 있는 목소리라 좀 창피했다.

“쌉싸름한 홍차와 달콤하고 고소한 쿠키의 조합을 좋아하셨죠. 브라우니도 좋아하셨을 겁니다.”

“그거 기쁜 소식이로군. 티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 할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니까, 또 억지로 먹였나 했지.”

리카르디스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는 세티스티아 황녀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게끔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 * *

리카르디스의 집무실을 찾아온 손님으로 인해 잠시 대화가 끊겼다. 칼릭스도 안면이 있는 자였다. 황금정원의 클로에. 황금정원 자작의 장녀이자, 큰뿔산양 레이몬드의 약혼자였다.

칼릭스가 가볍게 묵례했다. 클로에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는 서류 뭉치만 대충 리카르디스에게 전달하고 곧바로 방문을 나섰다. 레이몬드를 보고 가라는 그의 말에도 “바쁜 거 빤히 아시는 분께서.” 하는 대답만 남기고 사라졌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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