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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69화 (69/220)

69화.

일행은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칼릭스가 잎사귀 말 뱀 말린 걸 빻아서 어쩌구를 먹고, 울기 전.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쉬지 않고 달리던 때와 비슷한 속도였다.

로젤린은 칼릭스를 염려해 쉬어 가자고 했으나, 칼릭스는 초췌한 얼굴로도 멈추지 않았다.

* * *

놀랍게도 칼릭스는 살아서 수도에 도착했다. 그들의 행군은 과하게 빠른 감이 있었다. 칼릭스처럼 단련된 남자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다.

성문 앞에 도착하니 반가운 얼굴이 도착해 있었다. 레이몬드였다. 로젤린이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말 위에서 펄쩍 뛰어 날아드는 모습에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그녀를 받았다.

“위, 위험하잖아!”

로젤린이 아기 원숭이처럼 레이몬드에게 덜렁 안겨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레이몬드는 그녀를 끌어안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조금 더 쉬다 오지, 왜 이렇게 빨리 올라왔어! 얼굴 까칠해진 것 좀 봐. 아이고 내가 못 살아. 자기 전에 충분히 보습하라 그랬지, 내가. 하여간 좋은 거 사다 주면 뭐해! 바르지를 않는데!”

“발랐어.”

“이거 입에 침도 안 묻히고 거짓말하는 것 좀 봐!”

그는 로젤린이 생긋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몇 번 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를 꼭 안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계속 걸렸는데, 일주일 걸릴 거리를 사 일 만에 주파할 정도면 회복을 좀 과하게 했다고 해도 이상한 게 아니리라.

레이몬드는 그녀를 꼭 안은 채 시선을 돌렸다가 기겁했다. 말 위에 앉아 서슬 퍼런 눈빛을 하고 있는 칼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살이 쏙 빠져서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고, 눈 밑은 거뭇거뭇했다.

“카, 칼릭스?”

“경과 제가 이름만 부르는 친근한 사이었을 줄은 몰랐군요.”

심지어는 굉장히 까칠하기까지! 로젤린이 멀쩡하기에 눈치 못 챘는데, 역시 여행의 속도가 빠르긴 빨랐나 보다. 어린놈 답지 않게 언제나 냉철하던 칼릭스가 저렇게 흐트러질 정도면.

칼릭스는 “누님은 언제까지 안고 계실 작정이시죠? 그러다 엄한 소문이라도 돌면 책임지실 겁니까?” 하고 까칠함을 계속 과시했다.

뒤늦은 반항기가 도래한 걸 보니, 정말, 정말 힘들었나 보다. 레이몬드는 어설프게 웃으며 로젤린을 놓아줬다. 칼릭스의 까칠한 모습을 본 로젤린이 연장자한테 그러면 못쓴다고 훈계했다.

“네, 누님. 잘못했습니다.”

이 자식…… 선택적 까칠함이냐…… 레이몬드는 그를 눈으로 흘겼다.

로젤린은 먼저 단장실에 들러 복귀 보고를 해야 했다. 여행 내내 입고 있던 긴 후드에는 먼지가, 부츠에는 진흙이 잔뜩 엉겨 있었다.

로젤린은 그 꼴로도 태연하게 단장실로 향하려 했으나, 레이몬드가 기겁해서 말렸다. 기숙사 가서 제복으로 갈아입고 가야 한단다. 조금 귀찮았지만 인간 세상을 조금이나마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에, 로젤린은 그것이 필요한 과정이란 것을 인정했다.

기숙사에 도착했다. 로젤린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가에는 빗자루와 물 양동이가 놓여 있었다. 로젤린의 수습 기사, 레티시아와 에버하르트가 방을 부지런히 청소 하는 중인 듯했다. 슥슥 삭삭. 쉬지 않는 빗질 소리에 기합이 잔뜩 들어 있었다.

로젤린은 방문 바로 옆의 벽에 딱 붙어 조용히 숨을 죽였다. 조금 기다리니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닥을 울리는 소리의 무게. 걷는 습관과 보폭을 고려한 결과.

‘레티시아.’

그녀였다. 성큼성큼 소리가 다가왔다.

3.

2.

1.

쉬익!

눈으로 인지하기도 전에 로젤린의 손이 먼저 움직여, 빗자루를 들고 막 방을 나서는 레티시아의 목덜미로 향했다. 로젤린은 그녀의 완벽한 사각에 들어가 있었다.

수습 기사들을 교육하던, 다른 말로는 습격하던 초반에는 수도로 목덜미를 내려쳤다. 어느 정도 위기감이 있어야 한다는 로젤린의 판단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습격을 감행할 때마다 그들이 번번이 기절해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심지어는 반나절씩.

하루에 세 번 습격당한 에버하르트가 24시간 중 20시간을 누워 있게 되자 로젤린도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그냥 목덜미를 잡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수습 기사들이 기쁨의 눈물을 줄줄 쏟아 냈었다. 사실 그마저도 막는 것을 힘들어 했으나, 최근에는 제법 높은 수준으로 주위를 읽게 되었는데 상급자가 자리를 비운지 오래되어 해이해진 것은 아닐지.

로젤린은 평소보다 날카롭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옷자락이 흐트러지자, 그 미세한 소리를 들은 레티시아가 뒤돌아보지도 않고 빗자루를 등 뒤로 돌렸다.

탁!

로젤린의 공격이 정확하게 빗자루에 막혔다. 오, 제법인데. 로젤린이 씨익 웃었다. 레티시아는 사나운 얼굴로 뒤돌았다.

“누구…… 악! 로, 로젤린 경!”

레티시아가 공포인지 기쁨인지 모를 비명을 내뱉었다. 로젤린이 판단하기로는 공포 쪽에 좀 더 가까웠다.

“훌륭합니다. 레티시아.”

문밖에서 터져 나온 레티시아의 비명 같은 외침에 방 안의 에버하르트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로젤린은 그 순간 복도에 있던 물 양동이를 들어 그에게 냅다 던졌다. 에버하르트는 화살같이 앞구르기를 시전해서 양동이를 피했다. 멋진 솜씨였다.

그의 뒤에서 양동이가 구르며 굉음을 냈다. 에버하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른 힘을 이용해 부드럽게 일어났다.

“로젤린 경! 언제 오셨, 아니, 검은 달을 가르는…….”

“아, 검은 달을 가르는…….”

두 사람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경례를 먼저 해야 했는데 반가운 마음이 앞서 말이 횡설수설 두서없이 나왔다. 로젤린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훌륭해졌습니다. 저는 아직 복귀전이니 인사는 생략해도 좋습니다.”

로젤린이 없는 사이에도 열심히 수련한 것이 딱 티가 났다. 로젤린의 칭찬에 두 사람이 연신 몸을 들썩이며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들과 떨어져 있었던 게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쑥쑥 자라 있었다. 실력도, 육체적 성장도. 로젤린과 눈높이가 비슷했던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키를 넘어섰고, 진즉에 로젤린보다 컸던 레티시아도 훌쩍 자라 칼릭스와 비등할 정도였다.

“건강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생각보다도 빨리 돌아오셨군요. 혹시 몰라서 미리 청소해 놓길 잘했네요.”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는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밖에 없는데요.”

수습 기사들은 로젤린 옆에 딱 붙어서 조잘조잘 아기 새처럼 떠들어 댔다. 로젤린 경이 습격해 주지 않아서 좀 허전했다는 둥,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습격했다는 둥. 요즘 다른 수습 기사들이 우리들을 부러워 한다는 둥, 조금은 쓸모없는 내용도 있었지만 로젤린은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여 가며 반응했다.

로젤린은 깨끗해진 방 안을 보면서 후드의 끈을 풀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을 눈치챈 레티시아가 에버하르트에게 눈짓했다. 나가라는 뜻임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에버하르트는 뭉그적대며 방안을 떠나지 않았다.

“저도 키가 많이 커서 레티시아를 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레티시아가 저보다 더 자라더군요. 평생 지나도 따라잡기 힘들지 않을까요?”

별 쓰잘머리 없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로젤린은 옷을 벗는 걸 멈추지 않았다. 후드와 겉옷에 이어 이제는 셔츠에까지 손을 대고 있는 터라 레티시아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녀가 에버하르트의 갈비를 팔꿈치로 푹 찍으려 했지만, 피하는 것만은 이제 수준급이 되어 버렸는지 간단하게 막았다.

‘이게!?’

레티시아는 울컥해서 그를 밀어냈다.

“나가.”

“잠시만 좀 더…….”

“좀 더 보겠다고? 미친 거 아냐? 꺼져!”

“좀 더 얘기하겠다고!”

에버하르트는 밀려나지 않았다. 말라깽이 같던 예전에 비해, 근육도 키도 성장한 덕분인 듯했다. 이게 왜 버티고 난리야!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며 소음을 만들어 냈지만 로젤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로젤린 경, 비스타는 어떠셨어요?”

“맛있는 게 많았습니다.”

“아, 맞아요.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까 다른 지방의 음식들도 되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에버하르트는 레티시아에 의해 슬금슬금 밀려나면서도 끝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눈은 초롱초롱하고 얼굴에는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영웅을 만난 소년 같은 반응이었다. 로젤린을 존경해 마지않는 레티시아가 질릴 정도였다.

아직까지는 힘의 우위를 점하는 레티시아가 겨우 승리했다. 로젤린이 세 번째 단추에 손대기 전에 그를 몰아낸 것이다. 그녀는 로젤린의 제복을 챙겨 주고 나오자마자 에버하르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부, 부러져! 부러졌나? 부러졌어!”

“로젤린 경이 옷 갈아입는 방 안에 있고 싶으면 네 하잘 것 없는 걸 떼어 놓고 와…….”

살기 넘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에버하르트가 움찔했다. 하기야, 자신이 생각해도 좀 제정신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그런 얘기들을 다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뿌리들은 소탈한 영웅들을 좋아한다고 레티시아!”

“제국에서 긴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의 영애에게 소탈하다는 말을 잘도 붙이는구나.”

“전혀 권위를 세우시지 않는 분이잖아.”

에버하르트는 귀족답지 않다는 말을 재주 좋게 돌려 했다. 레티시아도 후 한숨을 쉬며 동의했다. 그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던가. 고생의 순간이 눈앞에서 아른아른했다.

에버하르트도 비슷하게 고생했지만 받아들이는 게 좀 다른 듯했다. 뿌리 출신이라 그런 것 같았다. 구색만 어설프게 갖춘 ‘뿌리’라는 가문 이름은 그들이 평민이라는 것을 전혀 가리지 못하고, 도리어 부각시키는 역할만 했다.

그들이 이 귀족 세계에서 천대받고 멸시받는 일은 전혀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뿌리들끼리의 연대 하나만큼은 끈끈했지만, 외부적으로 기댈 곳이 전혀 없었는데…….

대륙을 강타한 그 영웅담의 주인공이 제 상급 기사이니,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이다 보니 다가오는 게 남다른 듯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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