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68화 (68/220)

68화.

로젤린은 어쩐지 변명해야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손 쓸 방법도 없었다는 것까지. 칼릭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슥 쓸었다.

“그랬습니까.”

“으응.”

칼릭스는 이미 로젤린이 과거 제 누이의 기억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가르쳐 주지 않은 사소한 행동이라던가, 과거 그녀의 말투, 정보. 그것들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지금 그녀가 마치 자신이 겪은 일인 양 말하는 모든 것들이 ‘로젤린’의 기억으로부터 왔으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칼릭스는 아픈 사람처럼 온몸을 벌벌 떨었다. 로젤린이 그 떨림을 눈치채고 이름을 불렀다.

“칼릭스…….”

작은 말소리는 잔잔한 바람같이 포근했다. 로젤린. 제 누이였다. 칼릭스는 눈을 감고 그녀의 손등 위에 얼굴을 묻었다.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누님.”

“괜찮아? 약 먹을래?”

깜깜한 시야 위로 다정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칼릭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젤린이 제 무릎 위에 엎어진 칼릭스의 뒷머리를 살살 쓸었다. 곧게 뻗은 목덜미가 촛불에 희게 빛났다. 희게 질린 것일지도 몰랐다.

“무서우셨습니까?”

“응, 막, 심장이 쾅쾅하고 막.”

로젤린은 실제로도 제 심장을 쿵쿵 쳤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손에 얼굴을 묻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보지 못했지만, 울리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칼릭스는 상상했다. 로젤린의 말을 토대로. 어두운 숲속, 쫓아오는 추격자, 뛰는 심장, 두려움, 절벽. 찰나의 부유감.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로젤린이 가슴을 치는 것으로부터 오는 진동이 칼릭스를 크게 흔들었다. 쿵, 쿵! 마치 온몸을 두드려 맞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프셨어요?”

“아, 막 등이 찢겨서 피가 나고, 뼈가 막 부서져서…….”

찍, 마카롱의 소리가 시야 밖에서 울렸다. 로젤린은 어, 하면서 당황스러워하더니 말을 급하게 바꿨다.

“별로 아프진 않았어.”

신빙성 가는 말이 아니었다. 마카롱이 뭐라 언질을 준 것이리라. 마카롱은 제 누이보다 인간의 생태나 감정 따위에 더 밝았으니.

“진짜로.”

덧붙이는 말이 상냥해서 사랑스러웠다. 칼릭스는 울었다. 그 어두운 숲길을 달리던 두려움과,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미안했다. 혼자서 떨었을 누이가 가여웠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이 손길의 상냥함이 부디 누이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졌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칼릭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로젤린의 침대가 비어 있었다. 화장실 쪽에서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부은 눈을 비비며 침대를 내려가려던 칼릭스는 놀라서 제자리에서 펄떡 뛰었다. 침대 아래에 물컹한 무언가가 있었다. 완전히 밟기 전에 눈치챈 것이 다행이었다.

로젤린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는지 바닥에서 이불을 꼭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며칠 노숙하는 동안에 그녀가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피로가 오늘와서야 퍼진 것인지 도로롱 도로롱 고른 숨소리를 내며 깨지 않았다.

칼릭스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어 침대 위로 옮겼다. 물론 로젤린이 이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상대가 칼릭스라는 것을 알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칼릭스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되짚었다. 확실히 제 누이의 죽음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는 생각해 왔다. 왜 하필 그 절벽에서? 전투가 일어난, 막사의 정 반대편에서 왜 혼자? 칼릭스가 아는 로젤린은 적을 눈앞에 두고 도망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이라. 사람의 팔에 달려 있는 마수와 동물의 손. 확실히 기괴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만으로는 제 누이가 도망쳤다는 행동을 설명하기 힘들었다. 무언가가 더 있다.

벌컥.

방의 문이 열렸다. 낯선 남자가 태연하게 방 안에 발을 들였다. 칼릭스는 의자 위에 걸쳐 놓은 검집을 재빠르게 잡아챘다. 스릉, 순식간에 날의 형태가 반쯤 드러나 아침 햇살에 예리하게 빛났다.

“좋은 아침.”

남자는 칼릭스의 경계를 담담히 흘러 넘겼다. 태연자약하게 작은 침대에 걸터앉기까지 했다. 칼릭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날카로운 인상이 분위기에 힘입어 더욱 흉흉해졌다. 남자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부스럭거리면서 빵과 과일을 꺼내었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침입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태연했고, 방을 착각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혹시? 칼릭스는 이 방에 없는 한 마리를 떠올렸다.

“……마카롱 님……?”

남자는 사과를 한입 베어 물더니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 드럽게 맛없네. 이건 너 먹어라.”

그러고는 한입 베어 문 사과를 던지는데…… 마카롱이다. 이 남자는 분명 마카롱이었다.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큼지막한 사슴 고기가 들어간 스튜가 먹고 싶어서. 잠시 나갔다 왔지. 네 돈 좀 썼다?”

“아…… 예, 뭐…….”

그러고 보니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이 낯설지 않더라니…… 칼릭스의 눈빛을 느꼈는지 마카롱이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빵을 씹다가 다시 말했다.

“옷도 빌렸다?”

“아…… 네…… 뭐…… 그런데 왜 굳이 남자 모습으로……?”

“여자 혼자 다니면 피곤한 일이 많아.”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카롱은 제 누이보다 인간에 대해 잘 아는 듯했다. 제법 세심한 부분까지.

“이 남자는 친구랑 놀러 왔다가 호수에 빠져 죽었지. 친구가 등을 밀더라고. 호수에서 기어 나오는 걸 발로 막 짓밟고…….”

“아뇨, 보통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부르진 않죠.”

칼릭스는 속으로 남자의 죽음을 잠시간 애도했다. 마카롱은 체리를 한 알 먹더니 오, 하며 감탄했다.

“이건 맛있네. 로젤린 줘야지.”

“…….”

요즘 따라 제 취급이 한없이 낮아지는 기분이었는데, 단순한 기분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마카롱 님.”

“부르지 마라. 그래봤자 안 줄 거니까.”

아니 저 인간이 정말…… 체리를 먹고 싶었던 게 아닌데도 칼릭스는 울컥했다.

“어제 누님의 말…… 기억하시죠.”

남자가 체리의 씨를 불량스럽게 바닥에 툭 뱉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태도에 비하면, 그의 눈은 착실하게 칼릭스를 담고 있었다.

“누님이 전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그 자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선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란 건 부정할 수가 없군요. 살아 돌아온 누님을 제거하려는 행동을 할지도 모릅니다.”

마카롱이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웃었다.

“어려울 텐데.”

이 종족…… 자신감이 정말 넘쳐 난다. 칼릭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위험 요소를 주위에 둘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누님께서도 기억해 내신 만큼 경계할 테지만, 상황상 나서기 힘든 경우도 있을 테니, 마카롱님께서 잘 좀 봐주시죠. 혹시 누군지 알아내신다면, 저에게 꼭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맡겨 놨냐?”

“꼭 좀 부탁드립니다!”

칼릭스가 울컥해서 외치자 마카롱이 낄낄 웃었다. 마카롱은 봉투를 뒤적이며 빵을 꺼내더니 쭉 찢어 먹기 시작했다.

“뭐, 기본적으로 그놈이 다른 인간들을 죽이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저거는…….”

마카롱이 말한 ‘저거’는 빵 냄새를 맡고 비틀거리며 일어나고 있는 로젤린이었다. 머리는 산발을 해서는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마카롱이 애잔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많이 모자라니깐…….”

로젤린이 고소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빵으로 손을 뻗쳤다. 마카롱이 그녀의 손을 찰싹 쳤다.

“드러운 기지배. 세수하고 손 씻고 와!”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로젤린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낯선 남자가 마카롱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 같았다. 로젤린이 마카롱의 말을 따라 세수하러 몸을 일으켰다.

그녀를 바라보던 마카롱이 고개를 돌려 칼릭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남자의 눈동자가 맹수의 것처럼 쭉 찢어져 있었다.

“건드리면 곱게는 못 죽지.”

농담처럼 가벼운 어조임에도 오싹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는 것 같아 말해 주겠는데…….”

“네.”

“저게 저렇게 진짜 심각한 수준으로…… 좀 거시기 해도.”

남의 누이를 이거 저거하면서 거시기 하다며 욕하는 통에 칼릭스는 뚱해졌다. 마카롱이 피식 웃으며 칼릭스의 볼을 꼬집었다.

“쟤 마력이 제법 대단한 수준이라서 말이지. 어디 가서 쉽게는 안 당할 테니까, 안심하라고.”

로젤린, 제 누이가 강하다는 것쯤은 이미 칼릭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마카롱이 말하는 것은 그것과는 또 궤가 다른 이야기인 듯했다. 마카롱이 중얼거렸다.

“이상할 정도로 마력이 강하단 말이지…….”

“마카롱 님보다 말입니까?”

“아아니?”

아, 역시 마카롱이 더 강한 것인가? 칼릭스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마카롱이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나를 포함한, 이때 동안 만난, 마력을 가진 모든 것들 중 가장.”

칼릭스는 그의 말을 곰곰이 되뇌었다. 마력을 가진 모든 것들 중, 가장 마력이 강하다? 칼릭스는 알 수 없는 세계라 하더라도, 마카롱의 말이니 믿을 수는 있었지만…….

칼릭스는 고양이 세수를 하고 나온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눈은 퉁퉁 부었고, 머리는 산발이었다. 마카롱이 로젤린을 맹한 어린아이 다루듯 할 때마다 칼릭스는 번번이 울컥해했지만, 실은 그 또한 제 누이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 취급을 했다.

그저 먹을 거 좋아하고, 예쁜 것도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로젤린. 그런 그녀가 매우, 굉장히, 엄청나게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마카롱이 로젤린의 산발이 된 머리를 하나로 땋았다. 로젤린은 체리를 먹다가 화색을 지었다. 맛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칼릭스는 마카롱이 던져 준 맛없는 사과를 먹었다. 곧 로젤린이 그의 입에 체리를 넣어 줬다. 달콤하고 맛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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