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혀를 마비시킬 정도의 저릿한 쓴맛과 비린 맛의 환상적인 조화였다. 절로 눈물이 나왔다. 칼릭스는 너절해진 낯으로 입가를 쓸며 제발 천천히 가자고 부탁했다. 요즘따라 울 일이 잦았다. 그것도 주로 로젤린, 제 누이와 관련된 일로만. 로젤린이 칼릭스의 눈물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동생의 눈물 때문인지 로젤린은 자주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타인과 함께하는 여행의 속도를 깨우친 듯했다. 밤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마을이 보이면 적당히 잘 곳을 찾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큰 영지에 도착할 쯤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늦은 밤이라 불빛마저 잠들어 있었으나, 타지의 손님을 반기는 여관들이 바다의 횃불처럼 길을 안내했다. 멀리 있는 여관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던 때였다.
로젤린이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계속 좌우를 훑었다. 그녀의 행동을 칼릭스가 주시했다. 길이 좁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주위에 있는 것도 아닌 한적한 밤 거리. 그녀가 신경 쓸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칼릭스는 로젤린의 감각이 일반적인 인간이 느끼는 범위보다 훨씬 폭 넓고 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 그녀만 감지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인가?
칼릭스가 급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누님?”
로젤린은 평소보다 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날카로운 눈빛은 흐릿한 빗줄기 너머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는 했지만 칼릭스는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된 행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시점부터 급격하게 말수가 줄기 시작했었다. 비를 싫어하시나?
빨리 어디든 들어가서 그녀를 쉬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칼릭스는 로젤린이 타고 있는 말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하늘을 날고 있던 마카롱이 슬슬 쉬기 위해 내려왔다.
“마카롱 님. 저한테 오세요.”
로젤린의 주머니로 들어가려던 독수리가 삐애애액 울부짖으며 칼릭스를 위협했다. 대놓고 불만스러워 하는 모습에도 칼릭스는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누님이 피곤하시니, 어서 이리 오세요.”
마카롱은 로젤린의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며 그녀를 살펴보더니 순순히 칼릭스에게 왔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진짜 상태가 안 좋잖아?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칼릭스는 그녀의 이상 상태가 혹시나 ‘그것’들의 특성인가 생각했지만, 마카롱의 상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마카롱이 쥐로 변해서 칼릭스의 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간식으로 넣어 둔 땅콩 몇 알을 먹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과 한 마리를 뒤로 하고 로젤린은 말고삐를 꽉 쥐었다. 그녀의 감각이 넓게 열렸다.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주위를 떠돌았다. 골목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다. 집집마다 울려 퍼지는 말소리와 웃음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로젤린은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빗소리와 희미한 몇 개의 불빛.
기시감이 들었다. 겪어 보지 못했으나, 가슴을 두드리는 이 불안함과 온몸을 눅눅하게 만드는 습기가 익숙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로젤린은 후드를 더 꾹 눌러쓰고 말을 재촉했다.
일행은 곧 여관에 도착했다. 칼릭스가 일꾼에게 말을 맡기는 사이, 로젤린이 먼저 건물로 향했다. 빨리 안에 들어가서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로젤린이 여관의 문고리를 잡았다. 물에 젖어 한층 차가워진 온도가 로젤린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끼이익…….
낡은 문이 열렸다.
어둠이 깔려 있는 밤, 문을 경계로 빛이 쏟아졌다. 환한 배경 가운데로 역광으로 검어진 사람의 인영이 흔들렸다. 로젤린은 숨을 멈췄다.
쾅!
굉음이 울렸다. 마침 여관 밖을 나서려던 남자가 로젤린에 의해 흙탕물에 처박혔다. 남자는 일격에 기절했고, 그 남자를 기절시킨 장본인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깜박 깜박거렸다.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듯했다.
물론 뒤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칼릭스는 그보다 더 당혹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춰 서 있었다.
‘혹시 저 남자가 암살자였나? 그런 것치고는 너무 당황하시는데?’
칼릭스의 미심쩍은 눈빛에 로젤린이 들고 있던 주먹을 슬그머니 내렸다.
“아, 실수였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로젤린의 재빠른 사과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일행은 노발대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칼릭스는 몇 번이나 죄송하다 거듭 사과하고 물질적인 보상을 했다. 일행과 그 당사자는 싱글벙글한 낯으로 사람이 놀라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느냐 했다. 로젤린은 그 긴 피해 보상의 시간동안 그저 멀거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렸다. 로젤린은 갑자기 떠오른 기억을 여러 번 반복하며 형태를 다듬었다. 점점 선명해졌다.
조용한 숲을 울리는 빗방울 소리. 어두운 밤. 빛이 쏟아지던 작은 공간. 그 빛 사이에 있는 남자. 우연히 맞물려진 상황이 로젤린의 안에 깊게 가라앉아 있던 몇몇 단편적인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로젤린’의 기억은 절벽 아래로 떨어진 시점부터 거슬러 가기 시작했다. 발밑이 꺼지는 공포를 느꼈고, 어두운 숲을 달리고 있었고, 넘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로젤린’은 숨소리를 죽인 채 막사 앞에 서 있었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천막의 틈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로젤린’의 시야가 흔들렸다. 하얀 털로 뒤덮인 야수의 손과 날카로운 손톱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젤린’이 헉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순간 미동도 없던 누군가의 거대한 손이 꿈틀, 움직였다.
기억이 다시 순서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로젤린’은 급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천막이 펄럭이며 바람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쫓아 온 자의 공격으로 인해 등이 찢긴 채 앞으로 넘어져 몇 번을 굴렀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밟으며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달린다. 그리고 예정대로 절벽에서 떨어진다. 모든 것이 어두워진다.
로젤린은 인간이 된 이후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고는 했으나, 그렇게 두려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아주 강렬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그녀가 주먹을 냅다 질러, 남자가 화려하게 날아감과 동시에 부서졌다. 그 거친 움직임으로 로젤린의 후드는 벗겨진 상태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투두둑. 혼란은 부서지고 차가운 물줄기가 현실을 상기시켰다.
로젤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황실에 ‘그것’이 있다. 로젤린을 죽이려 하던 ‘그것’이.
* * *
칼릭스가 무서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막 씻고 나온 로젤린은 칼릭스를 보자마자 다시 들어가서 씻고 싶어졌다. 마카롱은 가라앉은 방 안의 기류를 읽고 조용히 칼릭스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로젤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칼릭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칼릭스의 이런 표정을 잘 알고 있었다. 붉은수레바퀴 저택에 있을 때, 무언가를 깨트려 날카로운 조각에 다치거나, 목욕하고 머리를 안 말리고 나오면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요?”
로젤린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칼릭스를 흘겨봤다. 나도 다 사정이 있었던 건데. 하지만 칼릭스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지 재차 물었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요, 누님? 어떻게 된다고 했지요, 제가?”
“무서운 곳에 간다…….”
“네, 그렇습니다. 그럼 누님도 무서운 곳에 가야겠군요.”
칼릭스가 벌떡 일어나 로젤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디든 끌고 가려는 시늉을 해서 로젤린은 몸에 힘을 딱 주고 버텼다. 큰 돌덩이처럼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무서운 사람들 보고 와서 누님 잡아가라고 해야겠습니다. 여기요! 무서운 아저씨!”
칼릭스가 왁 소리를 지르자 로젤린은 기겁했다. 마카롱도 펄쩍 뛰면서 칼릭스의 목덜미를 찰싹찰싹 쳤다. 꼭 그럴 것까지야 있느냐며 말리는 느낌이었다.
“나쁜 사람인 줄 알았어!”
칼릭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쁜 사람……?”
그의 목소리가 조금 풀린 것을 느낀 로젤린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서워서 그랬는데. 일부러 그런 거 아니고. 진짜 실수. 그래서 진심으로 사과도 했는데…….”
그녀의 말에 칼릭스는 당황했다. 로젤린에게 무섭다는 감정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으음, 신음하고는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왜 무서우셨습니까?”
칼릭스는 침대에 앉아 있는 로젤린을 올려다 볼 수 있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로젤린의 손이 차가워, 칼릭스는 그녀의 손을 슥슥 문지르며 제 체온으로 덥혔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질문에 한참 동안 고민했다. 과거, ‘로젤린’의 기억. 기억에 실려 온 감정의 파편. 말로 풀어 설명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았다. 그녀는 인상을 쓰고 머리를 굴린 후 말했다. 몇 개의 촛불이 칼릭스의 눈에서 떠다녔다.
“나를 죽인 사람인줄 알고.”
칼릭스의 눈동자가 촛불을 집어삼키며 더욱 형형해졌다. 로젤린은 칼릭스의 손아귀 힘이 일순 강해진 것을 느꼈다. 잘못 봤다고 착각할 만큼 아주 짧게 몸이 덜컹이기도 했다. 칼릭스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게 잠겼다.
“……누님을 죽인 사람이, 있습니까?”
자상한 표정이었음에도 로젤린의 목 뒤로 소름이 돋았다. 두렵다기보다는 몸이 살기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어, 그러니까. 나를 죽인 건 아닌데, 그때 사냥 대회 날에…… 막 비가 와서.”
“네.”
로젤린은 더듬더듬 끊겨 있는 기억을 말했다. 칼릭스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네, 그랬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불타오르기도 했고, 차가운 무언가로 뒤덮이기도 했다.
로젤린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얘기했다. 또 다른 ‘그것’을 보았고, 존재를 들켰고, 비 오는 어두운 숲을 도망갔고, 떨어졌고, 나를 만났노라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