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66화 (66/220)

66화.

“누님, 붉은수레바퀴 가문 이름의 유래를 말씀해 보시겠습니까?”

로젤린의 교육 시간이었다. 시간이 남는 겸 부족했던 상식을 채우기 위해 칼릭스가 책상 앞에 앉았다. 어지간하면 제 동생의 말을 잘 따르는 로젤린도 공부 시간은 티 나게 싫어했다. 매번 도망가고 숨었지만, 그녀에 관해서는 통달한 칼릭스가 매번 찾아내었다.

이번에도 주방에서 주방장과 노닥거리던 로젤린을 칼릭스가 잡아 왔다. 책상 앞에 앉아서도 로젤린은 끝까지 딴청을 피웠지만, 칼릭스가 크레페 케이크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대치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카롱이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했다. 제 누이를 먹을 거로 교육하다니 저 자식도 좀 너무하다.

“전장의 수레바퀴.”

“훌륭하십니다.”

적군의 피로 물든 수레바퀴로부터 가문의 이름은 시작되었다. 과거 배운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지 로젤린은 금방 답을 내놓았다. 칼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쳤다. 마카롱은 침대 위를 뒹굴며 깔깔 웃었다.

“정말 너희들의 아버지와 딱 어울리는 가문 명이야.”

로젤린이 부상으로 기절해 있는 동안, 마카롱은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을 본 적 있었다. 정말…… 정말 너무 잘 어울렸다. 마카롱은 “이야, 이야.”, “진짜.” 따위의 감탄사를 계속 내뱉었다. 로젤린이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또 있어. 운명의 수레바퀴라고도 한 대.”

“잘도 끼워 맞추고 있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니야? 완전 웃겨.”

칼릭스가 의자에 앉아 뚱하게 쳐다봤다. 그 표정이 더 웃겨서 마카롱은 낄낄 웃었다.

* * *

칼릭스는 수도로 떠나기 전 로젤린이 보았다던 마인을 찾고자 했다. 검은달과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은 여전히 ‘파편’과 마력의 결정으로 탄생한 인위적인 마인 부대를 무기 삼아 지니고 있었다.

로젤린이 아무리 강하고, ‘파편’을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들 개인으로서는 해 낼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검은달에 속하지 않은 마인의, 마인들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인이 많은 비스타라고 해도 자신이 마인이라며 이마에 써 놓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기에, 우선적으로 로젤린이 얼굴을 알고 있는 소매치기 소년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칼릭스는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로젤린과 마카롱에게 이 건에 대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숨어 살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다 있는 거겠지.”

마카롱은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더니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칼릭스는 마카롱의 비협조적인 반응과 태도에 익숙해져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순순히 도와주겠다 하는 쪽이 이상할 것이다.

문제는 로젤린의 차가운 반응이었다.

“아니. 칼릭스, 나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아, 네. 죄송합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칼릭스의 입에서 저절로 사죄의 말이 나왔다. 그때 로젤린의 표정은 뭐랄까. 마음 속 깊숙이 무언가를 묻어 둔 사람 같았다. 그렇다. 사람 같았다.

칼릭스는 여러모로 충격을 받아, 두 번 다시 마인을 찾아보자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넉넉하게 잡아 뒀던 준비 기간이 단축되었다. 칼릭스가 오후에 곧바로 떠나자는 말을 꺼낼 즈음에는 로젤린은 평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됩니다, 도련님!”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기사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호위 없이 단 둘이 수도로 올라가겠다니, 이게 무슨 말인지! 기사들이 펄펄 날뛰었다.

“굶어 죽는 대신 산으로 숨어들어 도적 행세를 하는 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위험하시니 같이 가겠습니다.”

칼릭스는 그들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슬쩍 돌려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기사들의 시선도 그를 따라 돌아갔다. 남자들의 시선이 한 번에 모이자 로젤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였다.

나를 왜 봐? 응?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렇게 아쉬울 수가.”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이 두 남매를 배웅하기 위해 바쁜 일정 속에 짬을 내었다.

“나랑 칼릭스에게 줄 화관을 만들기로 약속했잖니, 로젤린.”

칼릭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울컥한 기색이 비치자 백작이 깔깔 웃었다.

“순탄한 여정이 되길 빌어. 네 주위에는 항상 사고가 끊이지 않으니 말이야. 다음에 만날 때까지 건강하렴.”

백작은 로젤린이 제 딸이라도 되는 마냥 애틋한 기류를 형성했다. 로젤린의 손을 잡고 연신 쓸더니, 끝에 가서는 와락 껴안기까지 했다. 백작이 로젤린의 품에 쏙 들어갔다. 로젤린도 어설프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너도 잘 가렴. 누나 손 잘 잡고 다니고. 페르탄에게 안부 전해 주고.”

백작은 이후 손을 휘휘 저으며 칼릭스를 배웅했다. 대접이 어마어마하게 차이 났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저 까탈스러운 성미의 백작이 누이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구나 싶을 뿐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준비한 마차 세 대는 로젤린이 사양했다. 너무 느리단다. 당연히 먹을 식량이며, 물이며, 옷이며 사람을 실은 마차는 말보다 느릴 수밖에 없다. 로젤린은 지금 그것을 다 버리고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수도로 갈수록 마을도 많으니 노숙은 별로 안 할 테지만 고생은 꽤나 할 게 분명했다.

“정말 안 챙겨 가도 되겠니? 힘들 텐데…….”

“네.”

로젤린이 당당하게 대답했고, 칼릭스는 울고 싶어졌다. 붉은수레바퀴 성에서부터 비스타까지 미친 듯이 달려온 그 추억의 날들이 다시 살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자, 칼릭스.”

무뚝뚝한 목소리 속에서 들떠 있는 그녀의 기분을 읽을 수 있었다. 칼릭스는 한숨을 삼키고 처진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로젤린은 말에 올라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는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어쩐지 길게 엮일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백작이 쪽 소리를 내며 손 키스를 그녀에게 날렸다. 그게 무슨 행위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나, 로젤린은 곧 어설프게 백작의 행동을 따라했다. 그게 어찌나 귀여웠는지 백작은 한참을 더 웃었다.

9

로젤린은 결코 지치지 않았다. 분명 같은 걸 먹었는데…… 양이 좀 많기는 했지만 아무튼 같은 종류였다. 칼릭스는 그럼에도 제 누이가 대체 뭘 먹었기에 저렇게 펄펄 날뛰는 건가 의문스러워졌다.

그녀의 조급함을 이해했기 때문에 하루 이틀 정도는 칼릭스도 최선을 다해 로젤린의 속도에 맞춰 말을 몰았다. 하지만 며칠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곧 한계를 맞이했다. 칼릭스는 창백한 얼굴로 헛구역질을 했다. 하도 달리는 말 위에 앉아 있다 보니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속이 다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태어나기를 강골로 태어나 그 아버지 밑에서 단련받았다. 전쟁도 겪어 봤고 일부러 몸을 괴롭게 하는 훈련도 수없이 했다. 그래도 평생에 걸쳐 감기 걸린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한 번도 심하게 앓은 적 없었는데. 고작 삼 일 만에 이 지경이 되다니. 삼 일 만에.

로젤린이 급하게 말을 세웠다. 잠시 신경을 못 쓴 사이 제 동생이 반쯤 시체 같은 꼴이 되어 있지 않은가. 하늘을 보니 해가 산 너머로 넘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해가 뜨기 전부터 달리긴 했지. 조금 오래 달렸나? 말도 힘든지 거친 콧김을 씩씩 내뱉는 중이었다. 오래 달렸구나…….

로젤린이 말에서 내려오자 칼릭스도 굴러 떨어지듯 내려왔다.

“괜찮아?”

칼릭스는 괜찮다는 말 대신 욱욱하는 헛구역질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로젤린은 제 수통을 열어 칼릭스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의 나머지 손 한쪽은 동생의 등을 두드리기도 하고, 그의 이마를 쓸어 넘기기도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이었다.

‘이제는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시는군요. 감개무량합니다…….’

칼릭스는 떨리는 손으로 물을 받아 마셨다. 하늘을 선회 중이던 마카롱이 나뭇가지에 가볍게 착지했다.

“뭐야, 얘 왜이래. 아픈 거야?”

“그런가 봐.”

“어디가?”

삼 일 동안 노숙하면서 세 시간만 선잠을 겨우 자고, 밤낮없이 미친 듯이 달리면 이렇게 됩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마카롱은 규격 외라고 하더라도 제 누이는 인간의 모습이라 방심했다. 그들은 전혀, 일말도 칼릭스가 왜 아픈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는 알더라도 그것을 공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쩌면 이렇게 허약한 생물이 있지? 라고 생각하는 눈빛들이었다. 마카롱은 칼릭스를 약골이라며 놀릴 생각에 내려왔지만, 그의 낯빛을 보고 심각해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인간들은 날붙이로 생긴 아주 아주 작은 상처로도 죽는 재주가 있는 종족이었다.

“죽지 마라.”

독수리의 눈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칼릭스는 새의 농담에 하하 웃다가 그 목소리가 한없이 진지한 것을 알아챘다. 진심이었나…… 그의 웃음이 뚝 끊겼다.

한 마리와 한 여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의사를 불러오느니, 몸에 좋은 약초를 찾아 오겠느니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칼릭스, 죽으면 안 돼……!”

마침 그들의 옆을 지나가던 상단의 마차가 멈춰 설 정도의 비통한 목소리였다. 상단주가 도움을 주겠다며 친절을 발휘했다. 칼릭스는 수치스러움에 발개진 얼굴로 사양했다. 말을 장시간 타다 보니 컨디션이 좀 안 좋아졌을 뿐이라고.

백발이 희끗한 상단주는 칼릭스를 무척이나 한심하다는 듯 눈을 흘기더니 매일 삼십 분 정도의 운동은 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칼릭스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괜찮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로젤린은 상단주에게서 괴악한 이름의 약을 몇 포 구입했다. 무슨 뱀의 꼬리를 말려 빻은 것이라나.

칼릭스는 약을 먹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반항했다. 하지만 인간 여자로 의태한 마카롱의 합세로 그 반항은 무의미해져 버렸다. 칼릭스는 자신보다 한참 가느다란 여자 두 명에게 붙잡힌 채, 무언가의 가루를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먹어야만 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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