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런데 나는 뭔가 더 있을 거 같다. 황금정원까지 움직이며 페르탄의 딸을 보호하고 있다더구나. 심지어는 안 하던 협박까지 하고…… 물론 축복의 밤을 위해서는 마인이 필요하니, 그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 리카르디스가 그녀를 단순히 도구로 보는 것 같지 않아.”
엘피디오가 서 있는 디에즈를 흘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눈높이가 비슷한 상대와 대화를 하는 걸 좋아한단다, 디에즈.”
자신이 올려다보는 상황이 기분 나쁜 듯, 엘피디오가 고상하게 명령했다. 디에즈가 무릎을 꿇었다. 두 손에는 공손히 재떨이를 들고 있는 채였다. 엘피디오는 그제야 만족한 미소를 보였다.
“세티스티아가 어릴 때부터 알아 왔다 하니, 오랜 인연이겠지. 리카르디스는 그래 보여도 좀 무른 구석이 있으니, 어쩌면 그녀를…….”
엘피디오가 웃었다. 눈동자가 뱀의 비늘처럼 번들거렸다.
“사람은 소중한 게 생기면 약해지기 마련이지. 내가 왜 널 부른지 알겠느냐?”
“…….”
“네가 붉은수레바퀴의 여식과 친하다지.”
“예, 형님.”
“역시 넌 쓸모가 있어.”
디에즈는 엘피디오의 무릎만 보며 말을 어물거렸다. 엘피디오가 담배 파이프를 강하게 재떨이에 툭, 떨어트렸다. 디에즈가 화들짝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틸렌드 그 병신 새끼보다 널 좋아한다고 했었지.”
3황자 틸렌드는 엘피디오의 동복동생이었다. 성격이며 외모며 그와 쏙 빼닮은 인물이었으며, 야망 또한 그에 뒤지지 않았다.
“너는 분수를 알아.”
엘피디오는 그 말을 하며 디에즈를 위아래로 훑었다.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재떨이 역할을 하는, ‘분수’를 디에즈에게 자각 시켰다.
“그래서 내가 널 좋아해, 디에즈. 내 말 알아먹었어?”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디에즈가 입술을 꽉 물었다. 로젤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성에 창백한 얼굴로 잠자고 있던. 그리고 더 과거의 일도.
어깨에 오는 짧은 머리의 그녀는 햇빛 아래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인다. 새삼스럽게 엘피디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소중한 게 생기면 약해지기 마련이지.]
디에즈는 지금 자신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깨달았다. 참담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왜 이러고 있는지 잊은 것도 아니건만, 그녀는 자신을 너무 약하게 만들었다.
“……형님.”
“그래.”
“저는 형님이 황금으로 빛나는 월계관을 쓰는 날을 항상 그리고 있습니다.”
엘피디오가 씩 웃으며 디에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날이 좋구나. 밖에 나가서 차라도 한잔하자.”
* * *
로젤린이 마른가시나무 성에서 눈을 뜬지 이 주 하고도 닷새가 지난 날이었다. 수도, 티가드에서부터 반가운 편지가 왔다. 몸이 다 낫거든 하얀밤 기사단에 복귀하라는 명령서였다. 로젤린이 편지를 받자마자 짐이고 뭐고 챙기지도 않고 떠나려는 것을 칼릭스가 겨우 말렸다.
칼릭스도 편지를 받았다. 리카르디스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황가의 인장이 떡하니 찍혀있는 서신을 받았음에도 칼릭스는 좀처럼 동요하지 않았다. 로젤린에 관해 할 말이 있다는 내용이었고, 칼릭스는 드디어 올 것이 왔노라 생각했다.
로젤린과 리카르디스의 만남은 생각보다 오래 거슬러 가야 했다. 하얀밤 기사단의 수습 기사로 입단 했을 때부터니, 햇수로만 7년이 다 되어갔다. 몇 없는 여자 기사라는 이유 때문에 로젤린은 입단하자마자 세티스티아의 호위가 됐었다. 세티스티아는 로젤린을 매우 좋아했고, 리카르디스는 제 동생이라면 끔벅 죽는 시늉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셋이 어울리는 시간도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세티스티아의 죽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한번 심하게 비틀렸지만, 로젤린은 그때에도 리카르디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노력으로써 이어진 시간이었다. 비록 그 속에 어떤 감정들이 얽히고설켰는지는 몰라도.
그러니 리카르디스가 그녀에게 아무리 무관심했더라도 이전의 로젤린과 현재의 로젤린을 같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테다. 기억상실이라는 어설픈 변명으로 눈을 가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칼릭스는 조금씩 닳은 그 한계가 지금에 와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고 생각했다.
리카르디스는 결코 아둔하거나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챘지만, 덮어 두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덮어 두고 있었다.
칼릭스는 제 누이가 파르딕트 경의 방패를 맨손으로 부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자자하게 퍼진 로젤린에 관한 소문 중 하나였으나, 칼릭스는 그 얘기가 진실임을 직감했다. 같이 듣고 있던 로젤린이 “맞아, 내가 부쉈어.” 하고 뿌듯하다는 듯이 얘기해서 칼릭스의 마음은 더욱 갑갑해져 버렸다.
파르딕트는 거친 뱃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고래무덤 가문에서도 독보적인 체구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파르딕트의 방패는 그보다도 더 유명했다. 명장 누구의 솜씨로 삼 년만에 태어난 걸작이라던가 뭐라던가. 사람들은 방패의 크기와 두께를 보며 놀라워했다.
그걸 맨손으로 부숴 버렸다는데…… 칼릭스는 그 얘길 듣고 마카롱을 조금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독수리 마카롱은 새의 대가리를 하고도 뜨끔하는 표정을 짓더니 모른 척 고개를 휙 돌렸다. 그때는 잠시 순찰중이라 같이 없었단다.
아무튼 그때, 파르딕트의 방패를 부수라 명령한 사람이 리카르디스라고 하니 이건 뭐 들킨 건 확정이었다. 그녀가 돌보다 단단한 물건을 파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하지만 칼릭스는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제 누이가 이 성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편안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 리카르디스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전대미문의 강력한 마인이 나타났음에도 주변의 시선이 나쁘지 않았다. 로젤린이 2황자를 구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이유를 전부 설명할 수 없었다. 나쁜 얘기가 나오려고 하면 어디서부턴가 정보가 미묘하게 비틀리며 순화되었다. 로젤린이 어릴 적부터 얼마나 총명하고 자애로웠느냐를 알 수 있는 과거의 사소한 얘기들이 골목 사이마다 돌아다녔다.
더불어 밝혀지지 않았던 2황자의 미담들 또한. 삼 년 전에 전국에 구휼미를 대대적으로 풀었던 모래절벽 자작이 사실은 2황자의 또 다른 신분이었다나 뭐라나.
대륙 여기저기에 손을 뻗은 거대한 상단의 주인이자, 돈이 흐르는 줄기를 따라 정보를 옮기는 황금정원 가문의 솜씨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 리카르디스가 있으니 그가 주도했다 말해야 정확할 지도 몰랐다. 2황자는 이런 여론 몰이를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누구의 손, 누구의 발을 빌렸는지 티 나게 행동하고 있었다.
로젤린의 뒤에 2황자 리카르디스가 있음을 알라는 얘기였다. 그와 그녀의 주적들에게.
일주일 전, 로젤린의 처우에 관한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리카르디스에게 모든 권한이 위임되었다는 소식을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칼릭스에게 전해 줬다.
“……만장일치가 말이 되나?”
칼릭스의 비서, 알터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웃었다.
“2황자 전하께서 생각보다 수완이 좋으신가 봅니다.”
1황자 파가 포진한 그 회의에서 만장일치라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는 것은 단순한 수완의 문제가 아니었다. 칼릭스가 알터를 흘끗 바라봤다. 알터가 눈썹을 까딱하며 알아온 또 다른 정보를 풀었다.
“회의가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몇몇 귀족 가문에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는군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공론화 시킬 수 없는…… 어, 그러니까 좀 구린 구석이 있는 부분들이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가문들은 우연히도 전부 1황자 파에 속하는 귀족 가문들이었다고 하는군요. 덕분에 회의에서 힘 뺄 여력이 없었고요.”
“그것 참 공교롭게 되었어.”
“대단히 굉장한 우연이죠.”
칼릭스는 알터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좋은 결과였으나, 과정이 생각보다 거칠었다. 다소 소극적이게 방벽만 쌓던, 여태껏 리카르디스가 해 온 방식과는 달랐다.
칼릭스는 그 남자를 변화시킨 것이 어쩌면 제 누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 얼토당토않은가 싶다가도, 그의 행보를 보고 있자니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닌 듯도 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지 리카르디스는 울타리 밖을 서성이던 제 누이를 확실하게 그의 영역 안으로 집어넣고 보호했다. 그 덕분에 칼릭스는 편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그런 것처럼 칼릭스도 그에게 볼일이 있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어찌 되었건 좋은 기회였다.
칼릭스는 편지를 품 안에 넣었다.
“수도까지 긴 여행이 되겠군요, 누님. 채비를 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가는 거야? 에스터는?”
칼릭스는 감격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인 아버지도, 자신도 없는 영지를 걱정하는 제 누이의 발전이 너무나 대견했다.
“붉은수레바퀴 산하의 붉은말 남작가가 맡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아, 마르슈 아저씨가.”
로젤린은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릭스는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말 자작에 관해서 내가 일러 준 적이 있던가? 곧바로 창밖에서 마카롱이 날아오자 그의 신경은 금세 다른 곳으로 돌려졌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님께 부탁해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응.”
로젤린이 더없이 해맑게 웃었다.
“그럼 하던 걸 마저 할까요?”
칼릭스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턱 펼쳤다. 로젤린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