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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밤-62화 (62/220)

62화.

“괜찮아.”

쥐, 아니 마카롱을 보니 두 발로 펄쩍펄쩍 뛰며 제 누이를 위협…… 뭐 비슷한 것을 하는 중이었다.

“아냐, 안 그래. 우리 칼릭스 착하고.”

칼릭스가 그 말에 남몰래 씨익 웃는 모습을 보고 마카롱은 아주 기가 찼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건 이 집안의 특성이었나?

마카롱은 콧방귀를 뀌더니 세상 다 산 노인 같은 발걸음으로 털레털레 바닥으로 내려갔다.

“맙소사…….”

칼릭스의 입에서 신음이 섞인 감탄이 튀어나왔다. 작은 짐승이 검게 물들더니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 같았다. 짙고 검은 안개는 폭발하는 듯 부풀었다가 인간의 형태로 빠르게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 숨 쉬면 저런 모습이 되는 걸까. 기이한 광경이었다.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린 그림자의 등이 느릿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생동감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상반신을 일으키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것을 기점으로, 손끝, 발끝부터 검은색이 사라져 갔다. 칼릭스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감고 있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회색의 눈동자가 칼릭스를 똑바로 마주했다.

아담한 체구의 갈색 머리 여자였다. 로젤린이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마카롱이 자연스럽게 로젤린의 시중을 받았다.

“뭐든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라.”

여자가 갑작스레 말을 시작했다. 잠시 중단되었던 대화를 이어가는 듯 자연스러웠다. 옷매무새의 정리가 끝나자 여자가 목 뒤로 손을 집어넣어 옷 속에 들어가 있던 머리카락을 빼내었다. 로젤린의 겉옷 위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스르륵 흩어졌다.

“절대적인 신뢰도 영원한 관계도 없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쪽이지.”

마카롱은 칼릭스의 바로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로젤린의 식은 홍차로 목을 살짝 축인 후에 빙그레 웃었다.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칼릭스는 어색하게 제 손을 매만졌다.

“그래서 네가 무엇이건 간에, 너도 믿지 않아. 착하고 예쁜 칼릭스.”

“……네.”

여자의 얼굴은 부드럽고 가는 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순하고 약한 인상이라 평할 수 있었으나, 회색 눈동자가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어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키는 건 어렵고 버리는 건 쉽지. 부디 네가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뭐랄까, 그렇게 되면 내가 너의 인생을…… 매우 어렵게 만들어 버릴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드네…….”

마카롱은 제 관자놀이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가의 어려워진 미래를 훔쳐보는 점쟁이의 고뇌 같았다.

감정은 생생하고 행동거지도 자연스러웠다. 과거의 야생동물 같던 로젤린이 수많은 교육과 경험을 거쳐 훌륭하게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긴 했지만, 마카롱은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인간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칼릭스는 첫 만남에 악담을 퍼붓는 그녀의 행동을 미처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마카롱의 모든 면이 놀라웠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얼씨구, 대답은 잘해요.”

마카롱이 빈정대는 것을 듣고 로젤린이 내 동생 괴롭히지 말라며 끼어들었다. 칼릭스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제 누이를 바라보았다. ‘내 동생’ 그 세 글자에 칼릭스의 속이 간질간질해졌다.

마카롱이 기가 찬다는 듯 환상의 한 쌍을 번갈아 보았다.

“이것들이…… 놀고 있네…….”

“그런데 저…….”

칼릭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카롱이 눈썹만 까딱이며 계속해 보라는 뜻을 내보였다.

“이럴 때 할 말은 아닌 건 알지만…….”

“왜 이렇게 사족이 길어?”

칼릭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마카롱이 본명이십니까?”

“……잘도 본명이겠다, 그렇지?”

마카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칼릭스이 머쓱하게 제 목을 쓸었다.

“우리에게는 이름이 없으니깐 말이야, 그저 편의상으로 얘가 갖다 붙인 거지.”

“왜 이름이 없습니까?”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모든 사물에는 으레 이름이 있기 마련이니. 마카롱은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고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상한 걸 다 묻네. 부를 필요도 없고, 불릴 이유도 없으니까.”

이름이 없는 무언가와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복잡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게 아닌가. 마치 심장이 없는 사람을 보는 듯했는데, 그 심장이 없는 사람이 ‘없어도 잘 살아 있으니 굳이 심장이 있을 필요는 없잖아?’라고 말하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다소 기괴하기도, 서글프기도 했으나 말하는 당사자가 보통 태연한 게 아니라, 그저 그런가?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특별하게 너는 마카롱 경이나 마카롱 님이나 둘 중에 하나로 부르는 걸 허락해 주마. 로젤린 동생만 아니었어도 너는…… ‘마카롱’의 ‘ㅁ’도 부를 깜냥이 안 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명심하고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해.”

“……예, 마카롱 님…….”

또한 유명 디저트의 이름을 극존칭을 사용해서 불러야 한다는 그 이상한 기분 때문에, 칼릭스는 앞선 싱숭생숭한 의문은 곧 잊게 되었다.

* * *

덜컹 덜컹.

마차가 작게 흔들릴 때마다, 소년은 창문에 바싹 붙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좋은 마차는 처음이었다. 소년이 전에 타 본 마차들은 죄다 쿠당탕, 덜커덕덜커덕! 하는 둔중한 소리가 났다. 몸이 둥실 떠오르고 구석으로 처박히는 일 또한 예사였고.

그런데 이 거대한 마차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이 거친 길을 달리면서도 고작 덜컹, 덜컹 정도의 소음과 가벼운 흔들림뿐이었다. 그마저도 부드러운 시트가 다 흡수를 하고 있어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 위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리카르디스.]

앞에 앉아 있던 여인이 소년을 불렀다. 소년이 고개를 돌리자 어깨까지 오는 은발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네, 어머니.]

[티아 좀 안고 있어 주겠니?]

곱슬거리는 은발의 어린 소녀가 그녀의 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손을 뻗어 동생을 건네받았다. 네 살이 되어 부쩍 무거워진 동생을 리카르디스가 낑낑거리며 고쳐 안았다. 세티스티아가 그의 품에서 칭얼거렸다. 말랑말랑하고 따끈한 동생에게서 우유 냄새가 물씬 풍겼다.

리카르디스가 미소 지으며 세티스티아의 등을 토닥였다. 그 사이 여자는 옆에 앉아 있는 청년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오늘 안에는 도착 하겠니, 잇세리온?]

[예, 주인님. 해가 지기 전에는 황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요.]

[별다른 일이라.]

그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를 호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 붉은수레바퀴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검은 머리에 녹색 눈, 한쪽 눈을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까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지만, 마차만큼이나 거대한 덩치가 그 흉흉한 인상에 한층 더 힘을 실었다. 마차를 호위하는 책임자로 뽑힌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페르탄이 마차에 가까이 접근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밀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별 다른 일은 없나요?]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그것 참.]

밀리아가 탄식했다

[안타깝군요.]

별다른 일이라도 있길 바랐건만. 그녀의 옆에서 잇세리온이 허둥지둥하다 그녀의 소매 자락을 슥슥 당겼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고 말리는 모양새였다. 밀리아가 호호 연극적으로 웃다가 별다른 일이 생기면 꼭꼭 알려 달라 말했다. 페르탄은 고개를 살짝 까닥이고는 다시 물러났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주인님!]

[왜 화를 내고 그러니, 잇세리온.]

[저, 저분이 누군지 아시잖아요. 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왜 모르겠어. 황제 폐하의 충실한 개잖아.]

[주인님!]

잇세리온이 비명 지르듯 그녀를 부르자 밀리아가 검지를 제 입술 위에 가져다 대었다. 잇세리온이 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아가씨의 단잠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카르디스는 두 사람이 아옹다옹 다투는 모습을 보다가 잠들었다. 깨어나 보니 세티스티아는 다시 밀리아의 품 안에 있었고, 자신은 잇세리온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리카르디스가 눈을 슥슥 비비자 잇세리온이 곧바로 잔소리를 했다.

[비비면 안 됩니다 도련님. 눈 나빠져요.]

[응…….]

[좀 더 주무세요.]

잇세리온이 리카르디스의 등을 쓸며 다시 재우려 하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얼마나 왔어?]

[이번에는 정말 거의 다 왔어요.]

리카르디스는 다시 창문에 후다닥 붙었다. 아까와 풍경이 달랐다. 풀과 나무 대신, 반듯한 건물들이 군집해 있는 깨끗한 거리였다. 변방의 작은 영지에서 살던 리카르디스에게는 모든 것이 크고 멋있어 보였다. 그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자 뒤에서 잇세리온이 웃었다.

[도련님, 저기요. 위를 보세요.]

잇세리온의 손가락을 따라 방향을 옮기니 태양을 찌를 듯 높게 서 있는 새하얀 성들이 보였다.

[황성입니다.]

아름다웠다. 리카르디스가 태어나 본 것 중 가장. 그는 하얀 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리카르디스의 주의를 일깨운 것은 어딘가 딱딱하게 느껴지는 밀리아의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

뒤를 돌아보자 밀리아가 바라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 잇세리온. 가까이 오렴.]

여느 때와 같은 미소 위로 어둠이 내려앉은 것을, 리카르디스는 눈치챘다. 리카르디스와 잇세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발치에 앉았다. 밀리아도 세티스티아를 안은 채 바닥에 앉았다. 잇세리온은 잔소리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란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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