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60화 (60/220)

60화.

칼릭스의 갈등을 읽어 냈는지 소녀들이 눈을 반짝였다. 어려도 장사꾼은 장사꾼이었다.

“어서 오세요! 열 송이에 1쿠퍼예요! 첫 손님이시니 한 송이 더 드릴게요!”

올망졸망한 눈들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부 다오. 잔돈은 필요 없다.”

칼릭스는 무심한 듯 새침하게 소녀들에게 은화를 한 개씩 건넸다. 어린 장사꾼들은 기쁨을 숨기지 못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종이로 꽃다발을 만들어 주려는 듯했다.

칼릭스는 얼룩덜룩한 벽에 잠시 몸을 기대었다. 행인들이 ‘거 사람. 그렇게 안 생겼는데 보기와 다르게 상냥하구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 보여, 낯이 화끈해졌다. 아닌데. 그냥 누이에게 줄 선물을 샀을 뿐인데…… 라고 말하는 쪽이 더 구차해 보일 터라 칼릭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꽃을 이렇게 대량으로 사 가는 손님이 없었던지, 포장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칼릭스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가만히 있는 이 순간에도 제 누이가 철창 안에서 자신을 쳐다보며 ‘배고파 칼릭스. 감옥의 밥은 맛이 없어. 수프에 고기가 내 새끼손톱만큼 들어가 있어.’라고 말하는 광경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없었다.

“혹시 이십 대 초중반의 검은 머리 여성을 본 적 있나?”

얇은 풀 줄기로 리본을 묶던 소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 이십 분 전쯤에 뵈었어요.”

칼릭스가 눈을 크게 떴다.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실마리를 발견한 것이다. 소녀들의 증언으로 제 누이와 자신이 같은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칼릭스가 반색하자 둘이 소근 소근 얘기를 나눴다.

“저기에서 파는 꼬지 네 개 가져다주신 것도 얘기해야 돼? 돈 안 내신 거 같던데…….”

“쉿, 에밀리. 조용히 해.”

칼릭스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누님…… 그러고 보니 제가 화폐와 경제 원리를 안 가르쳐 드렸군요…… 어쩐지 황성에서 편지를 보내실 때마다 월급을 동봉하시더라니…….

칼릭스는 제 누이로부터 판매하는 음식을 갈취당한 상인에게 값을 치렀다. 물론, 구리 동전이 아닌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보상이었다. 상인이 너무나도 감격해서 울음을 터트렸기에 칼릭스는 더욱 미안해졌다.

그는 또 다시 걸었다. 꽃을 한 아름 안은 채였다. 뒤에서 소녀들이 손을 흔들었다. 칼릭스는 자신이 두 손 가득 안고 있는 꽃다발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앞에 내놓은 자그마한 꽃다발이 전부가 아니었어? 뒤에 천으로 덮어 놓은 바구니까지 전부 꽃이었을 줄이야.

꽃다발의 크기가 비정상적으로 컸다. 이건 꽃다발이 아니라, 꽃이 잔뜩 핀 들판의 일부분을 떼어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많은 시선이 칼릭스를 맴돌았다. 그는 약간의 수치심을 감내하며 어지러운 거리를 휙휙 둘러보았다. 금색, 갈색, 보라색, 하늘색. 온갖 머리 색이 여기저기 퍼져 있는 가운데, 검은 머리만 보이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칼릭스는 근처 가판대의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남자가 제 누이의 행방을 알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상인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아, 칼릭스 경 아니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뭘 드릴까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칼릭스는 잠시 당황했으나, 로젤린이 현재 이 대륙에서 제일가는 유명 인사라는 사실을 금방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그녀와 매우 닮았다는 것 또한. 그렇다 쳐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 자신을 반가워하니 좀 황당하긴 했다. 칼릭스가 떨떠름하게 로젤린의 행방을 물었다.

“로젤린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손에 큰 사과를 들고 저쪽 길로 가시더라고요. 어찌나 복스럽게 잘 드시던지.”

그 ‘복스럽게 잘 드신다던 사과’가 어느 과일 가게에서 강탈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이 미치자, 반가운 소식을 그저 웃으며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칼릭스는 상인에게 고맙다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칼릭스는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했다. 빵집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기는, 백퍼센트야.’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딸랑, 하고 종이 울렸다. 빵집 안은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하얀 모자를 쓴 주인장이 꽃다발을 들고 있는 칼릭스를 보며 방긋 웃었다. 아이고 누나한테 준다고 꽃다발 들고 온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미소였다. 순식간에 다섯 살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칼릭스 경 아니십니까. 과연 소문대로시구먼요.”

……소문? 칼릭스는 그의 말이 심하게 신경 쓰였으나 아차하고 정신을 차렸다. 제 소문이 문제가 아니라 누이의 행방이 더 급했다.

“아, 로젤린 경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희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잔뜩 드셨죠. 어찌나 맛있게 드시는지, 사람들이 전부 사 먹지 뭡니까! 많이 팔렸으니 그것만으로 괜찮습니다.”

괜찮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에 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는 시기였다. 거기에 굳이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상인들을 갈취하고 다닌다는 얘기까지 더할 필요는 없었다.

한데 기류가 좀 미묘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인인 데다가, 갈취까지 한 상대를 보는 눈길이 생각보다 고왔다. 칼릭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결론을 냈다. 아까의 상인과 지금 가게 주인의 말로 짐작해 보건대, 복스럽게 잘 먹는 젊은이를 예뻐하는 어른들의 공통적인 경향이 발휘된 것이 아닐지.

칼릭스는 주인에게 대금을 치르고 나온 후 더욱 급해졌다. 긴 여정이었다. 그 먼 거리와 시간만큼 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커져가기만 했으나, 지금은 걱정의 종류가 좀 변질되었다. 누님……의 아련함에서 누님! 의 다급함이 뒤섞여 버린 탓이었다.

주위 행인들과 턱턱 부딪치는 일이 잦아졌다. 거친 사내들이 눈을 부라리기 전에 칼릭스는 “눈 똑바로 뜨고 다녀!” 하고 버럭 성질냈다. 그의 인상도 인상이고, 체구도 체구고, 어이가 없기도 해서 남자들은 그저 입을 딱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칼릭스가 노파에게 아주 살짝 부딪친 후 정중한 사과를 건네는 모습을 본 남자들은 더욱 어처구니없어 했다.

그의 다급한 움직임에 거대한 꽃다발이 움직이며 시야의 반을 가렸다. 꽃다발이 거추장스러워 짜증이 울컥울컥 솟았다. 하얀 꽃송이 사이로 사람들의 머리가 흔들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중 검은색을 언뜻 본 것 같았다. 칼릭스는 왁 소리쳤다.

“누님!”

검은 머리는 사람들에게 묻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략 이 초간의 공백 후 인파 사이로 무언가가 확 튀어나왔다. 로젤린이었다. 그녀가 사람들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게 도약한 것이다. 마치 한 마리의 개구리, 하늘로 쏘아진 화살, 장애물을 넘는 검은 군마와 같이 장렬한 기세로.

억, 내가 미쳤지! 칼릭스는 경솔한 자신을 욕했다. 로젤린은 낮은 상가의 지붕에 멋지게 착지했다. 사람들이 오오, 하며 감탄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로젤린이 곧 칼릭스를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그녀의 시선에 따라 칼릭스에게 거리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못 찾았나 의문이 들 정도로, 매우 눈에 띄시는 군요, 누님…….

“칼릭스!”

로젤린은 곧 다시 펄쩍 날아올라 칼릭스 앞에 착지했다. 사람들이 짝짝짝 박수쳤다. 대단한 묘기였다. 마인이라더니 아주 팔팔하게 잘 뛰는구만! 아, 저 남자는 아까 로젤린 경이 말하던 그 동생인가 보네. 왜 있잖아, 그 돈 많고 예쁘다던 칼릭스. 아, 그 예쁘고 착하다던 칼릭스? 아, 그 귀염둥이 칼?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가 칼릭스에게 들려왔다. 그는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존재를 최대한 지워 보고자 노력했다. 누님 대체 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고 다니신 겁니까?

“누님…….”

“응.”

대체 무슨 말을 하셨느냐고 물으려던 칼릭스는 로젤린의 시선과 딱 마주치고 말을 흐렸다. 그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칼릭스는 제 누이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건강해 보였다. 어디 하나 부러진 곳 없어 보였고, 피부도 상처 하나 없이 여전히 고왔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호의로 인해 볼에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도리어 며칠간 쉬지 않고 달려온 칼릭스가 더 아파 보일 지경이었다.

아, 어찌나 다행인지. 칼릭스는 한참이나 묵혀 두었던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절도고 무전취식이고 뭐고. 사고 치고 다니셔도 되니 그저 건강하기만 하셔라.

칼릭스는 부끄러움에 발개진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거리의 소음에 묻힐 만큼 작은 소리였으나, 로젤린이 들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로젤린은 그 믿음에 보답하듯 입꼬리를 끌어 웃었다.

“응.”

로젤린이 칼릭스를 와락 안았다. 둘 사이의 꽃다발이 구겨졌다. 꽃향기가 더욱 물씬 풍기며 두 사람을 감쌌다. 행인들이 붉은수레바퀴 남매의 상봉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감동의 눈물을 닦아 내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도 수치스러움에 눈물을 찔끔 흘렸다.

칼릭스는 로젤린의 손을 잡고 그녀가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여기서 먹었어. 이것도 먹었어. 저것도 맛있어. 어찌나 야무지게 먹고 다녔는지 으리으리한 식당에서도 이만큼 다채롭고 호화롭게 먹지는 못할 것 같았다. 가게마다 멈춰서 외상값을 낸 결과, 로젤린은 경제가 돌아가는 원리를 대충 이해하게 되었다.

물건에는 그에 따르는 합당한 대가, 값이라는 것이 있다! 일반적인 상식을 대단한 이치라도 되는 양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고 칼릭스의 마음은 더욱 싱숭생숭해졌다. 사회에 내보내기에는 너무 일렀던 건가…… 라는 생각을 하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 누이를 야생동물 방생하는 듯 취급하는 이 패륜적인 발상은 뭐란 말인가. 칼릭스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잡념을 떨쳤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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