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58화 (58/220)

58화.

하지만 2황자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모두의 걱정을 깔끔하게 불식시켰다. 청년과 소년의 사이에 놓여 있던 아름다운 황자는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전쟁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지에 끈적하게 말라붙은 피,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는 황폐한 광경이 그렇게나 어울릴 줄이야. 황자는 처음부터 전쟁터에서 자라난 나무처럼 고고하게 서 있었다. 세실은 요즘도 이따금씩 그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 2황자의 모습만을 지켜봐 왔던 그녀로서는, 지금의 황자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또 큰 한고비를 넘겨 안전한 울타리 내에 있으면서. 공을 세워 다시 한 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으면서도.

[로젤린.]

누워 있는 제 호위 기사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렇게 애처로울 수가 없었다. 조금 궁상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희생 없는 전쟁은 없다. 그리고 리카르디스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로젤린, 식당에 초콜릿 폭포가 흐르고 있어. 바나나에 초콜릿을 묻히고 견과류 위로 한번 굴리기까지 할 예정이야.]

리카르디스는 이제 와서 그 당연한 이치를 모르는 듯 굴었다. 그는 몇 번이고 로젤린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이것 봐, 이 고기는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군. 요리사의 솜씨가 좋은 모양인데.]

2황자 리카르디스는 16살의 첫 전투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성장했다.

[내가 다 먹어 버리기 전에 어서 일어나.]

그런데 왜 그때보다도 위태로워 보일까. 전장에서조차 어떤 두려움도 모르는 것처럼 다잡고 있던 마음을, 왜 저렇게 흔들리게 내버려 두는 건가.

[로젤린.]

2황자는 수도로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제 호위 기사의 옆을 지켰다. 그녀는 결국 황자가 있는 동안에는 깨어나지 못했으나, 그의 목소리에 이끌려 가끔 잠꼬대를 하듯 웅얼거렸다. 2황자는 그럴 때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 * *

하루 먼저 출발한 리카르디스를 따라잡기 위해, 로젤린은 깨어난 그날 바로 짐을 꾸렸다.

“아픈데 가기는 어딜 가니!”

딱 걸렸다. 세실이 모질게 그녀의 짐을 뺏었다. 로젤린은 평소보다 훨씬 단호한 표정으로 제 의사를 표현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괜찮기는 뭐가 괜찮다는 거니!”라고 하고, 전혀 안 아프다고 해도 “안 아프기는 뭐가 안 아프니!” 하고 재차 혼날 뿐이었다.

로젤린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온건한 감금은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 2황자 리카르디스의 합의로 발생한 상황이었다. 물론 거기에 감금당한 당사자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안위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온 대륙이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자신이 황성에 도착해 로젤린의 신변에 관한 확답을 받을 때까지 그녀가 보호받기를 원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 또한 그의 딸이 성치 않은 몸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구경거리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모든 일이 처리되기 전까지 그녀를 지킬 견고한 벽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그 견고한 벽은 가까이에 있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 세실 비스타. 그녀가 경계의 학살자 내지는 미친개라고 불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으며, 그 미친개를 함부로 건드릴 간이 부은 자는 많지 않았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붉은수레바퀴 백작과 리카르디스에게 빚을 만들어 둘 기회는 흔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명의 이해관계가 얽혀 로젤린은 당분간 마른가시나무 백작령에 머물러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로젤린이 알 리 만무했다. 세실의 만류에도 로젤린은 불만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리카르디스가 미리 남겨 놓은 편지 한 장을 읽고서는…….

계속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세실이 칼릭스가 비스타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다급하게 전했다. 얼마 뒤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로젤린은 어느 정도 납득을 했는지 은밀히 준비하던 탈주 시도를 손에서 놓았다.

세실은 사절단과 검은달 사이에 있었던 전투로 인해 바빴다. 황실로 보낼 보고서도 작성해야 하고, 이번 전투로 인해 검은달의 동향이 바뀌는지에 대한 면밀한 관찰 또한 필요했다. 로젤린을 보호한다고 하지만, 세심하게 그녀를 챙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래 사람들로부터 가끔 그녀에 대한 보고를 받을 뿐이었다.

그리고 방금 세실이 막 받은 그 보고에는, 당분간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 때문에 로젤린이 무료함에 하루하루 죽어 가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환자이자 손님을 너무 오래 방치한 감이 없잖아 있어, 세실은 반성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그녀의 얼굴도 보고, 담소도 나눌 겸.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세실은 제 두 눈을 의심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시장이라도 좀 둘러보면서 놀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독수리랑 체스를 둘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심심했던 걸까…….

로젤린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하, 한 수만 물러줘.” 하고 답지 않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독수리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근엄한 대가리를 하고는 비숍을 물어 대차게 로젤린의 킹을 후려쳤다. 로젤린이 앓는 소리를 내며 마지막 남은 쿠키를 독수리의 입에 물렸다.

그 결과로, 로젤린은 지금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구경 할 수 있게 되었다. 백작이 사람을 붙여 주겠다 했지만 사양했다. 성 밖을 나서는 그녀의 뒤로 세실의 혼란스러운 눈빛이 끝까지 따라붙었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쬐며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로젤린은 마카롱과 체스를 둔 일 때문에 미친 사람 취급 받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다지 상관없었다. 덕분에 성을 벗어나게 되지 않았던가. 어쩌면 마카롱에게 게임을 지고 있어서 백작이 더욱 걱정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좋은 날이었다. 쥐로 변해서 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마카롱이 코를 실룩이며 햇살 냄새를 맡았다.

로젤린은 ‘로젤린’이 된 후로 거의 성 내부에서만 생활을 했다. 붉은수레바퀴 성, 일라베니아의 황성. 발타의 궁전, 그리고 지금의 마른가시나무 성까지. 초반에는 인간의 생활양식들을 배워야 해 바빴고, 이후로는 임무 때문에 벗어날 틈이 없었다.

이따금 바람 울리는 소리만 나는 적막한,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정리되어 단조롭게까지 느껴지는 공간을 뒤로한 로젤린은, 새롭게 펼쳐진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우락부락한 용병들은 드잡이를 하는 중이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퍼져 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이 흥정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옷의 색과 규격, 걸음걸이 하나하나 통제되어 있지 않은 무질서한 거리를 보자 그녀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바쁘게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검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시선들이 그녀의 검은 머리를 향해 모이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의…….”

“2황자 전하의 그…….”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거리가 한층 더 술렁이기 시작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수도까지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하물며 이곳은 로젤린이 요양 중인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비스타가 아니던가. 로젤린의 인상착의 정도는 진즉에 파악이 끝난 상태였다.

검은 머리와 녹색 눈. 일라베니아 여성 평균 키를 웃도는 장신. 그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으니 못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돼, 마카롱.”

소문의 그녀가 시선을 약간 아래로 한 채 중얼중얼 혼잣말을 시작했다. 로젤린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로젤린은 행인들이 자신을 미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봄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선에 예민해진 마카롱을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작은 쥐가 주머니 속에서 찍찍찍 격렬하게 역정을 냈다. 눈 두 개, 귀 두 개, 코 하나 입하나 달고 있는 사람 처음 보느냐며, 저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해 버리겠다는데 구체적으로는 풀어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수위였다.

“안된다니깐.”

혼잣말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자 다들 그녀로부터 몇 발짝 멀어졌다. 요양 중이라더니 몸이 아니라 머리가 아픈 거였어? 안 그래도 마인이라는 사실만 해도 껄끄러운데, 심지어 상태가 살짝 안 좋기까지 하다니! 옷깃을 스치는 가벼운 인연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칼릭스가 무기를 들지 않은 사람을 다치게 하면 무서운 곳에 간다고 하지 말래.”

어린아이에게 일러 주듯 조곤조곤한 말투였지만, 내용이 살벌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시장 거리를 채우고 있는 우락부락한 장정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최대한 구석으로 제 몸을 욱여넣었다.

“아, 칼릭스?”

그녀는 목에 걸려 가슴께에서 대롱대롱 흔들리는 주머니를 내려 보며 중얼거렸다.

“내 동생이야. 착하고 예뻐.”

로젤린은 거리를 구경하다 과일이 잔뜩 쌓여 있는 가게 앞에 멈춰 섰다. 붉은 사과가 반지르르 윤이나 탐스러워 보였다. 꼬르륵, 그녀의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아, 그러고 보니 밥을 먹은 지 오래 됐네. 한…… 두 시간 쯤.’

거리를 구경하느라 배고프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로젤린이 가게의 주인에게 인사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나, 나, 날이 참 좋지요.”

사실 그에게 날씨가 좋은지 안 좋은지를 판별할 만한 여력은 없었으나, 다년간 쌓아 온 상인의 혼이 먼저 반응했다. 로젤린은 쌓여 있는 사과를 가리키며 정중하게 물었다.

“이 사과를 제가 먹어도 되겠습니까?”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허락을 꼭 받으세요]

로젤린은 칼릭스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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