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당연히 이기는 싸움에 지고 돌아왔다. 총책임자로서 아틸라크는 한동안 고개를 못 들고 다닐 치욕스러운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정작 그 보고를 듣는 하카브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까지 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그는 이를 시원하게 드러내어 웃고 있었다. 마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신체를 강화시키거나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뿐. 그렇다면, 마수처럼 기이하게 변한 팔과 마인의 범위조차 뛰어넘은 힘이라면?
그 낯설고 기괴한 현상이 지표가 되어 길을 안내했다.
“로젤린, 그대는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멀리 있는 누군가를 그렸다. 하카브의 얼굴에서 뜨겁고 생생히 날뛰는 감정이 비치기 시작했다.
“로젤린. 그대가…….”
하카브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대가 ‘그림자’였을 줄이야…….”
대단하다. 이것은 마치 운명 같다. 이 세상이 그대와 나를 만나게 했는가. 내가 그대에게 끌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알았다면 이렇게 쉽게 놓아주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자세히 봐 둘 것을 그랬다. 하얀 피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흐트러진 검은 머리. 곧게 피고 있던 허리. 담담한 말투.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겉모습만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대는 그 푸르른 눈동자로 나를 어떻게 바라봤었지? 그대의 부드러운 피부 아래를 흐르고 있는 마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강하게 요동치며 울리고 있었나? 잔잔하게 소리 없이 그대를 휘감고 있었나?
하카브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디에즈가 어째서 내게…… 아니다. 어쨌든 연락을 해 봐야겠어.”
“예, 전하.”
“로젤린과 접촉하기 전까지 2황자는 당분간 건드리지 않는다. 괜히 밉보여서 점수를 깎을 필요는 없지. 이미 상당히 깎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2황자의 안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귀중한 존재였다.
크레안 티다니온의 산물. 마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 일라베니아가 낳은 최초의 괴물. 죽음의 그림자.
하카브는 입술을 짓이기던 것을 멈추고 낯빛을 싹 바꾸었다.
“아틸라크.”
“예, 전하.”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받는 것은 너무 느리다. 그냥 내가 일라베니아로 가야겠다.”
아틸라크는 그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힉살라 아돈의 후계자 1왕자 하카브. 그가 지금 국경 너머 저 위험한 곳에 발을 디디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하카브는 환희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하카브는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심장을 찢을 듯한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로젤린. 그대는 나의 검은 달인가?
* * *
리카르디스가 들고 온 검붉은 조각은 마력의 결정이라는 거창한 임시 이름이 붙여졌다.
신체가 이상할 정도로 발달된 암살자 집단. 마력을 이용한 독 ‘파편’.
최근 검은달이 휘두르는 두 가지 강력한 무기의 공통점은 마력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검은 조각이 그 무기를 이루는 근간이리라 생각했다. 마력의 결정을 어떻게 얻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었지만, 이것이 일라베니아가 여태껏 풀지 못했던 문제의 해답이 되리라 직감했다.
일라베니아의 위업은 ‘축복의 밤’과 마력 숭배 집단 ‘검은달’. 두 가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축복의 밤을 띄워 얼마나 대륙을 풍요롭게 만들었는지, 얼마나 검은달의 위세를 약하게 했는지가 역대 황제의 치세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번 세대에 검은달의 몸집이 급격하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축복의 밤이 찾아오지 않아 대륙이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고질적인 문제 이외에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굶어 죽고, 검은달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대륙을 휘감는 불안감은 나날이 짙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일라베니아의 현 황제 라이노는 이러한 사태를 조금도 완화시키지 못했다. 타고난 혈통과 귀족들 간의 긴밀한 정치 놀음으로 황위를 거머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형제들 중에서도 유독 약했던 신성력. 계속해 발목을 잡고 있는 근심거리가 다시 대두되었다.
황제의 자리야 이델라브힘이 내려 준 것이라 떠받들어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감히 의심이라는 것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다. 마땅히 자리에 앉을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인가 하고.
능력은 없지만 눈치는 있어, 황제 라이노 또한 그러한 기류를 읽었다. 그는 불안했다. 네 살이었던 엘피디오의 신성력이 뛰어나다는 얘기까지 통제할 정도였다. 10살에 갑자기 나타난 2황자 리카르디스가 엘피디오와 황태자 위를 두고 다투지 않았더라면, 엘피디오는 성인이 되는 날 황제로 즉위했을 것이다.
두 아들의 밥그릇 싸움 덕분에 제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황제, 라이노. 역대 최악, 최약이라는 오명을 쓴 지금 이때에, 리카르디스가 검붉은 마력의 결정을 가지고 왔다.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오랜 숙적 검은달과의 악연을 끝맺음 지을 첫 단추가 될 수 있으므로.
1황자 엘피디오도 당분간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리카르디스는 황제의 크나큰 환대를 받을 것이다. 벼랑 끝에 서 있던 위기를 완벽하게 기회로 삼았다. 하여간 2황자도 참 대단한 인물이었다.
“잘 마중 나갔지 뭐니. 황제 폐하께서 나에게도 노고를 치하해 주시겠지.”
세실은 ‘노고를 치하’라는 대목에서 검지와 엄지를 붙여 원을 그렸다. 흔히들 화폐를 상징할 때 사용하는 손동작이었다. 로젤린과 마카롱은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열심히 추측해 보았으나 알아내지 못하고서 포기해야 했다.
“페르탄도 무언가를 얻을 테지. 그 고지식한 남자가 그걸 바라고 움직이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네 아버지는 전후 처리로 리카르디스 전하와 같이 수도에 올라갔으니 당장은 볼 수 없단다. 너무 아쉬워 마렴. 그 목석 같은 인간이 나에게 부탁까지 하면서 너를 맡기고 간 거란다.”
“네.”
붉은수레바퀴의 페르탄.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딸을 두고 2황자와 수도로 올라갔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나, 로젤린의 입장에서는 무정하다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저 뚱하고 날카롭고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은 그 서운함의 방증이리라. 불쌍한 것.
세실은 눈썹을 아래로 한껏 휘며 그녀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로젤린이 주로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탓이었다. 로젤린과 오래 지낸 사람이 아니면 그녀의 표정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는 했다.
여전히 수심이 깊어 보이기도, 불만 가득 차 보이기도 하는 로젤린의 표정에 세실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붉은수레바퀴 백작 말고도 경을 잘 부탁한다고 한 사람이 여럿 있었지. 사람들이 너무 드나들어서 문이 다 닳을 정도였단다. 정말 인기가 굉장하던 걸?”
로젤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일자로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어머, 말을 돌린 게 정답이었나 보네.’
세실은 내심 기뻐하다가 곧 이어지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습니다.”
인기가 좋다는 말에 저렇게 뻔뻔하게 대답하다니. 아니, 사실이니 뻔뻔한 건 아닌가?
그녀의 동생 칼릭스는 매일매일 서신과 선물을 보내며 제 누이를 잘 부탁한다 연락했다. 기사단장 스타스, 부단장 나단도 바쁜 일정 속에서 그녀를 찾았고, 부단장 부관 레이몬드는 제집마냥 그녀 옆에 붙어 있기까지 했다.
그 외에도 많은 하얀밤 기사단원이 다녀갔다. 상급 기사, 하급 기사 할 것 없었으나 바다협곡의 네스터는 그중 유별나게 많이 드나들었다. 심지어는 황금정원의 클로에까지 로젤린을 잘 부탁한다며 금보다 귀하다는 온갖 약을 보내왔다. 그녀의 연락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깜짝 놀랐었다. 거대한 상단과 정보 집단의 수장 격이라 말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여러 가지 정보를 위해 사람을 두루두루 사귄다고 들었으나,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할 정도면 표면적인 친분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속내를 알 수 없고 음흉하다는 평을 받는 클로에와 로젤린을 번갈아 떠올리자니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황금정원의 클로에가 큰뿔산양의 레이몬드와 약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들의 기묘한 친분은 그로부터 온 것이리라.
2황자 리카르디스는 피로한 몸을 이끌고 매일매일 그녀를 찾았다. 누워 있는 로젤린을 바라보는 눈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보는 세실이 속이 다 간질간질해질 지경이었다.
아침은 고기 요리, 점심은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디저트, 저녁은 다시 고기 요리. 리카르디스 황자는 병문안 꽃 대신 갖은 음식들을 들고 와서는 로젤린의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맨 처음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황당하던지. 갓 만들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병문안 선물은 좋은 말로는 개성적이고 솔직한 말로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리카르디스는 한 손에는 고기 꼬지, 한 손에는 케이크 접시를 들고, 얼른 일어나라며 그녀에겐 들리지 않을 타박을 했다. 세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투와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던 2황자와 다른 모습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처음으로 2황자 리카르디스를 본 것은 전장에서였다. 열여섯, 그가 막 성인이 된 해였다.
[‘나팔이 울리면 도망간다’에 내 전 재산을 걸겠어]
[전쟁이 누구 놀이터도 아니고 말이야…….]
지휘관부터 말단 병사까지 뒤에서 수군거렸다. 황실 암투가 험난하다고는 하나 그것은 전쟁과는 다른 종류였다. 황성에서의 싸움이 독이라면, 전쟁은 보다 가까운 칼날이라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다.
그리고 10살부터 줄곧 황성에서 살았던 어린 황자에게 이런 종류의 전투 경험이 있을 리 만무했다. 모두가 염려의 눈으로 리카르디스를 바라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어린 황자의 안위보다는 그가 전장에 투입됨으로써 일어날 흐름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