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런 상황에 그녀가 나타났다. 검은달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인간 병기들을 산산조각 낼 정도로 강하며, 2황자 리카르디스를 위해 목숨도 바칠 정도로 충성심이 높은 제국의 기사 로젤린. 이 시국에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한 일라베니아의 마인이었다.
‘근데 좀 이상하단 말이지……?’
그녀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범상치 않았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비스타를 벗어나 일라베니아 전역에 퍼지고 있다고? 누군가가 작정하고서 퍼트리지 않는 이상에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 존재를 시시각각 부정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마인, 그녀에 대한 동정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의 입을 오가며 만들어진 흐름은 뒤집기 힘들다.
그러나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로젤린은 속이 꽤나 답답할 것이다. 세실이 안쓰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로젤린을 바라보았다. 자고 있을 때와 다름없이 무표정하지만, 그 가면 같은 얼굴 아래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치열하게 부서지고 있을 테지. 가엾어라. 이 어린 아가씨가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 거센 풍파가 아닌가. 세실은 눈물이 찔끔 날 뻔 했다. 사실 조금 흥미롭기도 했지만.
그때 로젤린의 옆, 의자 등받이에 앉은 독수리가 부리의 넙적한 부분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 로젤린은 후식으로 올라온 마카롱을 독수리에게 내밀었다.
“이게 마카롱이야.”
“……?”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굉장히 중대한, 그녀의 인생을 뒤흔들 만한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가? 안했나? 태평하게 독수리와 마카롱을 나눠 먹는 로젤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실하게 안 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혹시, 이 사태에 대해서 별 생각 없는 거 아냐?’
마카롱을 먹은 독수리가 달콤함에 취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젤린도 “음음…….” 따위의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흥이 난 몸짓들이 방금 전 세실의 생각에 답해 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마카롱을 먹어 보니 웬걸. 평소보다 잘 구워지긴 했다.
* * *
“서른여덟이라. 그리고 우리는 여덟 명이고?”
하카브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아틸라크로부터 전투 보고를 막 받은 참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하얀밤 기사단에게 실례겠어. 그쪽은 사망자가 서른여덟. 그리고 우리는 생환자가 여덟이라 말해야 정확하니 말이다.”
아틸라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한 명, 한 명이 인간 병기나 다름없는 정예부대가 처참히 무너지다니. 심지어는 2황자의 생포 또는 척살이라는 임무도 완수하지 못했다. 돈은 돈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들어가고 소득은 없는 것이다. 도리어 잃으면 잃었지.
“사망자도 아니고 생환자가 여덟이라…….”
하카브가 낯부끄러운 보고 내용을 계속 읊었다. 아틸라크만 죽을 맛이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국경을 넘어 하얀밤 기사단원들을 도왔습니다.”
“음? 황금정원이나 푸른등불도 아니고, 마른가시나무와 붉은수레바퀴라. 이거 참신한데……. 무슨 생각으로 움직인 거지? 사절단을 보내서 친교를 맺은 직후인데 전쟁이라도 할 참인가? 황제가 절대 좌시하지 않을 텐데…….”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이 2황자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마른가시나무는 중립. 붉은수레바퀴는 1황자 파라고는 하나, 굳이 따지자면 현 황제에게 충성을 바친 자였다. 2황자를 도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니, 돕는 것은 둘째라 치더라도 애초에 그들은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 사절단이야 힉살라의 허가를 받았다지만 그들은 어떤 인가도 받은 적 없었다. 말인즉슨 그들이 국경을 넘은 이 일이 전쟁의 시발점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비록 국경 코앞에서 2황자가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을지언정, 그들은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들이 왜 움직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2황자가 발타에 오기 전, 사절단의 인원을 늘려도 되겠느냐는 공문을 보낸 것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랬지. 허가했으나 엘피디오가 훼방을 놓아 원래 인원대로 오지 않았던가. 아, 그랬군. 비는 인원이 있었어.”
하카브는 리카르디스의 의중을 알아챘다. 발타의 국경을 넘은 사절단의 인원은 허가받은 수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기사단을 포함한다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들이 원래 예정된 사절단의 인원이었다고 한다면 발타쪽에서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애초에 허가 인장을 찍은 것은 자신이 아니던가.
“한 방 먹었군. 엘피디오가 하도 난리를 쳐서 증원을 막았다기에 별다른 수작이라고 생각을 못했다.”
하카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아마 리카르디스는 엘피디오의 반응 또한 예측했으리라. 엘피디오만큼 알기 쉬운 사람도 또 없으니. 만약 처음부터 삼백이라는 인원이 있었다면, 그 수에 맞춰서 습격을 준비했을 것이다. 리카르디스의 노림수가 정확하게 맞아 들었다. 강아지라고 생각해 작은 포획 틀을 준비해 갔더니, 다이어울프가 기다리고 있던 셈이었다.
“엘피디오는 배 아파 죽을 지경이겠군. 저가 한 말에 걸려 넘어지다니. 우스운 일이야. 나도 같이 걸려 넘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쯧, 하여간 쓸모없는 인사 같으니.”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공성 무기가 축소된 것 같은 무기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국경을 넘었다고 한다.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무기들이었다. 백작은 ‘파편’의 등장 후 접근전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 보였다. 석궁보다는 훨씬 크고 발리스타보다는 작았다. 무게가 가벼워 들고 다니기에 용이했으며, 파괴력도 상당했다. 강력한 공격이 계속해서 쏟아진 결과로 검은달은 참패했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기사단은 주로 평민과 용병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작은 압도적인 잔혹함을 원했고, 그런 경우에는 아무래도 귀족보다는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이 훨씬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녀가 쓸고 간 자리의 시체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짓뭉개지곤 했다.
이번 전투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만약 그 자리에서 전투를 한 자가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라 누가 일러 주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수작질도 어지간해야 화가 나지, 도를 지나치니 남는 건 두려움뿐이었다.
솔직히 하카브로서도 좀 질릴 정도였다. 전장에서 공포는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하카브와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그녀의 성정이 잔혹해서 벌이는 일이라기보다는 그 수단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성이 있는 미친개. 그래서 더욱 골치 아팠다. 발타의 전사들이 가장 기피하는 대상이 그녀라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잘린 머리통은 따로 모아서 무언가 글자의 형태를 그려 놓았다는데, 아틸라크가 정확한 내용은 알려 주지 않았다. 하카브는 대충 감을 잡았다. 심한 욕설 따위겠지.
“마른가시나무 백작답군.”
하카브는 고개를 좌우로 잘게 흔들었다. 이후, 아틸라크의 보고는 그가 예상한 선에 흘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과 전투했고, 2황자는 붉은수레바퀴 백작의 보호 아래 무사히 귀환했느니 뭐니.
하카브는 턱을 괴고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붉은수레바퀴라…….’
그 이름을 듣고 있으니 다른 인물이 떠올랐다. 무심한 표정을 고수하던 얼굴이 어른거렸다.
로젤린. 2황자의 호위 기사였으니 아마 죽지 않았을까? 가장 위험한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위치였으니. 아쉬웠다. 역시 빼돌려야 했나. 하카브는 곧 그 아련한 감정을 싹 지워야만 했다. 아틸라크가 제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로젤린에 대한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검은 머리의 기사? 로젤린?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라고?”
“예, 전하. 검은 머리의 여자 기사가 서른 명이 넘는 습격 대원들을 상대했다고 합니다.”
아틸라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뒷골목의 건달들이 이따금 일 대 십칠로 싸워서 이겼느니 하는 허풍 따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검을 들어 보고, 조금이라도 전투와 전쟁을 해 본 자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수적으로 열세인 경우에는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한없이 낮아진다. 심지어는 두 배, 세 배도 아닌 서른세 배에 달하는 적과 싸워 승리했다는데, 실제로 눈으로 보았다고 해도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습격 대원들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미 여기저기 다쳐서 피 흘리고 있는 기사에게 전멸을 당할 것이라고. 정말 누가 알았겠는가.
그 전투에서 살아난 습격 대원은 한 명뿐이었다. 그가 보고하기로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은 괴이하게 변한 검은 손을 휘두르며, 바람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고 했다. 그녀가 많이 지쳐 확인 사살을 하지 않고 돌아선 게 천운이었던 것이다.
그는 무서운 학살자가 전투 현장을 떠나고도 죽은 듯 누워 있었다고 했다. 한참 전에 사라진 그녀가 남긴 공포가 온몸을 짓눌러 왔었다고.
검은달에 들어오는 자들은 가장 먼저 감정을 죽이는 일 부터 했다. 그리고 백 명 중 다섯 명 정도만 살아남는 극도의 위험한 훈련들을 거쳤다. 오직 임무를 위해, 오직 검은달만을 위해, 크레안 티다니온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이번 습격대에 뽑힌 인물들은 그중에서도 소수의 엘리트들이었다. 포로로 잡힐 시에 당장 자결하라는 명령까지 거리낌 없이 수행할 정도였다. 그런 이에게 마음 깊숙이 공포를 박아 넣다니, 얼마나 압도적인 전투였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