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에 그치지 않고 제 기사를 직접 침대에 눕히고, 겉옷과 부츠를 벗겼다. 제국의 황자가 손수 할 만한 일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따뜻한 물을 대령하라 닦달을 해 대는 기세는 당장 누구의 목이라도 칠 듯 매섭더니, 적신 수건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닦아 내는 손길은 솜털보다 부드러웠다. 닿으면 부서질세라, 만지면 깨질세라.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얼른 황성으로 돌아가야 했음에도 최대한 시일을 늦춰 출발하기까지 했다.
지금의 로젤린이 하고 있는 행동도 딱 그와 같았다. 저가 마인이라는 사실이 들켰든 아니든 간에 황자 전하께서는 무사하신 겁니까? 부터 묻고 있으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실이 턱을 괴고 대답했다.
“어제 황성으로 출발하셨단다. 좀 피곤해하셨지만, 다친 곳은 없으셨어.”
“그렇습니까.”
로젤린의 시선은 먼 창밖을 떠돌았다.
[다친 곳은 없으셨어.]
그 한마디에 로젤린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일어난 이후로 내내 조급했던 마음이 서서히 풀려갔다.
피를 토할 때마다 자신을 꽉 끌어안던 단단한 품.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던 젖은 속눈썹. 먼지가 쌓여 있던 오두막의 냄새. 숨죽인 울음소리. 그 조각난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괜찮아. 로젤린 괜찮다. 내가 여기 있어. 다정한 말이 그의 눈물과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로젤린…….]
흔들리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건강하시단다. 걱정 마렴.”
로젤린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기사의 임무 그 이전에 리카르디스가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뻤다.
물론 마카롱으로부터 그가 무사하다는 얘기를 전해 듣긴 했으나, 마카롱의 ‘무사’와 다른 사람들의 ‘무사’는 기준이 좀 다른 편이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픈 곳, 상한 곳 없이 괜찮으냐를 기준으로 둔다면, 마카롱은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기준으로 두는 느낌이라. 영 신빙성이 없었다.
“적어도 5일 동안 의식불명이었던 경에게 걱정 받을 정도는 아니니까.”
로젤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5일?”
그 극렬한 기세에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흠칫 놀랄 정도였다. 로젤린은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5일 동안 의식불명? 그렇다는 말은…… 내가 5일 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구나!
의도치 않았던 단식 기간을 정확하게 알게 되자마자 배가 고파 왔다. 로젤린은 주린 배를 잡은 채 테이블 위를 빠르게 훑었다. 무표정하던 기사의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음식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챈 세실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아까의 생각을 정정해야 할 듯했다. 서로 아끼는 건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황자 전하 쪽의 감정이 더 깊어 보였다. 로젤린은 본능이 우세한 모양이고.
“어서 들렴. 전하께서 경이 일어나거든 환자식 그딴 거 말고 고기를 먹이라 하시더구나. 그냥 고기도 아니고 맛있는 고기라면서. 어찌나 민망해하면서 말씀하시는지, 나도 모르게 웃었다가 잇세리온 비서관에게 눈총 받았지 뭐야.”
로젤린이 눈을 반짝였다. 전하…… 감사합니다…… 진심을 다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충성하겠습니다…….
세실은 리카르디스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의 반 이상이 고기였다. 로젤린은 흐물흐물해진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잠들어 있던 미뢰가 깨어나 축포를 터트리고 화려한 파티를 벌였다. 그녀는 잠시 미간을 짚고 밀려오는 감동을 추슬렀다.
“입에는 좀 맞니?”
“네! 맛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아, 그러고 보니 로젤린 경. 마인이라면서?”
마른가시나무 백작은 앞과 뒤가 이어지지 않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했다. 로젤린은 씹던 걸 꿀떡 삼키고 나서 “아니오.” 하는 건조한 대답을 했다. 그녀의 담담한 반응에 세실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로젤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혼자서 검은달의 암살 부대를 막아 냈는데도 아니니?”
“네. 그들이 좀 약해서.”
“파르딕트 경의 그 커다란 방패를 맨손으로 부쉈다 하던데. 그래도 아니야?”
“네. 제가 좀 강해서.”
세실이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을 퍽퍽 치며 웃었다. 렉시드. 얘 좀 봐. 너무 웃긴 거 있지. 그녀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생각보다 뻔뻔한 구석이 있구나. 그런 점 싫지 않아.”
하얀밤 기사단의 명성은 이번 전투로 인해 한층 더 높아졌다. 생환의 가능성이 일말도 남아 있지 않았던 험난한 길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을안개의 스타스. 큰뿔산양의 레이몬드. 고래무덤의 파르딕트. 푸른등불의 카일로.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독 주목받는 이름이 있었으니…… 2황자 리카르디스의 호위 기사,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였다.
로젤린의 전투는 평범한 인간 기준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하얀밤 기사단원은 물론이거니와 사망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전투 현장을 찾았던 병사들 또한 그 사실을 인지했다. 로젤린에 관한 이야기는 은밀하게 퍼졌다. 누군가의 보고서에서, 어느 주점 술 취한 병사의 입에서, 기사들 간의 연락망을 통해서.
고래무덤의 파르딕트. 그의 고래만 한 방패를 단숨에 부쉈느니, 검은달의 암살자들을 파리처럼 보이게끔 하는 대단한 실력을 갖췄느니 하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부터. 손을 한번 휘둘렀더니 산과 강이 갈라졌다던가, 절대 죽지 않는다던가, 2황자 전하를 아기 새 들듯이 한 손으로 들었다던가 뭐라던가 하는 과장이 보태진 것까지. 진실 여부를 판별하기 힘든 여러 소문이 섞여 있었으나, 인간의 힘을 아득하게 뛰어넘었다는 점만은 별다른 왜곡을 거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소문들 중에서도 사람들이 크게 주목한 것이 하나 있었다. ‘파편’은 마력과 독의 결합이라더라! 해독제가 없다더라! 그렇다면 ‘파편’에 중독되고도 살아남은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 그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소문은 그녀의 아버지인 붉은수레바퀴 백작, 페르탄이 끝맺었다. 장장 스물세 장. 상당한 분량의 해명 문이었다. 로젤린의 탄생 일화, 태어나자마자 엄마라는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둥의 자랑을 빙자한 쓸모없는 내용들을 다 치고 간추려 보니……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결론만이 남았다.
일라베니아 제국이 마인을 배척하니 갓난아이 시절부터 그 죄와 업보를 제 딸이 지고 가야했던 것이 아니냐. 우리 딸이 잘못한 게 아니라,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니들이 잘못한 거다. 니들이 그렇게 이빨만 까던 때에 내 딸은 제국의 고귀한 2황자를 위해 제 목숨을 바쳤느니, 그 업보의 무게가 2황자 목숨의 무게보다 무거운 것이겠느냐!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일라베니아가 들썩였다. 2황자의 기사이자 붉은수레바퀴의 장녀가 마인이라니. 불길한 검은 달의 힘을 가진 마인이라니. 누군가가 신성한 제국에 나타난 흉조가 아니겠느냐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크레안 티다니온조차도 2황자의 앞길을 보살피는 것이라 말했다.
로젤린에 관한 이야기는 비스타를 벗어나 대륙 구석구석에 퍼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호사가들의 그럴싸한 말로 인해 희대의 악인도 되었다가, 세상에 더없을 영웅도 되었다. 어린아이들조차 로젤린의 이름을 인식하기 시작했으나, 5일 간 자고 엿새째 느지막한 오후에 깨어난 장본인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세실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많은 일이 있었단다.”
세실은 그녀가 잠들어 있던 때에 일어난 일을 순차적으로 들려줬다. 마른가시나무 기사단과 붉은수레바퀴 기사단이 국경을 넘어 사절단을 보호한 그때의 일부터, 지금 대륙을 들썩이게 만든 마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세실은 유심히 로젤린을 관찰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탓이었다. 평생 숨겨 왔던 비밀이 파헤쳐진 상황이 아닌가. 두려워할까, 제 말을 의심하며 부정할까.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 격렬한 감정 속에서 진실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젤린은 세실의 예상을 벗어나, 그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버지께서 제가 마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저는 마인이…….”
의자 등받이 위에 앉아 있던 독수리가 날개로 그녀의 머리를 퍽 쳤다.
“입니다. 마인…… 맞습니다.”
독수리와 한 여자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 말 하려던 거 아니지 않니……? 세실이 떨떠름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밝혀도 괜찮습니까?”
“뭐…… 예전이랑은 상황이 다르니 말이야.”
마력과 성력은 서로 간섭할 수 없다. 그렇기에 마력과 독의 혼합물 ‘파편’에는 성력이 어떤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던 것. 그렇다면 마독 ‘파편’에서 마력을 우선적으로 처리할 수만 있다면, 분리된 독은 충분히 성력으로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로젤린이 ‘파편’에 중독되기 한참 전부터 떠돌던 가설이었다. 그러나 마인이 없으니 검증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렇다 할 해결 방안도 나오지 않고 그저 지지부진하게 말만 끼얹는 사람만 늘어나는 판국에, 그녀가 파편에 중독되고 살아난 것이다. 영원히 가설로 묻혀 있을 뻔한 것을 로젤린이 이번 일로 입증해 준 셈이었다.
일라베니아 내에서 마인의 평가는 노예 이하. 일라베니아 제국 내에 있는 마인이라고 할지라도 발타의 암살자 집단 ‘검은달’과 한통속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검은달’의 존재로 인해 마인의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라베니아에서 마인을 찾기란 아주 힘든 일이었다. 핍박받고 살해당해 발타로, 다른 먼 곳으로 이주하거나 숨어 버린 사람들. 심지어는 찾아낸다고 한들 일라베니아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다. 결코 일라베니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