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없는 밤-54화 (54/220)

54화.

2부

8

국경이 잠시 허물어졌다. 발타의 왕, 힉살라 아돈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이었다.

병사들은 하얀밤 기사단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귀환한 기사들의 증언에 따라 그들은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총원 백다섯 명 중 돌아오지 못한 기사는 서른여덟 명. 결코 작은 피해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절단을 습격한 집단이 검은달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전투는 훌륭한 승리였노라고 역사책에 자리할 만했다. 갈수록 몸집을 불리는 집단, 검은달이 ‘파편’이라는 독으로써 한층 더 위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른여덟의 피해로 살아 돌아온 일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일라베니아의 백성들은 이 모두가 이델라브힘의 도움이 아니겠느냐며 얘기했다.

“이, 이델라브힘이시여…….”

“우웨엑!”

발타의 깊은 숲, 프리움. 병사들은 앞에 펼쳐진 광경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구역질했다. 하늘을 보며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그들 또한 수많은 전투와 전쟁을 거쳐, 시체라면 신물이 날 정도로 접해 본 경험이 있음에도. 참혹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앞섰다.

시체들은 부서지고, 찢어지고, 갈라지고, 뭉개져 있었다. 푸른 잎에 엉겨 붙은 피가 거뭇거뭇하게 굳어 늪지대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각난 인간의 시체와 특유의 썩는 냄새가 그 풍경의 처참함을 더욱 강조시켰다. 그나마 위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모든 시체들이 전부 검은달의 습격자라는 사실이었다.

“이, 이게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신입 병사가 고개를 위로 고정시킨 채 말을 더듬었다. 그의 눈동자에 상반신만 남아 있는 시체가 비쳤다. 피가 한 방울 뚝. 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무를 타고 올라간대도 한참 시간이 걸릴 만한 어마어마한 높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상상력을 발휘해 보아도 어떤 경위로 어떻게 전투가 진행되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2황자 직속 호위 기사단 하얀밤의 부단장 부관, 큰뿔산양 레이몬드 안디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장소에서 검은달과 전투를 치른 자는 상급 기사 로젤린 에스터, 오직 그녀뿐이었다.

하얀밤 기사단의 이름은 여타 다른 무리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고, 상급 기사쯤 되면 실력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쉽게 믿지 못했다. 대충 파악되는 시체의 수만 해도 이십 여구가 넘어섰다. 심지어 그들 모두가 악명 높은 검은달의 일원이 아니던가. 일개의 기사 한 명이 강하다고 막아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전투 지점으로부터 거슬러 가며 사절단의 시체 한 구, 한 구를 수습했다. 여기저기에서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으나, 그 어떤 곳도 아까의 광경을 잊게 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삼 일이라는 시간을 소요해 모든 임무를 끝냈다. 병사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마차와 말에 올랐다. 발타의 숲을 벗어나기 전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신입 병사가 머뭇머뭇 말을 꺼내었다.

“그게…… 정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일까요?”

누군가가 답해 주길 바란 것이 아닌 듯했다. 그는 멀어지는 숲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 * *

“마인이라는 거 있지!”

“누구?”

“우리 성에 계신 손님!”

“어머, 어머! 진짜?”

어린 하녀들이 소곤소곤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눴다.

잠자는 공주님처럼 며칠간 깨어나지 못했던 그 손님이 마인이라고? 세상에나. 이델라브힘의 가호를 받는 2황자 전하의 기사이자, 붉은수레바퀴 백작가의 장녀가 마인이라니. 이 어찌나 흥미로운 얘깃거리란 말인가!

그들은 저마다 알고 있는 그 ‘손님’에 대한 정보를 나눴다. 초록색 머리라더라, 자그마하고 순하게 생겼다더라, 부엉이를 한 마리 데리고 있다더라. 맞는 정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소문이 어떻게 비틀리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였다.

그들의 대화가 다소 컸던 탓일까. 계단을 오르던 여자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하녀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걸음을 멈췄다.

‘흠…….’

그녀도 며칠 전 부터 들어 왔던 이야기였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시간만 나면 그 화제로 대화를 나누는 통에 이제는 내용을 죄다 외울 정도였다. 이 입에서 저 입을 거치며 엉망이 되어 버린 소문들 속에서 단 하나의 진실만은 여자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이 마인이라는 것.

여자는 잡념을 떨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손님이 깨어났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기에.

“우리 잠자는 공주님이 일어나셨네. 오랜만이야, 로젤린 경.”

오랜만이라는 단어가 성사되는 경우는 첫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로젤린은 여자를 알지 못했다. 처진 눈을 가지고도 유약하다거나 순해 보이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인상이었다. 경사도가 높은 눈썹 각도 때문인지, 붉은 입술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로젤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로젤린’의 기억 안에 이 여자가 있는지 뒤적여 보았다. 로젤린의 의문에 차 있는 눈빛을 읽은 여자가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정식으로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란다. 나 혼자 일방적으로 경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래서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지 뭐니? 내가 요즘 이렇게 깜박깜박한다니깐.”

여자가 익숙한 태도로 로젤린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로젤린도 멀뚱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보자…… 열은 내렸고, 혈색도 좋네. 어디 아픈 곳 있니?”

“아니오. 아프지 않습니다.”

“잘 됐네, 그럼 식사나 할까? 아플 때는 잘 먹어야 해.”

여자가 하녀와 눈을 맞추며 적당히 손짓했다. 로젤린은 식사라는 단어에 몸을 들썩였다.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로젤린을 보며 여자가 아하하 웃었다.

“눈을 뜨고 있는 쪽이 훨씬 좋구나. 아차,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도 안 했었네. 마른가시나무의 세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라고 소개하는 편이 좀 더 알기 쉽겠니?”

아, 과연. 로젤린은 그제야 누워만 있는 제 모습을, 보아 왔다던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사냥 대회 사건 때의 실종 직후에 한 번, 그리고 이번 발타 사절단 건으로 한 번. 우연히도 항상 의식이 없을 때마다 그녀의 영지에 머물렀던 것이다. 친밀감을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인 듯했다. 로젤린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항상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붉은수레바퀴의 로젤린입니다.”

“폐는 무슨. 경이 올 때마다 항상 일이 터져서 말이지, 그걸 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해.”

마카롱이 꾸르륵 소리를 내며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세실은 거대한 독수리의 불만 가득한 소리를 듣고는 자신의 말을 반추해 보았다. 아, 확실히 다르게 해석될 만한 여지가 있었다.

“사경을 헤매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얘기가 아니니 오해 말고.”

마카롱이 가슴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를 멈췄다. 세실은 “굉장한걸, 말을 다 알아듣는 거니?” 하며 신기해했다.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드려 왔다. 세실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대충 손짓했다. 중년의 남자가 성큼 발을 들였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의 기사들과 복식이 비슷했으나 더 화려했다.

“백작님. 강철발굽 백작이 손님을 뵙고자 합니다.”

“이것 보라니깐. 내가 일이 터진다고 했지?”

세실은 딱 달라붙은 드레스를 입고도 능숙하게 다리를 꼬았다. 일이 터져서 재미있다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손님이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전하거라. 비슷한 이야기만 몇 번째인지, 대체. 노망이라도 난거야? 하여간 귀찮은 늙은이라니깐.”

로젤린은 눈만 깜박거렸다. 기사의 입에서 나온 손님이라는 말이 어쩐지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실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로젤린 경을 찾는 사람이 아주 많아. 당장 수도로 귀환 시켜야 한다는 둥, 잡아가야 한다는 둥. 헛소리들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하지만 걱정 마렴.”

그녀가 손을 들자 하인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튼을 열었다. 넓은 창으로부터 빛이 쏟아졌다. 날카롭게 비죽비죽 솟은 회색의 탑이 줄지어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탑의 꼭대기마다 거대한 발리스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어느 곳 할 것 없이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전장의 한 중앙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귀족의 성이라기보다는 이곳은 마치…….

“이곳은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철의 요새 비스타. 내가 허가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으니.”

요새. 맞다. 그 이름이 딱 어울렸다. 어떤 사소한 장식으로도 꾸며져 있지 않은, 오직 적을 공격하고 막아 내는 것에 치중한 형태였다.

“설령 내 울타리 안에 마인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로젤린은 창밖에 두던 시선을 돌렸다. 마른가시나무 백작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일단 식사부터 할까. 우리 얘기할 게 많을 것 같네. 그렇지?”

하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상을 채웠다. 두 사람의 대화는 식사 준비 시간만큼 잠시 중단되었다. 로젤린은 음식 냄새를 맡으면서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깊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로젤린이 입을 열었다.

“리카르디스 전하는 무사하십니까?”

로젤린의 질문에 세실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볼에 보조개가 폭 파였다.

‘본인의 안위보다 2황자가 중요하다는 건가? 신성 제국에서 마인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태평한 건지, 담대한 건지…….’

그러고 보니,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안위를 더 걱정하던 사람이 한 명 더 있긴 했다. 의식 없는 로젤린을 안아 든 채 마른가시나무 성에 입성한 2황자 리카르디스였다. 어찌나 유별나게 굴던지. 다른 사람이 로젤린을 대신 안아 들겠다 한마디 했을 때 서슬 퍼런 눈빛으로 노려보던 것이 떠올랐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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