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리카르디스의 상태를 염려한 나단이 몇 번이나 만류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로젤린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는 것을 계속 반복했다. 그녀는 간간히 잠꼬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지켜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아파. 하지만 가야하는데. 이어지지 않고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말들이 리카르디스를 찔렀다. 그는 이 감정에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 지 몰랐다. 단순히 아프다는 것만은 알았다. 로젤린이 어느 순간 피를 왈칵 토했다.
“로젤린!”
똑바로 누워 있던 탓인지 기도로 잘못 넘어간 것 같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품에 안아 제 몸에 기대게 했다. 그녀의 얼굴과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시체를 연상하게 만드는 서늘한 온도였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그녀의 몸.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신음이 그녀가 살아있음을 입증했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고통에 감사했다. 아직 살아있다. 로젤린은 리카르디스의 품 안에서도 끝없이 피를 토했다.
리카르디스는 초췌한 낯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입이 여러 번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내가…….”
약한 목소리였다. 리카르디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그는 품 안에 있는 로젤린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머리카락이 식은땀과 피에 젖어 볼에 붙어 있었다. 수차례 반복하며 얼굴을 매만졌음에도 그녀는 눈을 뜨지 못했다.
“내가 대체 뭐라고 그대가 날 지키려 해…….”
알 수 없는 감정이 피로와 함께 밀려왔다. 몸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리카르디스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그의 손에서 발해지던 하얀 빛 또한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공간.
로젤린은 번쩍 눈을 떴다. 의식을 잃은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았다. 거센 기운이 그녀의 몸속을 타고 돌았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었다. 오두막을 감싸고 있는 푸른 숲 위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
모래와 자갈을 진동시키는 말발굽의 소리.
……
화살의 날카로운 파공음.
“전하!”
……누군가를 찾는 소리. 다급하고 초조한…….
돌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듣기만 해도 마음을 몰아치게 만드는 소음들이 울렸다. 그리고 그 혼란을 뚫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따뜻한 무언가가 이마와 볼을 쓸어내렸다. 느릿한 손길. 동작 하나하나에 피곤함이 묻어 있지만 다정했다. 손을 뻗어 보려고 했으나 닿지 않았다. 가슴이 순간 덜컹거렸다. 추락하고 있다! 추락하고 있었다. 발밑이 순식간에 쑥 꺼지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비명을 질렀으나,
“아아아악!”
……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소리는 순식간에 불어나 비명을 잡아먹고 덩치를 키웠다. 어린아이, 여자, 남자, 노인, 고통에 찬 목소리와 분노하는 사람까지. 마구 뒤섞여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죽여라! 잡아! 저들을 잡아와! 대륙에 어둠을 불러오는 불길한 존재다! 숲속의 그림자 ……은 사람을 해친다! 깊은 숲의 그림자 ……은 사람을 먹는다!]
뒤쫓아 오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금속의 소리가 바싹 따라오고 있었다. 달리는 것이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람들은 울고 화내며 서로 싸웠다.
[그렇지 않아, ‘우리’는 누구도 해치지 않았어! 도망치자, 숨는 거야.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잊을 때까지…….]
[아니! 맞서서 싸우고, 죽여야만 해!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부었다. 용서 못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반드시 되돌아가겠다. 그때에는 너희들이 했던 그 말 그대로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겠다! 어떻게 해서라도 너희들의 나라에 어둠을 드리우고야 말겠다…… 우는 목소리가 고통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허억……!”
로젤린은 크게 호흡하며 몸을 일으켰다.
낯선 광경이었다.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넓은 방, 푹신한 침대. 깨끗한 이불, 빛이 아른하게 들어오는 얇은 커튼. 침대 맡 테이블 위의 화병에는 향기로운 꽃이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빈틈이 없을 만큼 그림이나 장식물 따위가 잔뜩 걸려 있었다. 귀족의 저택이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알 수 없었지만 집안을 감도는 특유의 향기가 어쩐지 익숙했다.
로젤린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이불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두리번두리번 슬리퍼를 찾다가 포기하고 맨발로 움직였다. 화려한 카펫이 깔린 바닥은 보드라웠다. 커다란 거울에 핼쑥한 얼굴의 여자가 비쳤다. 연분홍색 네글리제의 안쪽으로는 여기저기 붕대가 감겨 있었다. 로젤린은 제 얼굴을 쓸었다.
그래, 나는 로젤린이었지. 2황자의 호위 기사. 그녀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을 반추해 보았다.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는 리카르디스의 얼굴이 기억났다. 밤바다만큼이나 어둡고 불안한 눈동자였다. 무어라 계속 자신에게 말을 했지만,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어떤 감각인지는 잘 몰랐으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력이라는 둑을 무너트리고 기어코 심장을 파고든 ‘파편’을 느꼈다. 이후에 기억이 끊겨 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로젤린은 몸 안의 마력에 집중했다.
“흠…….”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혹시 파편의 마력을 흡수한 것인가? 무의식중,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언가가 발휘된 걸지도 몰랐다. 로젤린은 제 마력에 이상이 없는지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마독과 발타의 인공적인 마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변질된 마력. 그것은 로젤린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마력과는 달랐다. 이리저리 마구 날뛰는 기운을 흡수했다면 자신에게도 안 좋은 영향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세심하게 손끝, 발끝, 심장주위까지 샅샅이 살폈다. 그러나 어떤 이상도 찾을 수 없었고, 도리어 몸이 가뿐한 것 같기까지 했다.
쉬이익-
그때 로젤린의 예민한 귓가로 바람소리가 들렸다. 이건 뭐지? 날개소리…… 같은데?
“아.”
그 정체를 가늠하자마자 밖에서 날아온 그림자가 유리창에 돌진했다.
쨍그랑!
쨍그랑 와장창 쿠당탕! 유리창을 깨고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거대한 독수리였다. 마카롱은 창을 깨고 바닥을 한 번 굴렀다가 테이블에 몸을 부딪치고 다시 겨우 날갯짓 했다. 그 거대한 날개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방안의 물건들이 여기저기 엎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이름 모를 귀족의 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디서 종이가 펄럭펄럭 날아와 그녀의 머리에 턱 떨어졌다.
삐이익---
마카롱이 서럽게 울더니 로젤린에게 덥석 안겨 왔다. 새 가슴이 얼굴을 꾹꾹 누르고 있어, 좀 아팠다.
“마카롱, 전하는?”
마카롱은 부리로 그녀의 머리를 콱 쪼았다. 상처 나지는 않지만 딱 아플 정도였다. 처음으로 하는 말이 그거냐고 화내는 것 같았다.
“이 덜떨어진 기지배야! 지금 죽다 살아나서 처음으로 하는 말이 그거야?!”
“……안녕?”
“허이구 한가롭게 인사까지 하시네! 조금 있으면 점심은 먹었냐고 물어보겠어!”
성대를 변이한 마카롱이 씩씩 화냈다.
“너의 그 은발 인간은 너보다도 멀쩡하니까, 걱정 마시지.”
굳이 따지자면 ‘나의 은발 인간’은 아니었지만, 조용히 넘어갔다. 지은 죄가 있으니. 전투가 일어나기 전, 그녀는 마카롱에게 다른 기사들의 호위를 부탁했다. 마카롱은 로젤린을 떠나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의 똥강아지 같은 눈빛에 제안을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욕을 몇 번 내뱉고 난 후였다. 마카롱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작 인간 하나 지켜 보겠다고 죽을 뻔한 로젤린이나, 그런 로젤린에게 약한 자신이나.
동족, 동족하며 좀 챙겼더니 정말 정이라도 든 것인가. 가족 놀이라도 하는 마냥 행동하는 게 우스웠다. 로젤린은 붕대를 여기저기 감고는 초췌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 불쌍하고 초라한 꼬락서니가 괜히 괘씸했다. 마카롱은 제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쭉 잡아 당겼다.
“아야야, 아파.”
마카롱의 잔소리는 끊길 줄 모르고 계속되다, 문 너머 복도에서부터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에 중단되었다. 독수리와 한 여자의 고개가 소리의 방향을 따라 휙 돌아갔다. 둘은 눈빛으로 얘기했다. 온다.
벌컥.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십, 허, 헉…….”
“미, 미친…….”
칼을 빼어 든 다섯 명의 기사가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그들이 입고 있는 회색 제복의 왼쪽 가슴 위에는 가시나무가 서로 얽히고 꼬여 있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로젤린은 그 문양을 쓰는 가문이 어딘지 알았다.
마른가시나무 백작령. ‘그것’이 최초로 인간이 되었던 마의 산이 있는 비스타였다. 아. 이 땅은 더 이상 발타가 아니었다. 서 있는 장소가 바뀌었을 뿐인데 긴장이 탁 풀렸다.
기사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엉망이 된 방을 훑어보았다. 유리창은 깨졌고 기절해 있던 손님은 산발과 맨발이었다. 거기다 왜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독수리가 손님을 덮치고 있기까지 했다. 커다란 발톱으로 그녀의 검은 머리를 잡아당기며.
그들은 손님이 깨어났다고 주인에게 먼저 보고를 해야 하는지, 독수리를 먼저 쫓아내야 하는지를 짧지만 진지하게 고심했다. 결정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뒤늦게 당도한 하녀가 손님을 잡아먹으려 드는 독수리를 보고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독수리부터 처리하자. 기사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불손한 눈빛을 보고 마카롱이 삐애애애액 울었다. 로젤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옆에서 울리는 우렁찬 소리에 귀가 멀어 버릴 것 같았다. 보통의 인간보다 귀가 몇 배로 좋아서 몇 배로 더 괴로웠다. 한쪽 귀를 막는 그녀의 행동에 마카롱이 부리를 합 다물었다.
기사들이 슬금슬금 포위망을 좁혀 왔다. 그 와중에도 다치게 할 생각은 없는지 검을 집어넣고 맨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독수리를 신성시 여기는 일라베니아인다운 태도였다. 로젤린은 한쪽 손을 들었다. 날짐승을 쫓아내려던 그들이 멈췄다.
“괜찮습니다. 친한 독수리입니다.”
기사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로젤린은 빙긋 웃었다.
아아, 일라베니아였다.
〈1부 완결〉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