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세 사람은 빠르게 달렸다. 레이몬드조차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리카르디스는 이따금 한 번씩 발을 멈췄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와 숲에 사는 동물들이 내는 기척을 기다리던 누군가로 착각한 것이다. 멈춰 있는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이후로도 리카르디스는 자주 발걸음을 늦추고는 했다. 수없이 속고 수없이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고 밤이 찾아왔다. 주위를 살펴보니 오두막 한 채가 나무 사이에 숨어 있었다. 허름하고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밤이슬을 피할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얼마나 남았지?”
“반나절 정도 더 움직이면 될 것 같습니다.”
“중간에 길을 틀어서 조금 어긋났을 수도 있습니다.”
세 사람 다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동료들의 희생과 몇 시간까지만 해도 있었던 누군가의 부재. 리카르디스는 오두막 안에 들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숨을 크게 쉬고는 무릎에 이마를 대고 한참 그대로 있었다.
발타, 일라베니아, 검은달, 하얀밤, 설원의 월계수, 하카브, 엘피디오, 디에즈.
……로젤린.
온갖 상념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리카르디스는 지끈지끈 밀려오는 두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나단은 힐끗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최근 들어 로젤린 경을 많이 아끼셨지. 자신만 해도 그 어리숙한 아이에게 정을 주지 않았던가. 열심히 노력하고 그만큼 결실을 얻던 아이였다. 이 상황은 아마 제 주군에게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세티스티아 황녀가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던 그때의 일을.
시간과 공간, 인물. 어느 하나 겹치는 것이 없었지만 나단은 어쩐지 그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여자아이라 그런 것인지 대신 목숨을 잃게 되어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단은 한숨을 쉬었다.
“조금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
“……그래.”
막 잠에서 깬 듯이 잠겨 있는 목소리였다.
“지쳤다.”
먼지 냄새나는 오두막에 퍼진 목소리는 꺼져 가는 것처럼 작았다. 리카르디스는 입으로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매우 지쳐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몸에 탈력감이 퍼졌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지쳤다. 그는 앉은 그 상태 그대로 잠에 빠졌다.
리카르디스는 누군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올 때에는 그녀가 항상 나타나지 않았던가. 분명히 로젤린일 것이다. 무심하고 담담한, 나의 호위 기사.
[지쳤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웅웅 울렸다. 꿈이었다.
[이겼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내 손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그래서 지쳤다. 로젤린 경.]
[토끼를 잡아 드리겠습니다. 맛있는 걸 드시면 힘이 나실 겁니다.]
리카르디스는 눈을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흐트러진 머릿결을 정돈해 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무섭다.]
[밤새 옆에서 지켜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참 쉬워서, 치가 떨리게 무섭다. 로젤린.]
[걱정 마세요. 제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몸이 따듯해졌다. 어느새 부드러운 천이 목 끝까지 덮여 있었다. 리카르디스는 차가워진 손끝에 온기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여태껏 미처 내보이지 못했던 감정의 일부였다.
[그대가 죽는 게 무섭다, 로젤린.]
[절대 죽지 않겠습니다.]
힘이 빠져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뜨는 것조차도 힘겨웠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리카르디스는 겨우겨우 눈을 떠서 제 머릿결을 정리하는 손길의 주인을 마주 보았다. 푸르고 생생한 눈동자였다.
[나는 멈출 수 없으니, 그대가 와야 한다.]
[죄송합니다. 어깨가 다쳐서 갈 수 없습니다.]
[그대의 빠른 다리로 달려 와라.]
[다리도 다쳤습니다.]
[기어서라도 와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카르디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죽지 마라.]
[예.]
[시간이 흐르고 모든 일이 끝난 후에, 혼자 싸우다 혼자 아파하다 죽었노라는 한마디 말로…… 그대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지 마라, 로젤린.]
예, 전하. 그녀의 말이 웅웅 울렸다. 머릿속에서 단어 하나하나가 쪼개지고 합쳐졌다. 명 받들겠습니다. 예, 전하. 전하. 전하…….
“전하!”
리카르디스는 눈을 번쩍 떴다. 다급한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짐에서 붕대를 찾아 낸 나단이 급하게 밖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순식간에 온몸으로 소름이 퍼졌다. 짧은 수면으로 머리가 느릿하게 돌아가는 중에도 예민한 본능이 먼저 상황을 그에게 알린 것이다. 리카르디스는 떨리는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문가에 있는 레이몬드가 쓰러진 누군가를 안고 있었다.
밤보다도 검고, 별보다 빛나는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레이몬드는 로젤린의 얼굴 위로 눈물을 툭툭 떨어트렸다. 그의 품에 안긴 로젤린은 어느 한구석 성한 곳이 없었다. 낮에 보았던 어깨의 상처부터 허리와 등, 팔과 다리까지. 작고 큰 상처로 하얀 제복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려 했지만 힘이 풀렸는지 도로 풀썩 주저앉았다. 허물어지는 몸을 레이몬드가 급하게 받아 냈다.
“로젤린 경!”
부단장님…… 그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파르르 떨었다. 리카르디스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로젤린의 상태를 살폈다. 얼핏얼핏 드러난 피부에 검은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파편’의 흔적이었다. 리카르디스는 이가 으스러질 정도로 꽉 물었다.
“레이몬드 경, 빨리!”
리카르디스는 레이몬드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그녀의 등을 확 감싸 안으며 소리쳤다. 레이몬드는 손만 벌벌 떨다가 고함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계속 로젤린을 안고 있다고 해도 그녀의 상태가 좋아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레이몬드는 재빠르게 리카르디스의 품으로 로젤린을 건넸다.
로젤린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차가웠다. 그녀는 리카르디스의 가슴에 얼굴을 박고는 입만 우물거리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도 된다. 리카르디스는 그녀의 숨이 고르게 될 때까지 등을 도닥였다.
“전하…….”
“그래. 로젤린 경.”
“이제, 괜찮습니다. 쫓아오는 자는 없으니…… 편하게…….”
“같이 천천히 가자. 수고 많았다.”
리카르디스는 그녀를 안아 들고 오두막 안쪽으로 이동했다. 검은 머리를 따라 흐르고 있던 핏방울이 리카르디스의 가슴팍에서 번져 나갔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는 급히 망토를 벗어 둘둘 말아, 로젤린의 머리 아래에 깔았다. 그녀의 입에서 후우, 하는 얕은 숨소리가 배어 나왔다.
리카르디스는 단검으로 그녀의 옷을 베어 낸 후 인상을 찌푸렸다. 피가 잔뜩 엉겨 굳어 있었고 날카로운 무기에 꿰뚫린 상처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었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온 몸에 떠올라 있는 파편의 흔적이었다. 핏줄을 따라 번진 독이 만들어낸 형상은 마치 검은 거미줄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어두운 오두막에 하얀 안개가 떠돌았다.
순간 리카르디스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로젤린의 안을 떠돌던 성력이 대부분 흡수되지 못한 채 어디론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감옥에 있는 몇몇의 마인들까지 치료해 본 적 있는 리카르디스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상극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마인들마저 자연스럽게 성력을 받아들여 치유가 되는데, 그녀에게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하는 것이다.
평소라면 그 이상한 현상에 대해 의문을 가졌겠지만 지금은 조급했다.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저 그녀의 몸으로 스며드는 소량의 신성력. 그것만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마냥 꽉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리카르디스는 끊임없이 신성력을 퍼부었다. 로젤린의 상태는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했다.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윽, 허억…….”
그녀는 콜록이는 소리와 함께 울컥울컥 무언가를 토해 냈다. 반쯤 뜯긴 나무 문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소리를 다 흘려보냈다. 나단이 어설프게 닫아 놓았으나 마음만 먹는다면 내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두 남자는 숲을 바라보며 뒤돌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윽윽 소리를 참으며 눈물만 흘렸다. 나단은 그에게 들어가서 로젤린의 곁을 지켜 주라고 살짝 권해보았다. 로젤린이 그의 수습 기사였을 시절부터 유달리 아끼며 이끌어 왔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레이몬드는 대답 대신 머리를 쥐어뜯던 손으로 제 얼굴을 퍽퍽 쳤다. 나단이 기겁하며 말릴 정도였다.
“레이몬드 경!”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벌겋게 변한 볼 위로 눈물이 줄줄 떨어지고 있었다. 괜찮다는 말이 그다지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머릿속에서 로젤린의 모습을 그렸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하는 검은머리를 질끈 묶고 있던 그 풋풋하던 때를.
[경. 어떻게 하면 레이몬드 경 같은 기사가 될 수 있습니까?]
[나 같은 기사?]
[강하고…… 훌륭한?]
[으하하학, 요 깜찍한 녀석! 백 밤 더 자고 나면 알게 되니까 조급해하지 말아.]
레이몬드는 눈물콧물을 소매로 슥슥 닦았다. 아직 물기 어린 눈동자에 독기가 올라왔다.
“로젤린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저도 제 일을 하겠습니다.”
비통하게 울고 있던 남자는 순식간에 기세를 바꿨다. 존경의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 초롱초롱한 눈을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을 슬퍼할 틈은 없었다.
로젤린의 내부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상처를 수복하고, 몸 안의 마력을 긁어모아 파편의 진행을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도중 늘어난 상처만큼이나 ‘파편’의 양 또한 불어난 상태였다. 마독은 한껏 범람하여 둑을 무너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리카르디스의 신성력은 금이 가고 있는 둑에 진흙을 바르는 정도의 역할이었다. 독을 치유하지는 못했지만, 지친 신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그녀를 지탱했다. 제국과 대륙이 칭송하는 신성력이 고작 이것밖에 할 수 없다니.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치를 떨었다. 리카르디스의 턱선을 따라 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안색은 로젤린과 함께 점점 파리해졌다.
[다음 편에 계속....]